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 아프리카 트럭킹 투어, Day 18 (보츠와나 쵸베 국립공원)
이렇게 전반전이 끝나간다
6월 1일부터, 보츠와나를 입국할 때는 국경에서 추가적인 금액을 내야 한다는 '썰'이 우리 일행들 사이에서 돌았다. 미화 30달러였다. 따라서 나미비아의 캠핑 사이트를 나서 다시 보츠와나를 향할 때, 우린 다소간의 걱정어린 마음들이었다. 30달러는, 꽤 큰 지출이 될 만한 금액이다. 거기에, 보츠와나는 원래 이 투어에서 무비자 입국(90일 이내)가 허용된 몇 안 되는 고마운 나라들 중 하나였기도 했다. 빡빡한 예산을 설정하여 여행을 다니고 있는 상태에서, 이렇게 갑작스러운 지출 예정은 그 자체로도 조금 스트레스였다. 아프리카 나라들을 돌아다니다보면, 어쩌면 '비자 비용'이 이 나라의 주된 수입원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조금 들 때도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린 어떠한 비용도 내지 않고 보츠와나에 입국할 수 있었다. 바뀐 시행령이, 아직은 육로로 이동하는 국경까지는 도달하지 못 한 듯 했다.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올레'를 외치며 국경을 통과했다. 30달러면, 맥주가 몇 잔인데. 한 시름이 놓이기도 했다. 나는 내일 짐바브웨 국경을 통과할 때 내야 할, 딱 그 만큼의 50달러만 현금으로 가지고 있었다. 오늘 여기서 30달러를 지불했다가는, 내일 상당히 곤혹스러워질 수도 있었다. 사실 이게 더 큰 문제이기도 했다. ATM이 있는, 더 적확히 말해서는 멀쩡히 잘 작동하는 ATM이 있는 곳이 드물기 때문에, 돈을 언제 찾을 수 있을 지도 굉장히 요원했다. 거기에, 설사 ATM을 방문하여 돈을 인출했다고 해도, 환전소가 없으면 달러로 바꾸지를 못 한다. 이 스트레스가 꽤나 심각했었는데, 무탈한 국경 통과에 진심어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확실히, 이 여행의 전반적으로, 나는 운이 나쁜 케이스는 아니다.
오늘 도착한 보츠와나의 캠핑 사이트는, 아프리카 전반기의 마지막 캠핑 사이트였다. 대부분의 일행들은 내일 빅토리아 폭포에서 자신들의 아프리카를 마친다. 나는, 하아, 아직 신에게는 20일이 더 남았습니다, 라는 이순신 장군의 결연한 마음으로 더 캠핑을 해야 한다. 그래도, 오늘만 텐트에서 보낸다면, 내일부터 이틀 간은 호텔에서 쉴 수 있다. 사실 호텔보다도 더 급한 건 빨래이기도 하다. 가자마자 리셉션에 빨래를 부탁해야지. 이 이후에도 20일 가까운 시간 동안 캠핑을 또 해야 하는데, 그래도 이 사람들과의 캠핑은 마지막이라고 텐트를 치는데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 텐트를 정말 잘 친다. 첫 날에, 가이드가 3일만 지나면 5분 안에 텐트를 칠 수도 있을 거라고 했던 말을 듣고, 솔직히 반신반의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나처럼 손이 야무지지 못 한 사람이 텐트를 5분 안에 치다니, 이건 너무 과장된 동기부여인 걸. 지금도 5분 안에 치지는 못 하지만, 어쨌든 헤매지 않고, 그러면서도 재빠르고도 익숙한 동작들로 텐트를 완성할 수는 있게 되었다. 텐트를 올리면, 꼭 나름대로의 대문과 창문을 열어야 한다. 접힌 상태로 오랜 시간 차에서 굴러다녔기 때문에, 통풍을 하지 않는다면 감당할 수 없는 사우나가 텐트 안에서 개장된다. 그 다음에는 매트리스와 침낭, 또 각자의 개인 용품들을 갖다 놓는다. 첫 날에는 이런저런 것들을 다 바리바리 트럭에서 들고 나와, 그걸 텐트 안에서 다 펼쳐 놓은 다음에 정리하곤 했다. 이제는 조금 요령이 생겨, 딱 필요한 것들만 대충 챙겨서 나온다. 이 캠핑 여행은, 어떤 의미에서는 '도전'이었기도 했다. 도전도, 무한도전에 가까웠다. 내내 텐트를 치고 지내야 한다는 사실을, 첫 날 텐트를 치는 순간까지도 믿을 수 없었다. 어쨌든, 그 무한도전의 반을 끝냈다. 조금은 장하고, 뿌듯하고, 그러면서 이젠 정말 여행의 종반부라는 생각에 아쉽기도 하고.
텐트를 치고는, 같이 점심을 먹었다. 오늘의 점심은 핫케잌이었다. 쉐프가 처음으로 해 준 메뉴였다. 가이드 만큼이나 이 친구도 참 좋은 쉐프였다. 우선 유쾌하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 한다. 20일 가까운 시간 동안, 겹치는 요리들 거의 없이 최선을 다하여 음식을 만들어 내주었다. 그저 고마운 마음이다. 점심을 먹고, 우린 쵸베 강(Chobe River)으로 보트 크루즈를 하러 갔다. 막간을 이용하여 맥주를 두 병 샀다. 해 지는 것을 바라보며 마시기 위함이었다. 처음 생각으로는, 무슨 일몰 크루즈를 4시간이나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유람선 관람은 예나 지금이나 내 취향이 아니다. 지겨운 표정으로 배에 탑승했다. 역시나, 지겨웠다. 이미 탄 배에서, 지겨움을 이기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아, 술을 가져왔지. 일몰 즈음에 마시기 위한 술이었는데, 해가 쨍쨍할 때 다 마셔버렸다. 어차피 배 위에 아이스박스가 없었고, 그 때 까지 기다렸다가는 미지근하기 그지 없는 요상한 맥주를 마셔야한다는 위기감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든, 얼마나 굉장한 일몰이 펼쳐지나, 싶은 다소 호전적인 마음으로 배 위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어머나. 동물들이 나타났다. 시작은 저 멀리에 코끼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코끼리라니. 뭐지. 일몰 크루즈라더니, 게임 드라이브의 성격도 있는 거였나. 기쁜 마음이었다. 더 이상의 지루함은 없었다. 이 뜻밖의 동물의 왕국을 즐기겠다는 마음에 조금 흥분됐다. 유후.
그래서 오늘 본 동물들은 다음과 같다. 코끼리, 하마, 악어, 버팔로, 그리고 사슴 류의 다양한 동물들. 아프리카에 왔다고 매 번 이런 동물들을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물론, 가끔씩은 차를 타고 가는데 앞에 기린이나 얼룩말이 지나가는 경우들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동물들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에토샤 국립공원'이나 '세렝게티 국립공원' 등, 인간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그래서 동물들의 서식지가 잘 보존돼 있는 지역으로 가서, 꽤 오랜 시간을 정처없이 떠돌며 행운이 선물하는 우연의 순간을 기다려야 한다. 오늘 방문했던 쵸베 강 주변에도, 동물들의 서식지가 아주 잘 발달 돼 있었다. 내일의 계획 중에는, '쵸베 국립공원'에서 게임 드라이브를 하는 일정이 있고, 따라서 오늘의 보트 크루즈에서 동물들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동물들은 마주하게 되니, 정말 신기했다. 몇몇 동물들은 심지어 에토샤 국립공원에서보다 더 가까이 구경할 수 있었다. 코끼리와는 정말 가까웠다. 눈 앞에 바로 코끼리가 있었고, 그 코끼리는 귀를 흔들어대며 열심히 풀을 뜯는 중이었다.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라던데, 정말 코로 집어서 입으로 넣었다. 어린 시절의 동요가 얼마나 현실 고증을 잘 했던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저, 이 모든 순간이 신비로웠다. 가장 경이로웠던 때는 하마가 입을 쩍 벌리던 그 순간이었다. 내가 지금 현실에 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되게 화질이 높은 디스커버리 채널을 보고 있는 건지 잘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이런 건, 아무리 보고 또 봐도 현실감이 별로 들지 않는다.
동물들에 열광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해질 무렵이 되었다. 아까는 동물들 때문에 비현실적이었다면, 이번에는 그냥 예뻐서 비현실적이었다. 언젠가의 나의 삶은, 마땅한 출구 없는 현실에 갇히게 될 것이다. 이건 내가 특별히 비관적이거나 염세적인 사람이라 하는 소리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내고 있는 보편적인 삶에는 마땅한 출구가 없다. 그러니 나 역시 더 없이 보편적인 사람이며, 그래서 그런 삶을 언젠가는 살아내야 한다는, 지극히도 현실적인 자각에서 기인한 추론이다. 그렇게 보편적인 삶이지만, 한 편으로는 1인분의 몫을 해내며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준비하는 일만큼 숭고한 게 또 없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숭고라고 하면, 우린 흔히 종교적이거나, 아니면 탈세속적인 무엇인가를 떠올린다. 하지만, 가장 세속적이고도 속물적인 어딘가에서, 오늘, 그리고 내일을 위한 치열한 분투가 숭고하지 않을 이유 또한 없다. 아니,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것이 더 거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땅한 물리적 출구가 없는 현실에 최선을 다 하는 그런 보편적인 삶은, 내게는 그런 의미다. 하지만 그 삶에 완전히 매몰되어서, 나를 잃고, 내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 어떤 욕심이 었었는지, 또 어떤 생각들로 지난 시간들을 살아냈는지까지 잊어버리기는 싫다. 오늘과 내일이라는 두 거대한 현실에, 과거의 것들을 손 쉽게 '미미'했다고 여겨버리는 '시시'한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이미 100일이 훌쩍 넘은 이 여행이, 오늘과 내일이란 현실이 쓰나미처럼 밀려올 때, 나를 방어할 수 있는 든든한 콘크리트가 되기를 바란다. 슬로베니아 피란 등에서의 찬란한 기억들과 더불어, 아프리카에서의 여러 비현실같음이 그 중심에서 존재감을 뽐내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크루즈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만찬이 준비되고 있었다. 오늘 아침, 우리가 각자 먹고 싶은 것들을 사서 쉐프에게 전달해주기도 했고, 또 쉐프도 자기대로 장을 봤다. 덕분에, 정말 풍성하고도 다양한 요리들이 탄생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저런 스테이크들과 소시지, 닭, 그리고 옥수수도 있었다. 캠프 사이트의 캠프 파이어로 구운 바비큐는 아무리 먹어도 도무지 질리지 않는다. 밥을 먹으며, 내일 있을 일정에 대한 브리핑을 들었다. 저 가이드의 마지막 저녁 브리핑이었다. 빅토리아 폭포에 도착해서는, 가이드와 쉐프가 모두 바뀌게 된다. 정이 들었는데, 참 아쉽기도 하다. 책임감 강하고 또 프로 같았던 이들 덕분에, 어려울 수밖에 없는 아프리카 캠핑 여행 초반에 오히려 즐거운 일들이 더 많이 생겼다. 다시 한 번, 그저 고마울 뿐이다. 아름다운 저녁 식사를 마치고는, 캠프 사이트의 바에서 아주 많은 맥주를 마시고 있는 중이다. 달이 많이 차서, 이제 별은 희미하다. 그렇게 빛나던 별들이 희미해졌 듯,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이 여행의 기억도 조금씩 빛이 바래겠지. 그 속도가 조금 더디기를 소망할 뿐이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정재일의 '주섬주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