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 고생하는 사서를 아십니까?

PART I_장소_11. 싱가포르 한국국제학교 도서관

제주도 어린이도서관에서 근무를 하면서 2019년 하반기 동료 사서가 퇴사 한 이후로 나는 줄곧 또 다른 직장으로 이직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고 여기저기 입사 지원서를 넣고 서류전형 결과를 노심초사하며 기다림으로 2019년 12월을 보내고 있었다. 12월 초쯤에 평소 알고 지내던 친한 동생이 카카오톡 메시지로 입사 지원해보라며 링크 하나를 보내줬다. 그곳은 싱가포르에 주재하고 있는 한국국제학교 도서관이었다.

사실 이 학교는 내가 제주도에 오기 전 2018년 10월에 채용공고가 있어서 당시에도 1차 서류전형을 합격하고, 2차 면접에서 떨어졌던 곳이어서 채용공고를 보고 다시 지원할 마음이 솔직히 들지 않았다. 면접에서 떨어졌기에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다시 서울로 올라가서 구직 활동을 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운명처럼 지원서 접수 마감일에 나는 싱가포르에 있는 한국국제학교 도서관 사서직에 재도전하게 된다.


2014년 KOICA(코이카) 해외봉사단원으로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2년간 활동했던 소중한 기억도 있었고 그 후로 해외에서 사서로 근무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도전해보고 싶었다. 나의 간절함을 하나님이 알아주셨는지 1차 서류전형에 합격하게 되었다. 2차 면접은 화상면접으로 2019년 12월 19일 오후 5시40분에 Skype로 이루어졌다. 그 날은 마침 내 마흔하고도 한 번째 생일이기도 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생일 선물 같았다.


2018년도 면접 당시에는 영어로 간략한 답변을 준비했었는데 막상 영어는 하나도 물어보지 않았었고,학교 교장선생님, 행정팀장님, 사무국장님, 교감선생님 총 4분이 면접위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번에는 총 3명의 면접위원으로 모두 남자분이셨고, 교장선생님, 사무국장님 그리고 행정팀장님과 대략 삼사십분간 면접을 봤다. 면접 질문은 학교도서관의 역할, 사서의 역할, 독서문화 확산을 위해 사서가 할 수 있는 방안 등 다양한 질문은 받았다. 그리고 나의 예상을 깨고 이번에는 영어로 답변하는 질문도 있었다.


그 질문은 다름 아닌 나의 장, 단점을 영어로 답변하는 것이었다. 나는 솔직히 영어로 면접 준비를 하지 않아서 의식의 흐름대로 본능에 너무 충실하게 대답했다. 장점은 Big Smile(미소)라고 했고, 단점은 Health(건강) 이라고 했다. 장점은 그럭저럭 넘어갔지만 면접에서 자신의 단점을 건강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어떤 회사에서 그 사람을 채용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답변하면서도 아차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면접 당시 나는 실제로 오십견 진단을 정형외과에서 받은 상태였고, 제주도에서 강도 높은 업무환경으로 오른쪽 팔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단점을 말하면서 어디까지나 오른쪽 팔이 아픈 것은 직업병이라고 콕 찝어서 말했다.


사서로 10년간 일하면서 내 손을 거쳐간 책들은 어림잡아 5만권은 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면접을 마치고 나는 분명히 떨어지겠구나 싶었다. 너무 솔직한 것도 면접에서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물은 쏟아졌고,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하셔서 담담하게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2018년 10월에 사서직 채용에 지원해서 면접에서 떨어졌었고, 이번이 두 번째 도전이라고 그리고 해외에서 꼭 사서로 일해보고 싶다고 무엇보다 국제학교이니 다양한 국적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위해 한글학교도 운영하는 곳이라 더 매력적인 근무 환경이여서 재도전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면접을 끝내고 하루를 노심초사하며 보냈다.합격자 발표를 한다고 했던 2019년 12월 21일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내심 기대는 했었기에 그 날도 도서관에서 오후 8시까지 근무하는 날이라 근무중이였는데 저녁 5시 55분에 운명처럼 전화벨이 울렸다. 그리고 최종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그냥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나지막하게 기도를 드렸다.


싱가포르 한국국제학교 도서관 사서로 채용이 되어 열 번째 도서관에 입사를 하게 된다. 학교 측에서 싱가포르에서 거주하는 집을 직접 제공해주지는 않았고 일정 금액의 주거 지원비를 매달 지원해주고 내가 직접 집을 구해야했다. 그래서 나는 2020년 2월 19일 싱가포르에 입국해서 12일간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서 내 보금자리를 찾게 된다. 그 동안 캐나다, 튀니지에서 거주할 때 해외에서 집을 직접 구해본 경험 있어서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미션을 잘 수행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한국에서 사실 출국할 때만 해도 싱가포르가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더 많아서 하루 확진자 수가 80명이 넘는 상황이여서 오히려 싱가포르로 간다고 하니 주변 지인들은 나를걱정하며 마스크도 챙겨주고, 몸 조심하라며 신신당부를 했었다.


그런데 내가 입국하고 2월 20일을 기점으로 갑자기코로나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에서 특히 대구에서 확산되면서 천명을 넘어 몇천명의 확진자가 나오면서 이 뉴스는 싱가포르에서도 실시간으로 외신으로 전해져서 싱가포르 집주인들도 중국인과 한국인에게 집을 임차해주고자 하지 않았다.


싱가포르 법으로 취업비자로 그 곳에서 거주하려면 입국해서 14일 이내에 거주지가 결정되어야 취업비자 카드가 정식으로 발급이 가능하다. 그래서 학교 측에서는 집을 구했냐고 확인전화가 매일 오고 나는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업친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나두 한국에서 입국했기에 자가격리하라는 학교측의 권고로 심지어 2월 24일부터는 자가격리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절박해지니 새벽기도와 아침 금식기도를 하게 되었다.


마침 사순절 기간이기도 해서 나는 2월 24일부터 새벽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집을 얼른 찾게 해달라고, 그 절박한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닿았는지 입국해서 12일차 되던 3월 1일 역사적인 날 나는 싱가포르에서 나의 보금자리를 찾게 된다.


싱가포르는 전세 개념이 없고 월세로 1년 계약을 하게 된다. 월세가 자그마치 한화로 170만원이나 하는콘도의 스튜디오룸을 얻게 되었다. 매물도 딱히 없었고 한국인을 임차인으로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상황이었기에 울며 겨자먹기로 나는 집을 계약하고 3월 4일부터 본격적으로 싱가포르한국국제학교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게 되었다.


싱가포르한국국제학교는 1993년에 개교해서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과정까지 운영되는 학교로서 전교생이 거의 한국인들로 주재원이나 한국교육과정을 원하는 학생들이 주로 다니는 학교였다. 그리고 한국에서 현직교사들이 휴직계를 내고 이 학교에 지원을 해서 학교장과 교원, 행정직 거의가 한국에서 채용되어 온 교육직공무원들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교육부 소속으로 매년 일정한 금액의 예산을 지원받아운영되는 곳이었다. 솔직히 이름만 국제학교였지 실상은 그냥 한국학교였다. 영어와 중국어를 가르치는원어민 교사들이 존재한다는 차이 말고는 일반 한국학교였다. 심지어 도서관은 1990년대 학교도서관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출근 하자마자 나는 매우 놀랐다.


대학교 학부 때 배웠던 도서관 전산자동화프로그램인 ‘책꽃이’라는 프로그램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었고, 소장도서는 총 3만여 권이 넘었지만 모두 바코드 스캐너를 사용해서 대출반납을 하고 있었다. 소장도서 중에는 거의 대부분이 오래된 책들과 기증받아 출판년도가 10년이 넘는 책들이 너무 많았다. 나의 주요업무는 한국어능력시험(TOPIK) 시험 관련 전반적인 행정업무와 도서관 운영, 교과서 구입업무 등이었다.


한국어능력시험(TOPIK)은 싱가포르대사관에서 주최하고 있는 사업인데 시험장소를 학교가 제공하면서 이 업무도 사서가 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어능력시험 홍보부터 시험 접수, 시험 시행, 고사장 제공,시험접수 결과보고까지 짜잘한 서류 업무들이 많은 일이었다. 3월 입사하자마자 당장 4월에 예정되어있는 제69회 한국어능력시험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시험일이 5월 24일로 연기되고 이와 관련하여 제반되는 행정업무들을 처리해야했다.


입사하고 10일차 만에 내가 느꼈던 점은 한국국제학교 도서관의 사서로 일했던 직원들이 문헌정보학을 전공하고 실무 경력이 있었던 사서가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다섯 번째 임용된 사서라는데 여태껏 도서관 운영일지라는 것도 없고 업무의 절차도 체계도 없이 운영되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사서이기 이전에 학교 사무국 직원으로 소속되어 있기에 사서본연의 업무보다 학교 행정 업무(교과서, 한국어능력시험, 한국어교육 등) 에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근무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2주간 도서관을 자주 방문하는 이용자를 살펴보니 거의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이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책을 보러 오거나 대출하러 왔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생 이용자를 대상으로 독서 문화프로그램과 이용자 교육을 진행하기 위해 도서관 운영계획안을 수립하고 매월 도서관의 행사와 도서관을 홍보할 수 있는 도서관 소식지를 발간하여 배포하였다.


그리고 학부모들로 도서관 자원봉사자가 구성되어 운영되었다는데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학부모들이 학교에 방문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는 실정이어서 나는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일단 학부모에게 도움을 받아 도서관을 운영하는 것이 나는 거부감이 들었다. 다행히도 학교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과정까지 운영되고 있어서 중학생과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도서반을 만들어 독서동아리로 운영하고 싶었다. 그래서 운영계획안을 만들고 교감선생님과 교장선생님도 좋은 의견이라며 적극 지원해주셔서 홍보 포스터를 만들고 싱가포르한국국제학교 도서부 1기 도서부원을 모집하게 된다. 총 12명의 학생을 모집하기로 했는데 신청일 시작 전에 남학생 3명이 자진해서 지원한다고 도서관으로 찾아왔었는데 너무 고마웠다.


2020년 한 해 동안 이 도서부 아이들과 어떤 일들을 함께 할 수 있을지 기대도 되고 1기 도서부를 잘 운영하고 싶었다. 입사 한 달 차가 지나고, 도서관 소식지도 없던 터라 야심차게 도서관 소식지도 매달 발행해서 교장선생님이 추천하는 책도 소개하고, 주제가 있는 북 큐레이션과 월별 다독자, 도서관 소식 등을 담아서 3월호를 발행해 초등학생들에게 배포했다.


한국에서는 이미 2020년 2월부터 COVID-19(코로나)로 확진자가 만명이 넘어섰을 때 싱가포르는 뒤늦게 2020년 4월 초부터 확진자가 매일 증가하기 시작했다. 정부에서는 Circuit Breaker 라는 정책으로 4월 8일부터 5월 4일까지 재택근무와 온라인 수업을 하라는 조치가 내려졌다. 갑자기 학교에 출근을 못하게 되니 처음에는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날씨도 너무 덥고 마스크까지 쓰고 움직이니 힘들었기때문이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다행히도 인터넷 기술 덕분에 학교 pc를 원격으로 연결해서 사용할 수 있었고, 전자결재 시스템 덕분에 집에서도 기안을 작성하고 결재를 상신하는데 문제는 없었다. 다만 학생들을 만나지 못하고, 아이들을 대면해서 하는 서비스직인 사서이기에 무언가 내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5월 4일까지라던 Circuit Breaker 정책은 6월 1일까지 연장되었다. 확진자가하루에 몇 백명씩 나오고 있어서 1학기는 재택근무라는 걸로 난생 처음 도서관을 벗어나 근무하는 경험을 해보았다.


4월 23일은 ‘세계 책의 날’이기도 하고, 당일 도서를 대출하는 학생에게 나눠주려고 특별히 책갈피도 주문 제작했는데 그 행사도 결국은 온라인 이벤트로 변경해서 진행하게 되었다. ‘책의 날’로 삼행지 짓기와 ‘나만의 책 속 한문장’을 도서관 홈페이지 게시판을 활용해서 이벤트를 진행했다. 많은 학생이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소소하게 ‘책의 날’을 홍보한 것으로 만족하며 6월 1일까지는 재택근무를 하며 집콕생활에 적응해보려고 했다. 역시나 인생은 내 맘대로 되어지지 않는다. 싱가포르에서의 삶도 그랬던 것 같다.


마음을 터놓고 지낼 친구도 사람도 없었기에 연고도없는 타국에서 외로움은 커져갔고, 업친데 덮친격으로 2020년 8월 갑자기 멀쩡히 사용하던 도서관 건물을 내어주고 2년간 새로운 도서관 건물을 신축하는 동안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중고등학교 교무실 옆쪽 방치된 교실에서 임시로 대출 반납업무만 하라는 청천벽력같은 통보를 받게 된다.

내가 생각하고 꿈꾸던 외국에서의 삶 그리고 국제학교에서의 글로벌한 사서로서의 삶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6개월의 시간을 되돌아보면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제한적이었고, 코로나라는 특수 상황때문에 사람을 사귀기에도 취미생활을 갖기에도 변수가 많은 상황이었다. 이런 곳에서 앞으로 남은 시간들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그리고는그 날 이후로 잠이 오지 않았다.


수면장애도 심해지고, 우울증과 무기력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결국 나는 9월 중순 한국의 추석명절을 코 앞에 두고 한국으로 잠정 귀국하게 된다. 그렇게 또 자발적 퇴사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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