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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업의 자격

by 윤동규

큰 차이가, 프리랜서 시절엔 물론 아닌 경우도 많았지만. 기본적으로 "당신의 작업이 마음에 들어서 연락 드렸습니다"가 9할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니 괜히 새롭고 독특한, 평소에 안 하던 스타일을 시도하기보단 가장 나 다운거. 내 스타일의 확장, 윤동규를 잘 보여줄수록 클라이언트들이 좋아했다. 이 작업엔 이게 더 어울려, 하고 어줍잖은 시도를 하면 "아... 저희가 감독님께 기대한건 이런게 아니었는데..."하며 난감해하기 일수다. 사실 뭐 어줍잖은 시도였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 마음은 이해가 간다. 나플라를 섭외했는데 싱잉을 때려박으면 좋고 나쁘고간에 당황스럽지. 물론 제가 나플라라는건 아닙니다.


하지만 회사에선 개인의 성향보단 방향성이 더 중요하고. 방향성을 위해 개인이 움직이기 마련이다. 무슨 내가 아티스트고 회사가 엔터테인먼트고 하면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회사를 위한 작업을 하기 마련이다. 프리랜서 출신들이 회사에 적응 못하는 1703개 정도의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왜 내가 잘하는 스타일은 따로 있는데 이런걸 시키지?'. 잘하는것만 하고 싶으면 사실 회사를 나가면 된다. 그 잘하는 스타일로 평생 먹고 살 자신 없어서 회사 들어왔으면 못하는 것도 배워서 잘하게끔 해야 하지 않겠나. 프리랜서는 아티스트에 가깝지만, 회사원은 영상이든 디자인이든 회계든 기자든 모두 나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것도 내가 더 좋아하는 방향으로가 아닌 회사를 위해서.


그러다보면 배알이 꼴리는 사람이 더러 있다. 시발 나는 쥐똥만한 월급 받으며 개같이 일하는데, 쟤네들은 저 돈 다 챙겨가네? 라던가. 아니 이렇게 구린걸 내가 왜 해야 해? 진짜 멍청한 집단이야 라던가. 각종 불만이 쌓이며 자연스럽게 퇴사하고, 프리랜서로 살아갈 능력도 회사에 적응할 참을성도 없는 그 애매한 인간들이 결국은 직종을 바꾸는 길을 택한다. 물론 그게 이렇게 쉽게 정리할 정도로 간단한 과정은 아니겠지만. 내 이야기니까. 프리랜서를 대표하듯이 이야기해서 죄송해요. 나는 그게 좀 그렇더라구요.


그래서 지금 일하는 회사가 만족스럽다. 일단 그래도 프리랜서 때려치운지 좀 되어선지 월급이 쥐똥 정도는 아니며, 회사가 챙겨가는 돈도(슬프게도) 아직 배알이 꼴릴 정도로 많아보이진 않는다. 이걸 왜 해야 해? 하기 이전에 이건 이런 이유로 해야 해, 하고 교통정리를 충분히 해주며. 직원들 모두가 공통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게 느껴진다. 프리랜서 이전에도, 이후에도 나름 꽤 많은 회사를 다녔는데. 이제 겨우 5일 지났지만, 충격적이게도 1년 넘게 다닌 회사는 여기가 유일하다. 그리고 더 잘 하고 싶고, 다들 더 잘 됐으면 좋겠다. 처음으로 애사심 이라는걸 가졌다는 뜻이다.


그런 와중에 처음으로 돌아가서. 프리랜서 시절엔 말하자면 존중을 받으며 일했다. 나름 노력으로 인한 존중이었지만, 사실 지금 일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노력한건 아무것도 없다. 촬영 전 시안이 허술하고 간단하면 간단할수록 간지 난다고 생각했고(이건 일정 부분 이상덕 감독님에게 책임을 돌린다) 별다른 준비나 설득 과정 없이 뚝딱 영상 잘 만드는게 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막상 최종본을 보고 아쉬운 소리 안 들어본건 아니지만, 그건 실력이 부족해서지 이 과정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당신은 내 작업을 믿고 맡겼으니, 나도 나를 믿겠습니다. 비즈니스에서 믿음이란 말 보다 무책임한건 없는거 나도 잘 알고 있지만요.


그러니 회사에서, 회사를 위해 나아가는 방향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과정에서. 누군가를 설득시키고, 남의 돈을 받아 일을 진행시키는 프로세스를 현명하게 잘 구축하는 것. 시안을 짜면서도 아 예전에 비해 이게 더 중요해졌구나 느끼게 되는 변화를 맞이했다. 따지고보면 프리랜서 시절의 시안은 철저하게 나를 위한 시안이었다. 시안이란 이름의 촬영 구성안이었고, 이렇게 찍기 위해선 뭘 준비해야 하고 어떤걸 신경써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 만드는 과정일 뿐이었다. 레퍼런스는 언젠가 봤던 영화의 그 장면, 정도로 기억에 의존하거나. 심지어 레퍼런스 하나 없이 이렇게 찍으면 죽이겠는데 하고 상상 속으로 결정하기 일수였다. 간간히 스토리보드를 그리기도 했는데, 그 역시 내가 그대로 찍기 위해 어차피 필요한 작업을 공유했던 것 뿐이다.


근데 또 생각해보면 그럴만한게. 이쯤에서 원래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잠깐만 좀 빡치잖아요. 그니까 촬영이 1주일 뒤면, 시안을 1주일 뒤까지 짜는게 맞지 않아요? 제일 뾰족하게 잘 가다듬은 시안으로 찍는게 좋잖아. 그런데 촬영 전날 시안 공유하는 것 보단, 그래도 뭉뚱그린 대략의 시안을 1주일 전에 공유하는게 더 좋지 않나? 1주일 전에 디테일한거 공유했다가 1주일만에 마음 바뀌면, 아 이걸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하고 또 보내? 아니면 바뀐걸로 그냥 찍고난거 보고 어 이거 시안이랑 다른데요 안 할거야? 결국 시안을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루는건 더 좋은 작업을 위한거잖아. 이봐요 클라이언트씨 좀만 더 믿고 맡겨봐요. 내가 잘 만들어줄게. 진짜 믿어보래도? 뭐가 그렇게 의심이 많아요.


같은 이야기를 뭐 프리랜서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게 사실 프리랜서의 삶을 무시하는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회사에서는 이런 이야기 못 한다는건 알고 있다. 시안 공유하는거 오늘까진데 이런 글을 적고 있자니 회사도 무시하는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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