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수필 #25
학창 시절 친구들과 도시락을 먹은 후에는 언제나 제일 늦게 도시락을 정리했다. 군대에서조차 최고참이 되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들과 식사 속도를 맞추기 위해 억지로 밥을 퍼 넣어야 했다. 나와 맞지 않는 식사속도는 결국 심각한 식도염과 위궤양을 가져다주었고, 위궤양은 십이지장 궤양으로 번져 몇 달간 약을 먹기도 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시작한 사회생활에서는 누구보다 빠르게 행동했고 나에게 주어진 일을 빠르게 처리했다. 누구보다 먼저 나섰고 그 결과도 제법 좋다보니 밖으로 드러나는 내 모습은 빠르고 정확한 사람, 일 잘하는 사람이었다. 세상은 나에게 ‘빨리빨리’를 요구했고 살아남기 위해 ‘빨리빨리’를 내 몸에 욱여넣었다. 그렇게 인정을 받았고, 그것이 그때까지 모르고 있던 진짜 나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옳고 바른 것이라고 믿으며 살았다. 그것이 사회에서 나에게 요구하는 정말로 필요한 능력이었으니까.
부작용, 혹은 반작용이었을까? 결국 나에게 맞지 않는 ‘빨리빨리’는 몸과 마음, 정신까지 지치게 만들었다. 나는 주변 사람들을 비판하는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조금만 느려도 비판을 했고, 내 기준만이 옳다고 믿었으며 나의 잣대를 타인에게 들이댔다. 시쳇말로 까칠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나 불혹을 넘어서야 나는 빠르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변해있는 내 모습을 거부하고 싶었다. 심지어 나를 지워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내면의 나와 보여지는 나는 늘 충돌하고 있었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은 의도적으로 피했다. 진짜 내 모습을 마주하기가 겁이 났던 것이다.
느리다는 것은 게으름과 같지 않고, 빠른 것은 부지런함이 아니라는 것이 상식인 사회에서 살고 싶은 게 지나친 욕심일까. 나의 내면과 마주할수록 낯설게 느껴지는 건 여전히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확증일 것이다. 느긋해야겠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내 몸에 스며있는 ‘빨리빨리‘를 완전히 씻어내기는 어렵기만 하다. 어쩌면 평생토록 불가능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위해 지나는 시간을 천천히 지켜본다. 그 시간과 함께 호흡하며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