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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냥 니가 하세요

by 윤동규

디자인이나 영상, 콘텐츠 기획 등에서 지독하게 거슬리는 점은 "개나 소나 의견을 보탠다"입니다. 왜 개발자나 조명, 사운드 등에는 입 꾹 닫고 있던 인간들이 포토샵 일러스트 파이널 컷 카메라 뷰파인더 위에선 무슨 리처드 파인만이라도 된 듯이 입을 놀릴까요? 왜 이건 좀 더 밝게, 이건 아래로 내리고. 아 내가 더 좋은 생각이 있는데 하며 전문가를 가르치려 들까요? 디자이너 친구와 이 문제에 대해 깊이 파고든 결과, 답은 만만해서 입니다. 이 같은 현상을 이야기해봅시다.


결국 개발자 용어처럼 복잡해 보이는건 감히 훈수를 둘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끽해야 기한을 터무니 없이 조정하거나 그 기능이 왜 안되냐는 식으로 쪼아댈 뿐이지, "아니 거기선 VG를 TIS해서 AIC에 연결하는게 더 낫겠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물론 VG도 TIS도 AIC도 대충 지어낸 용어입니다). 훈수를 위한 최소한의 지식이 없기에 결과나 마감 기한만 물고 늘어지고, 비켜봐 내가 해볼게 할 수가 없습니다. 비켜봐 내가 해볼게 하고 싶어서 툴을 배울 정도의 윗사람이면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디자인이나 영상은 어떻습니까? 초등학생도 손쉽게 훈수를 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포토샵, 일러스트, 파이널 컷 얼마나 친절한 UI입니까. 동네 개새끼도 "어 여긴 글자 좀 키우는게 더 낫겠는데"소리를 지껄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의견을 보태는건 언제나 환영이죠, 조별과제도 영양가 없이 수다스러운 팀원이 학기 내내 닥치고 있는 팀원보단 낫습니다. 어떤 의견이라도 내다보면 뭐라도 얻어 걸리는거죠. 중요한건 이건 조별과제가 아니고. 당신은 전문가가 아니며, 나는 이 짓을 10년 넘게 했습니다. 누가 더 잘 알겠습니까?


그러니 제발 방향성이나 원하는 마감 기한만 쥐어주고 입을 닫으세요. 참여를 많이 하면 할수록 퀄리티가 저하됩니다. 방해가 돼요. 개같은 의견 애써 돌려 말하며 거절하느라 시간 다 씁니다. 아 너무 좋은 아이디어인데요~ 따위의 말을 붙이는 것도 이젠 지쳤습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안된다고 하면 한번 해주시면 안되냐 거리는데, 왜 내 업무에 당신이 모르는 것을 친절히 만들어 알려주는 단계가 추가되어야 합니까. 그냥 그렇구나 하면 서로 편한데. 아니, 애초에 입 닫고 있으면 될건데.


이렇게 말하는 저지만,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는 것도 결국 제작자의 능력입니다. 자기 집을 짓는데 어떤 자재를 쓰는지 궁금해 하는건 당연합니다. 이게 더 싸고 시공이 간단해요, 말씀하신 그건 내구성이 약하고 단열도 잘 안됩니다 식의 설득 과정이 없다면 애초에 클라이언트를 대할 자격이 없습니다. 남의 돈 버는게 그렇게 쉬운 일 같습니까? 땅을 파봐요, 마이쮸 하나 못 사먹으니까.


그러니까 말하고 싶은건. 우리 제작자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테니까, 너희 클라이언트들도 좀 설득이란걸 해보란 말입니다. 그래 돈을 주고 맡기는거니까 니 입맛대로 하고 싶겠지만, 그럴거면 니가 하면 되잖아요? 못해서 맡기는거 아닙니까. 혹은 더 좋은 결과를 위해 맡긴거잖아요? 그렇게 싼 돈 아닙니다. 나 비쌉니다. 그럼 100% 다 뜯어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나도 다음에 또 같이 일할 수 있도록 제일 좋은 결과물을 내기 위해 끙끙댑니다. 누가 일 덜 하고 싶어서 당신 의견 반대한답니까? 천만에요, 그냥 병신같아서 반대하는거에요. 곱게 돌려 말해줬다고 괜찮은 아이디어라 생각하십니까? 기범이도 그것보단 좋은 의견 냅니다. 윤기범, 제 조카고 올해 어린이집 들어갔습니다.


간단합니다. 전문가에게 비전문가가 의견을 낼 때엔, 자신의 의견이 더 좋을거란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게 가장 중요해요. 내 의견은 병신이다. 명심하세요, 난 병신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중요하다, 그러니 내 병신같은 의견을 들어달라. 이게 포인트입니다. 그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전해야 합니다. 왜 병신같아도 해야 하는지. 왜 그딴 의견을 반영해야 하는지를 전해주세요. 그럼 제가 가진 가장 좋은 방법으로 병신같은 의견을 그나마 인간답게 만들어 줄겁니다. 그 방법까진 안 전해줘도 돼요. 원하는것만 말하라고, 원하는 것만.


스타일리스트 실장님께 긴 치마를 요구한적이 있습니다. 실장님이 생각한 여자 배우의 핏이나 남자 배우와의 조화, 영상의 컨셉을 생각했을 때 긴 치마는 안 어울릴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저 바람 불 때 고속으로 옷이 팔랑팔랑 거리는거 찍고 싶단 말이에요"라고 전했고, 실장님은 허리춤에 셔츠를 묶어 휘날리는 방식을 제안했습니다. 네 제가 원하는건 그거에요. 긴 치마를 입혀요가 아닌, 뭔가가 바람에 휘날렸으면 좋겠다. 유니클로에서 세일 중이면 입어보지도 않고 사는 주제에 패션에 대해 감히 의견 내지 말고, 원하는 그림만 말하는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감각이 예리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작 자기 전공은 조금만 칭찬해도 부끄러워 하면서, 쌩판 다른 업종에는 전문가보다 더 안다고 생각합니다. 열의 아홉은 가르치려 들어서 이젠 뭐 포기했습니다. 네 선생님이 제일 잘 알고 제일 위대합니다. 6살때부터 나뭇잎을 타고 강을 건너시고 솔방우로 수류탄을 만들어 던지시는 전지전능한 권능자이십니다. 천재이고 미남입니다. 인류역사상 길이 남을 지존자이십니다. 나는 병신이고 클라이언트님은 예수님입니다.


물건 만드는 놈 보다 물건 파는 놈이, 물건 파는 놈 보다 물건 파는 가게 차린 놈이 더 중요한 세상에서. 하다하다 이젠 지가 물건 만든것처럼 구는게 역겨워서 조금 길게 글을 써봤습니다. 비록 이 글은 아무런 영양가도 없이 끝나지만, 부디 세상의 수많은 전문 제작자가 공감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써봤습니다. 난 그런 클라이언트 만나본 적 없는데? 하시는 분은 충분히 존중받으며 일하고 있으니 입금되면 한번쯤 소고기라도 사주고 그러세요. 그정도의 클라이언트면 화장실 갔을 때 몰래 계산해놓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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