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수필 #24
간밤에 잠을 설쳤다. 모기의 주둥이가 돌아간다는 처서가 지난지도 한 달이 넘었는데, 모기는 아직도 주둥이를 꽂으려고 날아다닌다. 모기는 낮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 슬며시 잠이 들려고 하면 힘찬 날갯짓을 하며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다. 앵앵거리는 날카로운 소리에 벌떡 일어나 스위치를 켜고 그 녀석을 찾는다.
나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 승리감에 취해 잠을 청하려 다시 누웠다.
‘모기가 어떻게 들어왔을까?’
모기의 등장으로 시작한 생각은 ‘모기와 같은 공간을 공유할 수 없을까?’라는 생각으로 확장되었다. 같은 공간에서 모기는 모기대로, 나는 나대로 지낼 수는 없었던 것일까? 생각은 계속 확장되어 담벼락 아래에 있는 작은 화단에까지 미쳤다.
화단에는 벌과 나비가 눈에 잘 띄는 모습으로 날갯짓을 하고 있고, 비가 오는 날에는 숨을 쉬기 위해 지렁이가 기어 나와 꿈틀거린다. 썩어가는 나뭇잎 위에 아주 작은 벌레들이 날거나 기어 다니고, 그 사이로 날카로운 눈을 밝히며 길고양이가 도도한 걸음을 걷는다. 잠시 후 고양이 눈을 피해 배수구에서 고개를 빼꼼 내미는 생쥐도 그곳에 함께 있다. 머리 위에는 날아가던 찌르레기가 잠시 날개를 쉬어가고 그 아래 나무 덤불에는 참새와 박새들이 떼를 이루어 숨어있다.
아주 작은 화단이지만 많은 생명들이 작은 공간에서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왜 작은 모기와도 공간을 공유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 인간은 왜 자신의 공간을 찾아온 작은 생명을 반드시 제거해야 편안함을 느끼는 걸까?
[씨스피라시]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다. 일본의 어느 작은 어촌에서 돌고래를 연안으로 유인해 잔학하게 죽이는 장면이 있었다. 그에 대한 해설은 이러했다.
“돌고래를 먹거나 팔기 위해서 죽이는 게 아니에요. 돌고래가 먹고사는 물고기, 즉 돌고래가 줄어들면 인간이 잡을 수 있는 물고기가 늘어나니 돌고래를 죽이는 겁니다.”
소름이 끼쳤다. 인간은 돌고래를 경쟁상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돌고래를 죽이면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검붉은 피와 돌고래의 비명이 퍼져나가는 곳에 남은 것은 인간의 경제 논리뿐이었다. 인간은 돌고래와 공존을 포기한 것일까. 만약 돌고래가 모두 사라진다 해도 인간의 경제적 이익은 그대로 유지될까?
수염고래 같은 대형 고래는 바다 깊은 곳에 살다가 먹이활동을 위해 수면 가까이 올라온다. 그때 엄청난 수의 식물성 플랑크톤을 끌고 올라오는데, 이 플랑크톤이 수면에서 호흡을 하며 만들어내는 산소는 아마존에서 내뿜는 산소보다 30배나 더 많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마존의 산림만 보호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혹 태평양 한가운데에 플라스틱 쓰레기로 이루어진 섬이 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있을지 모르겠다. 한반도 면적의 약 15배, 플라스틱만으로 이루어진 섬이 있다. 가끔 언론에서 이 섬에 대한 뉴스를 전하며 플라스틱 사용을 줄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섬의 46퍼센트가 버려진 어망이라고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일회용 플라스틱 빨대는 그 쓰레기 섬의 0.03퍼센트뿐, 빨대 사용만 줄이면 쓰레기 섬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한쪽에서는 그 어망의 폐해를 막기 위해 상업적 어업을 줄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상업적 어업의 대표 어종인 고등어나 참치 잡이 그물에 딸려 올라오는 밍크고래 소식을 듣는다. 그 소식의 말미에는 제법 비싼 가격에 팔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함께 전한다. 그것을 ‘부수 어획’이라고 하는데, 그 때문에 많은 생명들이 함께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바다거북, 상어 그리고 돌고래도 부수 어획의 피해를 입고 있는데, 특히 바다거북은 여섯 종 중 다섯 종이 심각한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고 한다.
글을 써 놓고 보니 문제만 늘어놓았지 제대로 된 해결방법을 제시하지 못한 것 같아 다른 생명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커진다.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자’ 거나 ‘자연을 보호하자’ 같은 막연한 이야기만 늘어놓은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인류를 덮치고 있는 바이러스 역시 박쥐의 공간을 인간이 침범한 때문이라고 한다. 박쥐에게 기생하고 있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숨어들었고 변이가 되었다는 것이 지금까지 밝혀진 팬데믹의 이유이다. 요즘 언론에서는 ‘위드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공존을 이야기하고 있다. 바이러스와는 공존을 하고 박쥐와는 공존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 다른 생명들과의 공존은?
인간이 경제 논리를 앞세우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결국 인간은 인간끼리의 공존도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무척 우려스럽다. 올바른 선택을 하기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니,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이미 지나버린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