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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닐슨 May 07. 2021

만남은 필연이 아니야

조각 수필 #18

패키지여행을 경험한 우리 부부는 일정이 짜여있는 여행이 우리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우리도 자유여행을 시도해보자고 했고 그 첫 번째가 라오스였다. 밤 비행기를 타고 수도 비엔티안에 도착한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은 시간. 두 시간의 시차를 계산하면 한국은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피곤할 법도 했지만, 해외여행의 즐거움과 흥분은 모든 것을 상쇄해 주었다.


짧은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우리 부부는 비엔티안을 출발해 배낭여행의 성지라고 불리는 방비엥으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예약한 버스 시간은 오후 2시. 오전 시간이 남아 비엔티안을 잠시 둘러보기로 했다. 그때 혼자 여행을 온 한국 여행자를 만났고 툭툭이(오토바이를 개조한 단거리 이동수단) 비용을 아끼자는 생각에 함께 오전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서로 통성명을 하며 인사를 나눴다. 그녀의 이름은 “하지원”. 유명 연예인과 이름이 같았다. 혼자만의 여행을 왔다고 하는 그녀는 경상도 말씨를 가지고 있었다.

툭툭의 비용을 절반씩 내고 빠뚜사이와 탓 루앙을 둘러봤다. 그곳의 느낌이야 동남아시아의 그것과 비슷하기에 큰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자유여행의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더군다나 낯선 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동행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그녀는 결혼생활에 대해 많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결혼생활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해주었고 여자 혼자 여행하는 느낌에 대해 물었다. 서로가 그간 다녔던 여행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비엔티안에서 며칠을 더 머문 후 방비엥을 향한다고 했다. 깊지 않은 대화, 잠시 스쳐 지나는 짧은 만남이었다. 다만 우리와 헤어진 후 혼자 비엔티안에 머물고 있을 그녀가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저녁 무렵 도착한 방비엥은 7년 만에 내린 폭우로 마을 전체가 흙탕물이었다. 아내는 도착하자마자 비엔티안에 있을 그녀에게 방비엥의 상황을 문자로 알려주었다. ‘비가 많이 온다’, ‘해가 떨어지면 어두운 골목길이 많다’, ‘술 취한 서양 남자들이 많다’, ‘어느 식당의 볶음밥이 맛이 좋다’는 등, 마치 언니가 동생에게 이야기하듯 방비엥의 상황을 전해주었고 그녀는 우리가 보지 못한 비엔티안의 건물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 만남을 잊었다.


자유여행에 자신감이 생긴 우리 부부는 라오스 여행 2년 후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다.

후쿠오카에서 구마모토를 거쳐 유후인 그리고 벳부 그렇게 규슈 북부를 일주하는 장거리 여행이었다. 마지막 여행지인 벳부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7시 즈음. 작은 도시의 저녁은 일찍부터 어두워졌다. 식당 대부분은 문을 닫았고, 그나마 불이 켜진 식당은 마감 준비로 추가 손님을 받지 않았다. 숙소 주변을 두 바퀴는 족히 돌아봤지만, 아내가 원하는 덮밥 메뉴를 파는 식당을 찾기가 어려웠다. 결국 제일 처음에 들어갈까 갈등했던 작은 라멘 가게에서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단정한 밝은 색으로 칠해진 테이블엔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남자, 다른 테이블에는 부모와 딸로 보이는 세 명이 앉아있었다. 우리 부부는 그들의 가운데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식당 밖에서 미리 찍어둔 사진을 보여주며 무사히 주문을 마쳤다. 주문한 라멘이 서빙되고 한 젓가락 먹으려는 순간, 건너편 테이블에서 한국말이 들려왔다.

    “혹시 한국 사람이세요?”

경상도 억양인 탓이었을까. 벳부의 라멘 가게에서 들려온 한국말이 낯설었다. 내가 들은 말이 일본말인지 한국말인지 짧은 순간 헷갈렸던 것 같기도 했다.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들었다. 라멘 국물에 담가 둔 숟가락이 떨어지며 뜨거운 국물이 바지에 몇 방울 튀었다.

    “몇 년 전에 라오스 가시지 않았어요?”

기억을 더듬어 라오스를 꺼냈다. 그래 우리 부부가 라오스를 갔었지. 벌써 2년 전이었다. 그걸 저 사람이 어떻게 알고 있을까?

    “네, 갔었는데……… 누구……?”

    “저 하지원이에요. 기억나세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연예인 하지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라오스에서 만났던 하지원이 생각났다.

    “우아아아~~~~~악!!!!!”

그랬다. 라오스에서 만났던 “하지원” 씨를 벳부의 라멘 가게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소리를 지르자 식당 안의 남자와 식당 아주머니가 놀란 눈으로 우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개의치 않았다. 라오스에서의 짧은 만남이 다른 나라 일본의 벳부, 그것도 우리가 들어갈까 말까 망설였던 라멘 가게에서 다시 이어질 수 있을까.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반가움은 둘째치고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까 싶었다. 부모님과 일본을 여행 중이라는 그녀는 라오스 여행 이듬해에 결혼했고,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은 숙소에서 쉬고 있다고 말했다. 이른 저녁을 먹은 탓에 출출해하는 부모님을 모시고 근처 라멘 가게를 찾았다고 했다.


만약 우리 부부가 다른 식당으로 갔다면, 만약 근처 덮밥 가게가 문을 열고 있었다면, 만약 하지원 씨 부모님이 출출해하지 않았다면, 만약 우리 여행 일정에 벳부가 없었다면, 아니 우리 부부가 도착한 시간이 늦은 시간이 아니었다면……. 끝없는 “만약”이 꼬리를 물었지만 결국 우연한 만남에 “만약”은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때의 만남이 필연이라 해도 그 필연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알 수 없었다. 필연이라면 언젠가 또 만나게 되겠지. 우연이라면 또 다른 우연을 기대할 수 있겠지. 무척 반가웠다. 하지만 서로에게 다른 일정이 있었기에 그 자리에서 사진만 남기고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신기하다는 단어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헤어지기 전 “하지원” 씨와 악수를 하며 이렇게 약속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만약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곳은 남미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또다시 연락이 끊어진 경남 창원에 살고 있는 또 다른 “하지원” 씨는 잘 계시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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