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봄

조각 수필(소설) #15

by 닐슨

1.

박정희가 한 번 더 만장일치로 대통령으로 당선된 날, 순영은 옆집 경묵 엄마에게 한 번 더 돈을 빌렸다.


- 저......, 경묵이 엄마, 또 부탁해서 미안해요. 애들 아빠가 한국에 들어오면 한꺼번에 정리해 드릴게요.

- 에구, 또 생리대가 떨어졌구먼. 시아버지는 아직도 생활비를 안 줘?


경묵 엄마에게 조금씩 빌린 돈이 벌써 삼만 원을 넘겼다. 크레인 운전 기술을 가지고 있는 남편은 둘째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외파견을 자원했다. 월급은 많아져서 좋았지만, 남편의 부재보다 더 무거운 짐이 놓여있다. 시아버지와 결혼하지 않은 시동생 둘, 네 살과 한 살의 두 아이, 이렇게 다섯 명의 남자들 틈에서 어떻게 버텨야 할지 막막했다. 더군다나 남편의 월급은 시아버지가 관리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하는 도련님들은 자신들의 생활비 명목으로 매달 일정 금액을 주지만 그마저도 시아버지가 받아간다. 시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 나에게 생활비를 내준다. 하지만 또다시 당선된 대통령의 독재처럼 시아버지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시아버지의 생활비 계산법은 치밀하고 정확하다.


여섯 식구, 한 달 치 세숫비누는 한 장하고 절반, 치약은 한 개 하고 삼 분의 일, 하루에 세 끼, 날 수를 곱하고 한 끼의 부식비는 딱 오백 원. 치밀하고 정확한 계산이다. 주판알을 튕겨 딱 맞게 생활비를 내준다. 너무나 정확해서 소름이 끼치곤 한다. 항상 부족하지만 조금만 더라는 이야기는 감히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더군다나 생리대나 속옷을 사야 한다는 말을 꺼내는 것은 더욱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남편이 떠나고 언젠가부터 시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시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조금 더 누르고 있을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마저도 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이제 겨우 스물여섯, 나는 오늘도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2.

시아버지는 아침상을 물린 후 가끔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나 첫 손자를 처음 안아보았을 때의 느낌 등을 이야기해주곤 했다. 젊은 시절 앓았던 늑막염 수술로 갈비뼈를 다섯 개나 잘라낸 시아버지는 그 후유증으로 기침과 가래를 달고 산다. 이야기하다가 기침 소리가 심해지면 덜컥 가슴이 내려앉곤 한다. 시아버지는 가끔 라면으로 식사를 해도, 아침상을 치우지 않고 이야기하다가 그대로 점심 준비를 해도 그 정도는 이해해주긴 한다. 생활비 문제만 제외하면 나와 큰 갈등은 없는 시아버지다.


대통령이 부하에게 총을 맞고 죽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나에게도 독재가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시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생활비를 받는 날은 며칠이 더 남았기에 시아버지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날인 줄 알았다.


- 이거 받아라. 전부 네가 절약해서 모은 거다. 작은 집은 하나 살 수 있을 게다. 그리고 생활비는 앞으로 네가 관리해라.


시아버지는 그간 내가 생활비를 아낀 것이라며 난생처음 보는 큰돈과 그간 정리해놓은 가계부를 내주었다. 나에게도 이렇게 독재가 끝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무거움을 느낀다. 그동안 시아버지를 원망만 했었는데, 이렇게 큰 선물을 덜컥 받아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3.

“서울의 봄”이 온다고 신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던 때, 작은 연립주택을 계약했다.
방이 세 개나 있고 싱크대가 놓여있는 주방이 있는 집이다. 화장실도 수세식이고 여섯 가구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작은 마당도 있다. 김장철이면 서로가 품앗이도 하고 연탄을 들이는 날이면 한꺼번에 주문을 넣어 조금 더 싸게 들여놓기도 했다. 연립주택에 이름을 붙이자는 의견에 반상회를 열어 “우리집”이라는 이름을 건물 외벽에 새겨 넣었다. 짜장면을 시킬 때면 번지 대신에 “우리집연립 203호”라고 말하면 되는 것도 기분 좋았다. 작은 베란다에는 봉숭아도 심었고 나팔꽃도 심었다. 아이들의 교육에 좋다길래 어항에 금붕어도 몇 마리 키웠다.


하지만 “서울의 봄”이 짧았던 것처럼 시아버지의 봄도 짧았다. 시아버지는 마지막 순간에 행복하게 눈을 감을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시아버지의 짧은 봄이 끝났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아니 흘릴 수 없었다. 눈물을 흘린다는 게 시아버지를 편하게 보내드리지 못하는 일인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야 뜨개질해서 만들어 드린 즐겨 입던 스웨터와 늘 깔고 앉아있던 방석을 정리하다가 눈물이 터졌다. 시아버지가 더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걸 느꼈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세상을 바로 볼 수 있었다.


- 아! 한 사람의 봄이 끝나니 또 다른 봄이 시작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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