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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넬의 서재 Nov 07. 2020

지구가 망한지 1년이 지났다.

그 어떤 경고도 없이 시작된 절망이었다.  


지구가 망한지 1년이 지났다. 


세상 두려울 것 없어 보이던 권력자, 과학자, 미래예측자 등 아무도 지구가 갑자기 망할 것이라 경고한 사람은 없었다. 이상할 노릇이었다. 항상 잘났고 똑똑해서 세상이 나아갈 방향성을 지휘하던 사람들이 이렇게 큰 사건을 예견하지 못했다는 건. 무언가 알면서도 침묵한게 아니였을까 싶을 정도로 급작스러웠다. 하룻밤 사이, 일반 대중들은 세상에 갑자기 무시무시한 바이러스가 퍼졌다는 뉴스만 들었다. 전파율이 지금까지 보았던 바이러스와는 차원이 달랐다고 했다. 그렇기에 전국민이 자가격리를 실시해야 한다고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처음에 콧방귀를 꼈다. 정녕 재앙이 닥쳤다면 지나치게 쌩뚱맞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미래를 예측하고, 불편을 최소화하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효율성을 가장 중시하는 것이 인간들이 수세기 동안 발전해온 방향이었고,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에 대한 자부심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로 인류의 발전에 급브레이크를 밟을 만한 사건이 터질 것이었다면 사람들은 몇 년 전부터 그에 대한 경고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 바이러스 사태와 정부의 반응은 오버스러운 억지임이 분명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그 누구도 완벽한 자유의지에 의해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뉴스, 미디어, 심지어 시도 때도 없는 핸드폰 알람과 경고로 밀어붙힌 정부의 바이러스와의 싸움을 저지할 개인은 없었다. 출처도 모르는 인류를 위협한다는 바이러스는 배터리가 다 된 시계마냥 하루 아침에 지구의 시간을 멈추어버렸다. 


갑작스런 바이러스와의 전쟁 선포에 모든 일상생활이 멈추어 버렸다. 옆나라에서 퍼졌다는 바이러스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를 포함한 전세계로 급확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패닉을 했다. 뉴스는 끊임없이 바이러스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했고, 살면서 들어본 적도 없는 전국민 사회적 거리두기와 자가격리 명령이 떨어졌다. 여행은 물론, 단체활동은 전면 금지되었다. 학교들은 임시 휴계를 선포했다. 직장인들도 강제휴가나 원격근무로 전환했다. 기업들은 멈춰버린 소비활동에 얼마 가지 않아 휘청거렸다. 


믿기지 않을 일들이 하나 둘씩 이어져 나갔다. 사람들은 꼼짝없이 집 안에 갇혀 무작정 기다려야 했다. 심지어 외출을 할 때는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는 경고까지 나왔다. 혹여나 외출이라도 한다면 가는 곳마다 체크인을 하고 동선을 감시당했다. 지금까지 발전시켜 왔던 모든 기술은 곧 바이러스가 아닌 사람을 통제하는데 사용되었다. 집 안에 발목이 묶인 사람들에게 유일한 소통의 창구는 미디어와 인터넷 뿐이었다. 사람들은 뒤늦게 손 안의 핸드폰 액정이, 컴퓨터 화면이, 자신들 세상의 전부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세계 여러 나라들이 하나 둘씩 바이러스로 인해 국경을 닫기 시작했다. 종교 단체들은 예견된 세상의 종말이 왔다고 난리법석을 떨었다. 그 와중에도 정부와 기업들은 살 길을 찾아 답없는 대책들을 쏟아냈다. 거대한 해일이 덮치기라도 한 듯, 일반 대중들은 플랑크톤 마냥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렸다. 


바이러스의 원인을 해명하는 여러가지 가설이 돌았다. 전세계 엘리트 집단의 단일정부 계획과 강대국들 사이의 의도된 만행이라는 말이 빈번했다. 아무도 확실한 대답과 대책이 없었다. 그래도 방송은 끝없는 공포감을 조장했다. 나이와 신분에 관계없이 인류는 종잡을 수 없는 미래에 불안해했다. 사람들은 항상 알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측 가능하고 논리적인 방향으로 인류는 이제까지 발전해온 것이었다. 


어찌할 새도 없이 몇 달이 지났다. 어느 순간 전세계는 감염자와 사망자 카운트 다운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는 어느새 처벌 대상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집 안에서 무기력하게 시간을 떼우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하루 아침에 직장인들은 직장을 잃고 밥줄이 끊겼다. 해외에서 거주하던 이들은 인종차별을 피해 고국으로 귀국하기 바빴다.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원격으로 전환되면서 디지털 사용에 미숙한 계층은 정보의 불평등으로 더욱 고통받았다. 중상위층은 그나마 코로나를 핑계 삼아 휴식기를 가졌지만, 가지지 못한 자들은 바이러스가 아닌 먹고 살 돈이 없어 굶어 죽을 판국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세계경제조차 무너졌다. 


불안 속에서도 갑자기 할 일을 잃은 사람들은 집단 우울증을 겪기 시작했다. 바이러스가 얼마나 지속될지, 백신 개발이 나올지 아무 것도 확실한 게 없었다. 어느 날 세상을 덮친 불행은 세상을 극과 극으로 갈라놨다. 갈 곳을 잃은 자금은 주식 시장과 부동산을 뒤흔들어 놓았다. 업종에 따라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대기업들조차 무너졌다. 혼란의 시대를 타 기회를 잘 만난 소수의 사람들은 바이러스로 신흥 부자가 되었다.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나갔다. 계층 간의 격차는 K자로 점점 돌이킬 수 없게 벌어졌다.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악몽 같은 방학을 선물받은 사람들은 그제서야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꼭 그랬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만 한 가지 깨달음을 겨우 얻었다. 한평생 쌓아온 노력들이 눈앞에서 무너져내렸다. 무엇을 위해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나 방황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온라인은 어느새 음모론 뿐만 아니라 이제는 영적으로 깨어나야 한다는 영성 단체들도 늘어났다. 공상 과학 소설보다 더 공상 과학 소설 같은 현실에서 사람들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대한 답을 내리기를 포기했다. 원래 삶이 불안할 수록 사람들은 절대적인 존재를 찾았다. 무언가를 믿는다는 건 예측 불가능한 불행 속에서 지탱할 빛 한줄기가 생긴다는 뜻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일상과 생각이 사실 완벽하게 통제 당하고 살았음을 깨달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사는게 바빠 깊게 생각해볼 여유가 없던 화두였다. 네모난 화면을 통해서만 바깥 세상과의 접속이 가능해진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도 자신들에게 허용되는 정보가 노골적으로 편향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정녕 21세기를 살고 있는가 의심이 들 정도로 특정 의견과 생각들은 배척당했다. 자신들의 모든 생각은 사실 외부로부터 주입된 것이며, 성실하게 살아오던 일상조차 정신없이 살도록 유도당했음을 체감했다. 몇 달째 지속되는 고립된 생활과 경제적 압박은 많은 이들의 무의식 속 정신적 트라우마와 트리거를 발동시켰다. 


절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세상은 악의 축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음모론은 일상에서는 입 밖으로 잘 꺼내지 않았지만 내심 더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지배 상위계층에 대한 반발은 결국 물리적 투쟁으로 이어졌다. 불안이 최고조를 이룬 상황에서 계층 간의 갈등, 인종 간의 갈등, 나라 간의 갈등에 세상 조용할 날이 없었다. 유난히도 많은 유명인들이 죽었고, 유난히도 많은 부정부패가 세상 밖으로 드러났다. 세계 최강국의 대선을 앞두고는 대놓고 전세계 사람들을 농락하는 추행까지 이어졌다. 


인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애초에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앞으로 인류의 발전방향은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지극히 현실적이던 사람들조차 눈 앞에 닥친 절망 앞에서는 철학적 사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이건 개개인의 트라우마가 아닌, DNA 속에 각인될 집단적 트라우마였다. 누구의 잘못이 가장 컸던 간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시대 사람들이 모두 짊어져야 할 책임과 절망이었다. 


이 판국에도 격리 생활 중 태어나버린 영혼들에게 바이러스 이전의 세상을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할까. 그들에게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묘사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같은 일을 겪어도 절망의 크기는 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보다 현실을 살아가는 어른들에게 세상이 절망스러워 보이듯 말이다. 전쟁터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전쟁터가 곧 삶이고 터전일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연민도 결국 상대적이었다. 앞으로의 세대는 태어남과 동시에 정신이 디지털화가 되어 큰다 해도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고통은 항상 그리워하는 자들의 몫이었다. 불행은 항상 도태되는 자들의 몫이었다. 


지구가 망한지 1년이 지났다. 그 어떤 경고도 없이 시작된 절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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