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수필 #26
벌써 9월. 곧 대하의 제철이다. 구워도 먹고 삶아서도 먹고 무엇보다 소금을 깔고 그 위에 팔딱거리는 새우를 올려 구워 먹는 소금구이는 새우의 담백한 맛과 천일염의 짭조름함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이 아닐까 싶다. 손가락을 쪽쪽 빨아가며 먹는 대하의 맛은 가을에는 꼭 한 번 맛봐야 하는 음식이다. 나는 새우를 참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새우가 의왕에도 있다. 새우대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행정명은 초평동이다. 새우대는 우리말이고 초평은 풀이 있는 들판을 뜻하는 한자다. 두 개가 같은 뜻이다. 풀은 억새나 새로 부르고 그 뒤에 장소를 뜻하는 ‘곳’을 붙여 불렀다. “새곳대”. 풀이 많은 곳이라는 말이 점차 변하여 “새옷대”에서 “새우대”로 변했다는 말이 정설이다. 지금의 행정명인 초평보다는 새우대라는 말이 먼저 생기고 불렸던 말이다.
왕송호수의 왼편, 구봉산의 오른편에 자리 잡은 곳이 바로 새우대다.
“새우는 수염이랑 다리를 합쳐 모두 열두 개야. 그러니 누가 봐도 새우 모양이지.”
한 어르신이 나에게 전한 말이다. 실제로 새우를 닮아있어 그리 불렀다고도 한다. 구봉산 자락이 새우의 등이고 그곳에서 갈라져 나온 열두 개의 골짜기가 새우의 수염과 다리처럼 보인다고 한다. 골짜기마다 마을이 있다. 지금도 한 골짜기에는 하동 정 씨 스물다섯 가구가 살고 있다.
그 어르신은 조선의 문신이자 정치가였던 정현조의 후손이다. 정현조는 조선의 7대 임금인 세조의 딸, 의숙공주와 혼인을 했다. 의숙공주는 구봉산 자락에 묻혀있고, 그 정현조의 후손이 지금도 새우대에서 씨족을 이루어 거주하고 있다. 매년 때가 되면 의숙공주와 정현조의 합장한 무덤에 제를 올리고 있다.
“이제 여기가 사라진다네. 공주님과 현조 할아버지의 제사는 누가 지내누…….”
갑작스러운 정부의 발표를 듣고 깜짝 놀랐다. 구봉산 너머에 있는 군포와 아래쪽의 안산을 아우르는 커다란 신도시가 생긴다는 뉴스를 접했다. 평촌과 맞먹는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신도시가 들어선다면서 엄청난 사업이 될 거라는 소식이었다. 수십만 평이라는데 너무 큰 숫자라 내 머리로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혹, 의숙공주와 정현조의 무덤도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의숙공주는 37세에 죽고 나서 서울 은평구의 어느 곳에 묻혔다. 일제강점기에 그 토지를 수탈한 일본인 지주가 자신의 땅에서 무덤을 파내라고 했고 정 씨 후손 몇몇이 의숙공주와 정현조의 유해를 이장했다. 처음엔 지금과 같은 합장이 아니었다. 의숙공주는 왕손이고 정현조는 공주 사후에 후사를 위해 새장가를 들었다. 부마가 첩을 들였기에 정현조는 왕실에서 쫓겨났지만 그의 후손들은 후사가 없던 공주의 제사를 지금까지 지내오고 있다.
의숙공주와 정현조의 무덤이 처음엔 제법 화려했던 모양이다. 많은 조형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제대로 된 예도 갖추지 못하고 새벽녘에 도망치듯 이장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소달구지에 공주와 정현조의 비석을 싣고 내려왔고 유해는 삼베보자기에 싸서 야간열차를 타고 부곡역(현 의왕역)까지 왔다고 한다. 다행히 부곡역 근처에 정 씨의 땅이 조금 남아있어 그곳에 의숙공주와 정현조를 합장할 수 있었다. 합장을 하면 비석을 하나로 만드는 게 예이긴 하지만 비석을 만들 돈이 없어 그때의 비석 그대로 두 개를 세워놓았다. 이것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의숙공주 무덤의 이야기다.
토지가 수용되고 땅을 파헤치기 시작하면 어디가 남게 되고 어디가 사라질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 땅을 그대로 남겨두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 지어질 아파트가 필요한 사람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땅에, 그리고 초평동이라 부르는 이곳의 본래 이름은 새우대였다는 흔적은 남겨놓아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조금만 더 욕심을 낸다면 땅이 우리에게 전하는, 그 땅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도 남겨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이 땅에게,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이 땅에게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