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수필 #23
이 이야기는 열네 살 시절, 중학교 2학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공부를 잘하거나, 운동을 잘하거나, 혹은 싸움을 잘하는 아이도 아니었다. 평범한, 아주 평범한, 그래서 더 평범한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다. 그나마 다른 아이들과 차이가 있다면 조금은 더 선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다른 것이라면 그것뿐이었다. 한 학급에 60명이 넘는 아이들 사이에서 눈에 띄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무척 내성적이고 조용했다.
내가 다닌 남자 중학교는 생존만을 목표로 가진 야수가 모여있는 세상이었다. 사바나의 어느 초원에서 처럼 영역을 놓고 벌어지는 전쟁 같은 싸움과 주먹질이 매일 있었다. 그 모습을 구경하려 모인 아이들 사이에서 서로 밀치다가 또 다른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아주 평범한 일이었다. 교문에서는 아이들의 머리카락이 조금만 기준을 벗어나도 그 자리에서 머리카락을 잘라버리는 일도 일상이었고, ‘선도’라고 쓰여있는 노란색 완장을 찬 선배들은 급작스레 교실에 들어와 소지품을 검사했고 고급져 보이는 필기도구 따위를 ‘공식적’으로 수거해가는 것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 속에서 나만의 생존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방법을 찾지 못한 채 2학년 2학기를 맞이했고, 그 후로도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선생님, 저 학생증을 분실했어요. 학생증 만들러 왔는데요.”
“이 녀석이, 너희 담임한테 가야지 왜 나한테 와서 그러냐?”
“…………, 선…… 선생님이 저희 담임인데요?”
담임은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한 학기가 지났고 두 번째 학기가 시작된 지 여러 날이 지났는데 담임은 나를 모르고 있었다. 적잖은 충격이었다. 학생증을 새로 만들어 학생임을 증명하는 것보다 내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일이 더 시급해졌다. 나는 분명 존재하지만 내 존재를 모르는 것은, 죽어있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담임을 시작으로 내가 세상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나를 올려보던 담임의 눈빛, 그 목소리, 그리고 당신이 나의 담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흔들리던 눈동자는 내 머릿속 어딘가에 확실히 저장되어있다.
나의 존재는 그때부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워지는 것이 두려웠고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무서워서 나를 붙들기 시작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수업시간에 끊임없이 농담을 했고 체육시간에는 더 열심히 달렸다. 다른 친구들이 내 가벼운 농담에 웃기 시작했고, 체육대회의 학급 대표선수로 뽑히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나를 응원하는 친구들의 목소리에 한껏 긴장하기도 했고 출발선에 서서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도 즐기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아마추어 밴드를 만들어 공연도 했다. 무대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듣는 내 심장소리가 더없이 좋았다. 심장의 힘찬 펌프질 소리는 내가 살아있는 존재, 그리고 ‘존재하는 그대로의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즈음부터 나는 늘 ‘적극적’이라는 다른 이름의 페르소나를 가지게 된 것 같다. 그 ‘적극적’은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존재를 잃어버릴 뻔한, 스스로 존재를 지워버리는 실수를 할 뻔했던 열네 살의 사춘기 소년이 ‘적극적’이라는 페르소나를 만나는 극적인 경험을 했다. 바로 그 소년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고, 그리고 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