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부여군
평일에 찾은 부여는 무척 조용했다. 번잡하고 사람 많은 도시를 떠나 부여에 도착한 건 한 주가 시작하는 월요일 오후. 이번 부여 방문은 3일간 동계 캠핑을 겸했다. 쉘터 형 텐트를 챙기고 작은 등유 난로도 챙겼다. 두툼한 침낭까지 챙겨 드니 초겨울 한기를 막기에는 충분했다. 캠핑 장소는 장암면에 있는 캠핑장으로 결정했다. 요금이 저렴했고 읍내까지 거리도 가까웠다. 자동차를 이용해서 10분이면 부여 중심지 거의 모든 곳을 갈 수 있는 위치였다.
방문할 곳을 미리 확인하려고 지도를 확인했다. 부여는 큰 강이 휘감고 있는 곳에 부여읍이 있고 그곳에 군청과 경찰서를 비롯한 관공서가 있다. 이런 모습은 역사가 오래된 도시 특징이다. 강이 돌아나가기 때문에 물이 넘치더라도 큰 피해를 줄일 수 있다. 또한 영양분 많은 퇴적물이 강 옆으로 쌓여 농사에도 좋은 곳이다. 부여읍은 오래전부터 사람이 터를 잡고 살았던 곳이 아니었을까. 아니나 다를까. 부여 유적과 유물이 발굴된 터가 모두 부여읍 안에 모여있었다. 지도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유적지만 해도 구아리 백제 유적, 정림사지, 쌍북리 요지, 군수리사지, 화지산 일원 유적, 관북리 유적 등 알려지지 않아 낯선 이름이지 분명 이곳에는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머무는 동안 사람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간혹 지나는 자동차와 텅 비어있는 노선버스만이 이곳에 사람이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알려줄 뿐, 행인이나 문을 열고 있는 상점을 찾기도 어려웠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건지 폐업을 한 건지 알 수 없는 비료 상점, 도시에서 자동차 정비소가 있음 직한 곳에는 영업을 그만둔 것처럼 보이는 농기계 수리소가 간판을 걸어놓고 있었다. 편의점이 있을법한 도로 모퉁이에는 진열대가 텅 비어있는 로컬푸드 판매장이 있을 뿐이었다. 한적한 길을 천천히 운전하고 싶어 뒤따라오는 버스를 피해 비상등을 켜고 길옆에 잠시 정차했다. 버스는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고 찾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간판 없는 슈퍼마켓과 ‘별난집’이라는 작은 식당 간판만 바람에 흔들렸다. 건너편에는 푹신한 자주색 벨벳 소파가 어울릴법한 ‘강변 다실’이라는 찻집 간판이 보였다.
부여를 돌아나가는 강, 백마강이 바로 앞에 있었다. 금강이라 부르지만, 이 도시를 지날 때는 백마강으로 이름이 바뀌는 강, 예전에는 흙을 쌓은 둑이었겠지만 지금은 콘크리트로 제방을 쌓아 그 위에는 산책로를 만들어 두었고 철제 계단을 한층 올려 전망대를 만들어 두었다. 차가운 초겨울 공기를 가로지르는 겨울 아침 햇볕을 쬐고 싶어 계단을 딛고 올라섰다. 전망대라기보다는 젊은이들의 유입을 고대하며 색색으로 칠한 컨테이너로 만든 작은 상점들이었다. 오래전 문을 닫은 것인지 사람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고 창문에 붙어있는 빛바랜 스티커만 본래 용도를 말해주고 있었다. 잠시 계단에 걸터앉아 겨울 아침 햇살을 마주하고 눈을 감았다. 조용히 흐르는 백마강 물소리와 멀리서 들리는 철새 날갯짓 소리가 이곳이 번화한 도시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었다. 겨울 아침 따뜻한 햇볕을 받아서 그런지 나른한 졸음이 찾아왔다. 부신 눈을 찡그리고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강을 따라 잠시 걸었다. ‘부여유람선’이라는 팻말이 있어 주변을 살폈다. 더 이상 영업하지 않은 것인지 겨울철 잠시 쉬기 위한 것인지 유람선은 뭍으로 올라와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본격적으로 부여 곳곳을 둘러보기 위해서 먼저 찾은 곳은 신동엽 시비詩碑. 시비는 함께 글을 쓰는 문우들과 문학기행으로 찾았을 때 저녁식사를 했던 식당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멀지 않은 게 아니라 바로 지척이었다. 차에서 내려걸어보니 2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문학기행을 한다면서 지척에 신동엽 시비를 두고 그대로 돌아섰다는 게 괜스레 죄스러웠다. 하지만 저녁 식사였고 이미 해가 떨어진 다음이라 백마강 기슭 소나무 우거진 곳에 방문하는 일이 다소 무리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도 된다. 신동엽 시비 인근 역시 내가 머무는 동안 아무도 지나는 사람이 없었다. 주변은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아주 잘 조성되어 있었고 깨끗한 공중화장실까지 있었지만, 여전히 사람 흔적은 찾기 어려웠다. 택배차 한 대가 먼지를 날리며 지나갈 뿐이었다.
신동엽 시비는 1970년 4월에 건립되었다. 신동엽이 세상을 떠난 지 딱 1년 되는 해에 세워졌다. 그의 첫 기일인 4월 7일에 완공하려 했으나 공사가 늦어지며 4월 18일에 제막식을 가졌다. 건립비 26만 3천 원은 한국문인협회와 지역유지 등의 후원이었다. 시비에는 신동엽의 시 「산에 언덕에」가 적혀있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산에 언덕에」 중
뒷면에는 구상(1919~2004)의 시비 건립문을 새겼다. 당시에 시비로는 충청남도에 최초로 세워졌다. 제막식은 최일남(1932~2023)의 사회, 구상의 식사(式辭)가 있었고, 박봉우(1934~1990)의 시비명 낭독과 김동리(1913~1995)의 추도사, 박두진(1916~1998)의 강연도 있었다. 그만큼 많은 문인의 관심을 받는 행사였다고 생각해도 될듯하다. 최근에 시비 뒤로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던 모양이다. 빛이 바래고 낡아 찢어진 채 광야의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현수막에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연중행사로 전교조에서 학생과 함께 이곳에서 작은 추도식을 진행한다는 이야기는 후에 찾은 신동엽문학관 김형수 관장에게 들었다.
신동엽의 또 다른 시비가 모교인 부여초등학교에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지 않을 수 없었다. 10분 정도 차를 달려 부여초등학교를 찾았다. 평일 초등학교는 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로 무척 활기찼다. 부여에서 사람 소리를 듣는 게 거의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록달록하게 채색된 교문 앞을 서성였다. 교문에는 외부인 출입을 엄격히 금지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언론을 통해 접한 몇몇 사고 때문인 듯싶었다. 성큼 걸음을 옮기기도, 그렇다고 교문 앞에만 서 있기도 애매하던 차에 누군가 학교 밖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학교 안에 신동엽 시비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하지만 이 학교에 그런 게 있냐는 물음으로 되돌아왔다. 이곳에 2년 동안 근무했지만 잘 모르겠다고 했다. 운동장 끝자락에 커다란 비석이 보여 그것이 아니겠냐고 물었더니 역시 잘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학교 담장을 에둘러 빠른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건물 끝에 있는 돌은 건립 기념석이었다. 다시 학교 정문으로 돌아왔다. 마침 담장 앞에 빗자루질을 하고 있는 경비아저씨를 만날 수 있었다.
“선생님! 혹 학교 안에 신동엽 시비가 있다고 하는데 들어가 볼 수 있을까요?”
잘 모르는 낯선 이에게 내가 원하는 바를 받아내려면 보이는 모습보다 높은 존칭을 사용하는 게 수월하다. 학교 앞이기도 하고 나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인 게 확실하니 글자 그대로 선생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흔쾌히 들어가라고 했지만, 그 말미에는 학교에 그런 게 있나하는 혼잣말이 붙었다.
신동엽의 모교인 부여초등학교에 세워진 시비는 존재를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괜스레 씁쓸했다. 찾으면 안 되는 무언가를 찾고 있는 느낌. 한가득 그의 존재감을 느끼고 싶어 찾아온 부여에서, 그리고 모교에서도 기억해주지 않는 그의 존재는 어디로 간 걸까.
초등학교에 세워진 시비는 학교 건물 사이에 놓여있었다. 그 앞을 지나지 않고는 교실로 출입할 수 없는 자리에 설치되어 있었다. 시비는 신동엽 30주기를 기념해서 세워졌다. 시비에는 그의 시 「금강」의 한 구절이 적혀있다.
진달래
너의 얼굴에서
사랑을 읽었다
서사시 「금강」 제5장에서
씁쓸한 마음을 돌려 신동엽 문학관을 찾았다. 신동엽 문학관은 한때 남의 소유였지만 그의 부인 인병선 시인이 되사서 1985년 옛 구조 그대로 재건축했다. 그때는 이 집을 방문하면 부친 신연순(~1990)이 순례자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고 한다. 그것이 이곳을 찾는 여행자에게 또 하나의 감동이었다고 전해진다. 유족은 2003년에 생가를 부여군에 기증했고 부여군은 2005년부터 문학관 건립을 추진해 지금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초가지붕을 얹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마침 바람을 쐬러 나온 문학관 관장과 인사를 나눴다. 임헌영 교수에게 글을 배우고 있는 제자이고 지난 9월에 왔었다는 인사를 건네기가 무색하게 이미 알고 있다며 반가워해 주었다. 잠시 생가 뒤편에서 지붕 얹는 공사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원래 해를 걸러 초가이엉을 얹었지만 요즘 볏단은 예전만큼 명이 길지 않아 매년 초가이엉을 새롭게 얹어야 합니다. 벼가 자랄 때 더 많은 영양분이 쌀로 가게 개량돼서 볏단에는 그만큼의 영양분이 남지 않아요. 예전만큼 질기지도 않고 금방 썩어버려 매년 교체하지 않으면 지붕이 주저앉아버리죠.”
문학관 관리주체가 부여군이라 문학관에서는 일정만 조율하고 나머지는 부여군에서 비용을 들이기 때문에 교체에 얼마나 큰 금액이 들어가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지난번 방문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감나무 열매는 달랑 세 개가 남아있었다. 모두 수확했는지 물었더니 오가며 하나씩 따 먹었더니 남은 게 이거라며 슬며시 미소를 짓는 문학관 관장의 모습에서 소년 시절 신동엽의 사진과 겹쳐 보인 건 나만 느끼는 그것은 아니었을 것 같다.
신동엽 작가의 흔적을 찾아 돌아다닌 부여는 공사를 멈춘 건물과 이런저런 물건이 적치되어 방치된 길, 인도와 차도 구분이 없는 길거리. 도로 한쪽으로 가지런히 주차돼 있는 불법 주차 차량과 언제부터 있었는지 가늠도 되지 않을 만큼 낡은 장기 방치 차량. 건물과 간판은 번듯하지만, 평일에도 굳게 셔터가 내려져 있는 우체국과 은행은 이곳이 지금 어떤 곳으로 변해가고 있는지 짐작게 했다.
스산한 날씨 때문인지 인구 소멸을 가깝게 느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얼마 남지 않은 단풍과 부여에 머무는 사흘 동안 조금씩 추워지는 날씨는 오랜만에 혼자 떠난 여행을 더욱더 쓸쓸하게 만들었다. 아무도 기억하고 있지 않은 신동엽 시비가 그랬고 영업을 그만둔 유리창이 깨져있는 식당이 그랬다. 뭍에 올라와 기울어져 있는 유람선과 때가 돼서 교체하고 있는 초가지붕의 용마름과 이엉도 잊혀가는 계절만큼이나 유독 스산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