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 아프리카 트럭킹 투어, Day 17 (나미비아 입국)
빈곤 안의 풍요가 가능할 수도
보츠와나에서 이틀간의 오카방코 델타를 마치고, 오늘 다시 나미비아로 돌아왔다. 지난 이 주도 나름대로 정이 들기에는 충분했던 기간이라고, 이틀 안 본 가이드와 쉐프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오카방코 델타에서 이틀동안 고생했으니, 오늘은 캠핑 사이트에 일찍 도착하여 휴식을 취한다고 한다. 거기서는 텐트도 다 쳐주고, 굉장히 편하기만 했던 걸. 뭐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이런 휴식날까지 주니 다소 민망하기도 했다. 뭐, 지들이 귀찮아서 이러는 걸 수도 있겠고. 이 캠핑 여행이 때때로 무척 힘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일정을 더 밀어붙여도 괜찮은데, 싶기도 하다. 물론 장기 여행이니까, 휴식을 취하는 게 낫다는 이들의 판단이 맞겠지. 캠핑 사이트에서 종일 휴식을 취하는 이 일정도 나쁘지는 않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는, 굉장히 좋다. 캠프 사이트 바로 뒤에는 강이 흐르고 있고, 그 강을 바라보며 몇 잔의 맥주를 계속 마시는 중이다. 아주 예전에, 가족끼리 캠핑 여행으로 유럽을 다녀온 적 있었다. 나는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 때도 강변에서 캠핑을 했다. 그 날의 기억이 조금 나기도 한다. 참 좋다. 또 여유롭고. 모든 걸 해야만, 혹은 해내야만 하는 게 일상인 삶을 살다가, 텐트를 치고 나서는 아무 것도 할 게 없는 이 순간의 여유가 그저 사랑스러울 지경이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서, 무슨 이유 때문이든 인생이 조금 팍팍하게 느껴지거나 그럴 때, 아마 이 날들의 캠핑이 많이 떠오를 것 같다. 특히 가끔의 아침마다 느즈막히 마신 커피 향이. 평범한 네스카페에 뜨거운 물을 받는 게 전부지만, 추운 몸을 달래며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게 했던 원동력이 되어 준 그 만 한 커피가 또 어디 있을까.
오늘 나미비아에 재입국하며, 남아공에서 발급 받았던 나미비아 복수 비자는 자연스레 효력을 다 했다. 보츠와나를 나오고 나미비아로 입국할 때, 순서대로 도장이 새로 두 개 찍혔다. 언젠가, 아주 많은 액수가 찍힌 통장보다, 아주 많은 도장이 찍힌 여권이 더 매력적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었다. 사실 이건 뚜렷하게 대비되거나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돈이 많아야, 여권에도 도장이 많이 찍힐 수 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것인지는 알겠다. 돈이 무한정 많다면, 나 역시도 여권 페이지가 모자를 정도로 여기저기에 도장을 찍고 다닐 테니. 별로 사치스러운 여행을 좋아하지는 않아, 무한정까지의 돈도 필요 없을 테다. 영화 <아가씨>의 대사처럼, 가격표를 안 보고도 와인을 고를 수 있는 수준이면 될까. 늘어나는 도장 갯수가 참 뿌듯하다. 여행을 다니며, 물론 다른 것들도 잃어버려서는 안 되겠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조심하는 것들이 있다. 여권과 지갑, 핸드폰과 노트북은 우선 당연하다. 허자먼 한국으로 짐을 1차적으로 보내기 전까지는, 외장 하드가 그들보다 더 소중한 존재였기도 했다. 내 여행의 기억과 흔적은 어디서 재발급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 여권의 유효 기간은 내년 까지다. 1년이 지나면 쓸모가 없어질 내 여권이겠지만, 아마 평생토록 간직하게 될 것 같다. 거기에, 내가 가장 젊고, 무모했고, 그래서 멋졌던 날들의 발자취가 있으니까. 지금도 가끔, 트럭에서 할 게 없으면 여권을 펼쳐 도장들을 하나씩 감상하는데, 안 먹어도 배가 부른 느낌이다.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건, 트럭에서 가만히 앉아있느라 칼로리 소모가 거의 없어서 그렇겠지만.
오늘의 바에서도 와이파이가 된다. 그 덕에 주변 소식을 조금 접해볼 수도 있었다. 우선 야구를 이겼다. 4연승이란다. 내가 안 보니 잘 하는 것만 같은 이 느낌은 뭐지. 뭐 그래도, 못 하는 것 보다는 낫겠지. 나의 주변 사람들은 현실에서 분투하는 중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열심히, 또 치열히. 문제는, 그것들 모두 나 역시도 언젠가는 감당해야 할 것들이라는 점이다. 이 여행은 일종의 유예였고, 도피였다. 결국 언젠가는 반드시 마주해야 할 현실로부터 잠시 떠난 몇 개월이었다. 반드시 마주해야할 건, 결코 피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하며, 애석하게도 나는 피할 수 없는 걸 즐길 정도의 위인은 못 된다. 여행을 떠나기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내게는 당연히 여행의 기억과 추억이 생겼다는 점이다. 이게 내 삶에 어떤 원동력이 될 지, 그리고 어떻게 내게 위안을 줄 지는 아직 모르겠다. 여행은, 마땅한 비유가 생각이 안 나서 하는 말이기도 한데, 마치 소설 <당신들의 천국>에서 원생들이 바다에 돌을 던졌던 행위와 비슷하다. 언젠가는 반드시 둑이 솟을 거란 믿음 하나로 기약없는 희망에 팔이 빠져라 돌을 던졌듯, 이 여행이 분명 언젠가는 내 삶에 근사한 지지대, 혹은 넉넉한 정신적 품이 되어주리라는 기대로 여행을 하는 것이다. 물론 여행의 목적에는, 순간적인 쾌락을 추구하기 위함도 크다. 당장 즐겁자고 여행을 온 것 역시 여행의 여러 이유들 중 하나다. 즐거움의 관점에서 이 여행은 이미 더할 나위 없는 성공이다. 하지만, 그저 거기서 내 여행이 머무르지는 않기를 바란다. 조금 더 강렬하고, 짙은 여운으로, 혹시 내가 먼 훗날 치매에 걸리더라도 이 여행 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조금은,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면 좋겠고, 이 날들의 따스함을 간직하며 척박한 삶을 풍요로이 버텨내기를 바란다.
뒤의 강 뒤로 석양이 지고 있어서 그런지, 다소 감성적인 생각들이 강처럼이나 마구 흐른다. 생각하기 참 좋은 하루다. 가만히 바에 앉아, 나보다 더 가만히 있는 자연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것들을 머릿 속에 떠올려 보았다. 떠올린다고 곧장 답이 나오는 질문들은 물론 아니었다. 헌데, 원래 어려운 질문들은 쉽게 답하기 힘든 법이다. 수학적 가설들에도 증명되지 못 한 게 꽤나 있는 것으로 안다. 삶의 질문들은, 쉽게 답해질 수 없기에 '삶의 질문'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는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멍하니 앉아 맥주를 마시며 생각을 하는 것도 캠핑의 묘미들 중 하나인 것 같다. 이런 측면에서만 보면, 이왕 떠날 캠핑은 조금 부족하게 떠나는 게 낫다 싶기도 하다. 나의 평소 생각은, 풍요 속에 빈곤은 있어도, 빈곤 안의 풍요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주의다. 하지만 캠핑은, 빈곤까지는 아니더라도, 결핍, 혹은 부족 안에서 풍요를 찾을 수도 있는 몇 안 되는 기회다. 글램핑을 해보지 않아서 섣불리 말 할 수는 없겠지만, 서울의 좋은 호텔보다 그 곳이 편할 리는 없다. 어차피 불편할 캠핑이라면, 조금 더 많은 속세의 것들에 미련을 버리고, 홀가분하게 떠나보는 방안도 참 괜찮을 듯 하다. 거기서, 전혀 새롭고도 낯선 감정과 생각들을 얻을 수도 있으니까. 물질적 풍요는 절대 선사해주지 못 했던, 그런 종류의 것들 말이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sg워너비의 ‘사랑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