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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규 Feb 09. 2022

제가 감히 이 영화를 리뷰해도 될까요?

[★★★★★] 12명의 성난 사람들 (1957)

1.

<12명의 성난 사람들>을 고작 몇 문단으로 평가하는건 영화에 대한 모욕이다. 반말을 지껄이는 것도 모욕입니다. 존댓말로 하겠습니다. 감독인 시드니 루멧께서 1957년에 만드신 이 위대한 영화는 <쇼생크 탈출>, <다크나이트>, <대부 1, 2>와 함께 IMDB 영화 랭킹 5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물론 IMDB 랭킹이 그렇게 중요하다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가끔 고전 명작을 대할 때, “그 시대 치곤 재밌는거겠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엔 IMDB는 커녕 새롬 데이타맨도 없었고. IMDB가 만들어진 1990년, 즉 영화가 만들어진지 33년이 지난 후에 봐도 미친듯이 재밌다는 것. 이게 중요한겁니다. 이 영화는 잘 만들었다, 명작이다, 역사다 이전에. 재밌습니다. 영화에 뭔 의미를 담냐 그냥 보고 재밌으면 되지 라는 사람에게도 통한다 이겁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번 더 보고 싶은 영화 많죠? 그런데 실제로 한번 더 보는건 의외로 어렵습니다. 저는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처음 장면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까지 스무번도 넘게 봤고, 이 리뷰 쓴다는 핑계로 한번 더 봤습니다. 네 말해 뭐합니까. 미친놈처럼 재밌더라구요. 


2.

영화 제목이 그러하듯, 영화는 12명의 배심원들이 한 방에 모여, 한 살인 용의자의 유죄와 무죄를 가리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헨리 폰다 말고는 알만한 배우도 없고, 극 중 이름도 나오지 않으니. 결국 우리는 열 두명의 캐릭터들을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마주치게 됩니다. 어떤 영화는 메모하지 않고선 도저히 한번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인물이 어떤 역할이고, 얘는 얘랑 무슨 관계고. 심지어 어떤 영화는 전작이나 TV 드라마, 원작 소설을 챙겨봐야 이해되기도 합니다. 시드니 루멧은 그런거 없습니다. 잘 만든 캐릭터는 그 캐릭터의 말과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영화가 시작된지 10분 만에 모든 캐릭터들을 파악하고, 열 세번째 배심원으로서 방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12명의 배심원들은 유죄와 무죄, 둘 중 하나의 만장일치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3.

손쉬운 사건인 줄 알았던 배심원들은, 8번의 무죄 투표와 함께 본격적인 <성난 사람>으로 바뀌어갑니다. 영화는 러닝타임동안 1명의 무죄와 11명의 유죄가 의견을 나누는 과정을 다룹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이것은 추리나 법정 영화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추리물에서 느낄 수 있는 극적 요소인 <맞추는 재미>를 배제합니다. 관객이 못 맞추더라도, 앞에 깔려 있던 복선과 단서들로 뒤늦게라도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쾌감 같은거 있잖아요. 영화는 그런 단서를 친절하게 던져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건을 이해하는 시점은 인물들이 의문을 던지는 시점부터 시작합니다. 배심원들은 사건 파일을 모두 열람하고, 검사와 변호사의 의견도 모두 들은 이후입니다. 우리보다 정보에 있어 앞서갑니다. 우리는 증인이 안경을 쓰든 발을 절든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건 불친절하거나 잘 못 만들어진 영화일까요? 아니면 그게 중요하지 않은게 아닐까요? 왓챠엔 딱히 구분하기 어려운지 범죄 영화로 분류되어 있지만. 이것은 추리도, 범죄도, 법정 영화도 아닙니다. 어 여기까지 썼는데 그래서 뭔 영화라고 해야하지. 인문학 영화일려나요. 


4.

이야기는 꾸준히 갈등과 미적지근한 해결, 새로운 갈등과 미적지근한 해결을 반복합니다. 무죄라는 증거를 내밀고, 그게 증거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증거는 어때? 말도 안되는 소리의 반복이다. 얼핏 사람 지치게 만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말했잖아요. 다 떠나서 재밌는 영화라고. 영화가 가진 절묘한 균형감은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물을 응원하게 되고, 나는 저 열 두명 중 누구일지 상상하게 된다. 절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는 저 사람이 좋아도 있고. 아직 누굴 응원해야 할지 고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건, "난 아무래도 상관 없어"는 없다. 이것은 그런 영화다. 


5.

한명 뿐이었던 무죄는 점차 둘, 셋, 넷으로 몸집을 키워갑니다. "당신은 누구 편이요?"얼핏 편가르기로 변질되기 쉬운 순간. 영화는 인물의 입을 통해 확실하게 못을 박는다. "편을 나누자는게 아니라, 질문을 던져보자는 겁니다". 8번은 줄곧 무죄에 표를 던지지만, 한번도 확실하게 "무죄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유죄라고 보기엔 확실치 않다"라고 말할 뿐이고, 그런 자세는 유죄로 만장일치가 되면 소년이 사형당한다는 장치에 의해서 나타난다. 


6.

영화가 끌고 가는 갈등 구조는 선과 악이 아닙니다. 얼핏 “무고한 소년을 살인자로 내몰다니! 저 나쁜놈들! 너흰 악마야!”라고 원망할 수도 있지만, 그런 반응이야말로 영화에 대한 완전한 오독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했듯, 사건의 진위 여부를 알 수 있는 단서들이 친절하게 나열되지 않습니다. 이 한정된 정보로는 명탐정 코난보다 범인을 맞추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극적 재미를 위해 사건을 파헤치며 나오는 쾌감적인 장치가 있지만, 그건 영화의 핵심이 아닙니다. 이 영화는 반대로, 11명이 모두 무죄라고 외치는데 한명만 유죄라고 외치는 상황으로도 똑같이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중요한건 진실과 거짓이 아닌, 진실과 거짓을 두고 이야기를 하는 태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건 태도에 대한 영화입니다. 12명이 모여 있는 한 방에서 대화를 나눌 때의 태도. 상대방의 의견을 들어주는 태도, 노인을 대하는 태도, 인종이나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환경을 대하는 태도. 부조리한 사회의 이면을 대하는 태도. 


7.

하지만 이 영화가 오락 영화로도 훌륭한건, 바로 범죄 영화에서의 화법 또한 충실히 따른다는 점입니다. 나이프, 기차 소리, 발을 저는 노인, 안경을 쓴 여자, 모든 단서들은 이야기를 설득하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극적인 재미를 줍니다. 우리는 이런 쾌감에 익숙합니다.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고, 별 것 아닌 것 처럼 지나쳤던 복선들이 터져나갈 때 일종의 소름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런 경험에 익숙하다고 해도, 신작 오락 영화마다 거의 무조건적으로 이런 장치가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을겁니다. 이것은 몹시 고전적인 영화의 문법이고, 아마 100년이 흘러도 같은 장치가 빈번하게 발생할것입니다. 결국 시드니 루멧은, 온전한 메세지를 전달하면서도 영화적 쾌감을 놓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맛있는데 건강하고 다이어트에도 좋은 마라탕입니다. 그런데 이제 65년 전에 나온. 


8.

메인 빌런 역의 3번은 영화가 끝날 때 까지 줄곧 모순된 발언을 한다. 어찌보면 모순이란건 자기 방어에서 오는게 아닐까.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을 자신만의 색안경을 끼고 보기에 다르게 보인다. 물론 알고 있다, 색안경도 안경인걸. 보이면서 모르는척 하는거다. 내가 보고 싶은건 이게 아니니까. 그러다보니 내가 본걸 꾸며내야 하고, 꾸며낸 진실은 종종 진실과 부딪친다. 거짓말을 능숙히 잘 하는 사람은 그 거짓된 세계 속으로 풍덩 하고 들어간다. 3번은 그저 눈에 보이는걸 외면하고 우기기만 한다. 물론 가장 아쉬웠던 부분도 3번이다. 이정도의 옹고집 빌런을 납득이 되게끔 돌려놓기는 힘들었을테니 이해는 하지만... 뭔가 초반부터 사진 보여주는게 작위적이다 싶더라니, 역시나 엔딩도 아들과 찍은 사진을 찢으면서 끝난다. 뭐 가슴 깊히 공감하며 그럴 수도 있지 라고 하기엔 너무 재수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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