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수식어』를 읽고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 사람의 피부색이 나와 다르다면, 더구나 그 말이 우리말이 아닌 영어나 스페인어 혹은 제3국의 언어라면 나는 그 사람이 한국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런 사람이 전 세계에 750만 명이나 있다고 한다. 믿을 수 없었다.
“우리가 스스로를 부르는 말인 ‘한국인’은 대한민국 국적자에 한정된 단어이다. 한반도 밖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조선족, 자이니치, 고려인, 재미 교포, 한인 입양아, 탈북자 등 다양한 수식어로 불릴 뿐이다.”(9페이지)
이들을 가리켜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부른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디아스포라는 특정 민족이 자의나 타의로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집단을 형성하는 것 또는 그러한 집단을 일컫는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책의 작가는 자신을 디아스포라라고 말한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에서 초중고교를 다닌 작가는 18세에 미국 국적을 선택한다.
국적 선택 후 “미국에서 태어났다 뿐이지 한국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한국인으로 살아온 내가 순식간에 미국인이 되기에는 너무 많은 장벽이 존재했다”(76페이지)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수식어는 일부일 뿐이다. 우리는 한국인의 기준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한국의 주민등록번호를 가지고 있는 사람, 한국말을 잘하는 사람, 부모 양쪽이 한국인인 사람,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 그 기준에서 보면 나는 완전한 한국인이다.
작가는 미국 국적을 선택한 후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겪다가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스스로의 국적과 정체성을 고민하던 중 우연히 쿠바 여행을 계획했다. 그곳에서 또 다른 우연으로 한국인을 만나게 된다. 예약해둔 숙소에서 공항으로 픽업을 나온 사람이 한국인 3세였다. 그 사람이 체 게바라와 함께 혁명을 주도한 헤로니모 임의 손녀라는 것, 헤로니모 임의 부친이 백범과 서신을 주고받은 임천택 선생이라는 것을 우연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계속되는 우연은 필연이라고 해야 한다.
쿠바에 어떻게 한국 사람이 살게 된 것일까. 1905년 황성신문에 실린 부유하고 따뜻한, 질병이 없는 나라에서 부농이 될 수 있다는 광고를 보고 멕시코를 향한 1,033명의 조선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 꿈은 에네켄(henequen) 농장에서 매일을 버텨내야 하는 삶으로 바뀐다. 우리는 그들을 ‘애니깽’이라 기억하고 있다. 그사이 조선이라는 나라는 지도에서 사라진다. 4년의 노동 계약이 끝났지만 돌아갈 나라와 배를 탈 돈조차 없는 그들은 그곳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 일부가 조금 더 나은 삶을 기대하며 쿠바를 향한다. 그들이 쿠바 한인 1세대다.
혁명 쿠바에서 산업자원부 차관으로 일을 한 헤로니모는 은퇴 후 쿠바에 있는 한인을 규합했다. 혁명 직후에 사회주의를 떠나 미국을 향한 한인도 있었지만 헤로니모는 한인이 최초로 상륙한 쿠바 마탄사스 항구에 기념탑을 세우기도 했다. 그 탑은 전통 기와지붕 모양이다. 그리고 지붕의 한쪽은 그들의 고향, 한반도를 향해있다. 헤로니모 임은 한인회를 설립하고 싶었다. 그러나 쿠바 정부는 남한과 북한, 둘 중에 하나의 정체성을 선택해야한다고 했다. 한인들은 하나의 조선에서 왔기에 둘 중에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었고, 아직까지 쿠바 한인회는 공식적인 지위가 없다.
이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쿠바는 시가의 나라, 올드카의 나라,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의 나라일 뿐이었다.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가 세계일주를 떠나기 이틀 전, 작가가 만든 다큐멘터리 소식을 들었고, 쿠바에 사는 한인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여행경로에 쿠바를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 여행지인 멕시코에 가기 전에 쿠바를 계획에 집어넣었다. 쿠바에 도착해서 마탄사스 항구에 있다는 기념탑을 쓰다듬고 싶었고, 그 자리에 막걸리라도 한 잔 부어놓고 싶었다. 우연하게라도 한인을 만난다면 한번쯤 인사를 나누고 손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장기 여행의 많은 변수는 나를 막아섰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여행이기에 생각도 못했던 만남이 생기기도 했다.
하바나에서 두 개의 태극기를 만났다. 처음만난 태극기는 새벽에 도착한 하바나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에서였다. 태극기는 한국의 젊은 여행자의 배낭에 붙어있었다. 하지만 태극의 빨간색이 아래로, 파란색이 위로 가 있었다. 태극기는 거꾸로 붙어있었다. 조심스럽게 말을 걸고 바르게 붙여주었다. 여행자는 몹시 부끄러워했다. 새벽에 도착한 공항에서 각자 숙소를 찾아가느라 이내 공항에서 헤어졌지만 이튿날 시내에 있는 와이파이 존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를 다시 나눌 수 있었다.
두 번째 태극기는 하바나 구시가지의 지저분한 골목길에서였다. 낡은 자전거에 매달린 태극기가 더 희게 느껴졌다. 뒷좌석에 두 명이 앉을 수 있게 개조한 자전거 의자에는 덕지덕지 테이프가 발라져 있었다. 근거리 이동수단으로 보였다. 한국인 여행자를 위한 태극기일까, 자전거 주인이 한국인일까. 그 둘 모두일까. 자전거 주인을 만나고 싶어 살폈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동안 자전거 옆에서 사람을 기다렸다. 지나는 하바나 시민들이 손을 흔들거나 눈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자전거 옆에서 모자를 벗어 들었다. 태극기에게, 그 자전거 주인에게, 자전거 주인의 할아버지에게 잠시 고개를 숙였다. 여행자인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책의 작가 전후석은 헤로니모의 삶을 다큐멘터리 영화 『헤로니모』로 만들었다. 영화를 만들면서 70여 명의 한인 후손과 인터뷰했다고 한다. 작가는 그들에게 남한과 북한 중 어느 쪽이 스스로의 정체성과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이들의 대답은 모두 같았다고 전한다.
“Una Corea(하나의 한국). 나의 할아버지는 바로 그곳에서 오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