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 아프리카 트럭킹 투어 - Day 14 (보츠와나)
델타로 갈 준비를
보츠나와에서의 첫 아침은 상쾌하게 시작됐다. 원주민 부족 마을로 걷는 선택적 액티비티가 있었는데, 나는 하지 않았고, 따라서 충분한 여유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캠핑 사이트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어쩐지 조금 각별하다. 우선은 춥다. 첫 날 만큼의 입 돌아갈 추위는 다행히 아직 없었지만, 그래도 춥기는 엄청 춥다.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새벽에는 조금 춥기 마련이다. 그런데 여기는 심지어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점이니. 사용하고 있는 침낭은, 정확히 12년이 된 친구다. 퇴역 직전에 이 아이도 무리하고 있다. 기념이 될까 하여 순례길 동안부터 계속 쓰고 있는 신발과 침낭을 집으로 가져갈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어차피 짐이 될 것 같아 여행이 끝나는 대로 버릴 계획이다. 느즈막한 아침을 먹으며, 모닥불 앞에서 커피를 함께 마셨다. 몸을 녹일 수 있는 방법이야 21세기 현대 세상에는 아주 많지만, 여기 아프리카에서 만큼은 고작 이 모닥불이 전부다. 그래서 더 운치 있는 지도 모르겠고. 보츠나와라고 지난 나미비아와 크게 다른 점은 아직껏 없긴 하다. 캠핑 사이트는 캠핑 사이트고, 텐트는 여전히 텐트다. 그래서 지난 열흘 가까이 있었던 나미비아를 떠나왔다는 게 별로 실감나지는 않는다. 여권에 찍힌 보츠나와 도장이 아니었다면 정말 믿기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유럽에서는 숱한 나라들을 돌아다녀도 도장이 찍힐 일이 드물었는데, 아프리카는 국경 마다 도장을 하나씩 받을 수 있어 기분이 좋다.
오늘의 일정은 별 게 없다. 물론 텐트 생활과, 트럭에서의 장거리 이동 만으로도 몸이 많이 피로해지는 건 사실이나, 실제적으로 이게 전부였다. 내일부터는 익숙한 트럭을 벗어나 이틀 동안 ‘오카방코 델타’를 방문하게 된다. 대단한 규모의 삼각주 지형이라고 한다. 오늘은 주로 그것을 준비하는 날이었다. 물을 사고, 또 거기로 가져 갈 작은 짐을 꾸리고. 트럭이 들어가기에는 너무 비좁아 4x4라는 특수 차량을 타야 들어갈 수 있다. 델타라는 단어가, 한국어로는 삼가주라고 한다. 삼각주, 중학교 시절 과학을 배울 때 들어 본 이름이기는 한데. 아마 퇴적 작용, 뭐 이런 걸 배웠을 때인 것 같다. 살면서 꽤나 많은 선택들을 내렸지만, 이과를 택하지 않았던 것이야 말로 내 인생의 선택이다. 정말로. 아무튼 트럭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이동해야 하기에, 오후 대부분의 시간은 짐을 꾸리며 보냈다. 쇼핑몰에서 내일을 준비하기도 했다. 환전을 하고, 간단한 물과 간식거리를 산 다음, 옆의 카페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 와이파이가 돼서 오랜만에 문명 세계외 접촉을 했다. 이런저런 야구 기사들을 살펴봤다. 응원하는 팀이 약팀이라면, 지금처럼 간헐적으로 야구 기사를 보는 게 차라리 괜찮은 것도 같다. 여기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했는데, 아주 엣날에 마셨던 맥도날드 천 원짜리 커피보다 더 맛이 없어서 무척 놀랐다. 아니 세상에, 이런 맛 없는 커피가 세상에 가능하다니. 사실 아프리카로 올 때는 커피에 대한 기대치도 있었다. 스타벅스에 가면 프리미엄이라고 하여 나이로비니 뭐니 하는 커피들이 있지 않나. 프리미엄은 개뿔. 아침에는 네스카페, 그리고 가끔씩 마시는 이런 싸구려 커피가 다다. 그래도 아침의 커피는, 캠핑의 분위기 덕분이지 몰라도 참 맛있기라도 하는데 말이다.
와이파이가 없어도 죽진 않는다는 걸 처음 안 건 군대에서였다. 하지만 그땐, 동시에 죽을 것 같이 힘들기도 했다. 연락할 사람이 너무 많았다, 는 아니고, 당시 교제하고 있던 여자친구의 안부가 정말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밥은 잘 먹고 있는지, 나를 잊은 건 아닌지, 뭐 이런 사소한 것들. 아프리카에서는 와이파이에 대한 갈증이 그리 크지 않다. 이래서 사람이 연애를 하지 않아야, 어딘가에 덜 구속받는다, 는 자기변명이겠고. 캠핑 사이트들에서 와이파이 바우처를 판매하기도 하지만, 공짜가 아니라면 굳이 구매하지 않는다. 있으면 좋다. 와이파이가 있다면 당연히 좋고 말고. 와이파이가 없기 때문에 아프리카를 더 잘 즐길 수 있는 것도 딱히 아니다. 그러나 그냥 정보를 업데이트할 필요도, 당위도 없는, 이 순간과 장소를 충분히 음미하는 중이다. 어쨌든 불필요하게,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일은 확실히 줄었다. 아프리카에 별이 많다는 건 정말 큰 축복이다. 안타까운 건, 나미비아의 사막 지대를 지나오며, 이제는 별이 조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신 달이 점점 차오르고 있다. 아직 질리지 않았는데. 질리려면 무척이나 멀었는데. 나의 아프리카는 아직 한참이나 남았지만, 일행들 대부분은 빅토리아 폭포까지만 향한다. 그래서 그런가, 벌써부터 여행 이후의 이야기들이 나오는 중이다. 숙소에서 어떻게 공항을 가고, 뭐 그런 것들. 빅토리아 폭포 이후에도 나는 무려 20일을 더 해야 하지만, 작년 12월에 떠난 이 전체 여행 기간으로 보면 10%에 해당하는 기간이고, 그러니 조금은 나의 여행도 같이 끝나가는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하다.
와이파이가 없어도 괜찮아, 라고 쿨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너무 겸연쩍게도, 숙소의 바에서 와이파이를 할 수 있어 정말 행복한 저녁을 보냈다. 마침, 오늘 응원하는 야구팀이 경기를 이겼단다. 울랄랄라.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경기 하이라이트를 시청했다. 한국이었다면 이런 날 스포츠채널을 모두 돌려가며 경기 하이라이트를 보았겠지. 요즘들어, 한국이었다면, 이란 생각이 자꾸 나는 걸 보니, 확실히 귀국이 다가오긴 한 모양이라고, 실감 중이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많이 지치기도 했다. 이동하지 않고 가만히 일주일 정도만 머물고 싶다. 아주 게으르게 뒹굴거리면서. 그렇게 뒹굴거린지 일주일 만에, 다시 이 여행을 그리워하게 될 것 같기도 하지만.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악동뮤지션의 ‘오랜 날 오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