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는 운명이 아닌 건가

노마드 아프리카 트럭킹 투어, Day 24(잠비아 사우스루앙가 국립공원)

by Nell Kid
'만나지 못 함'을 수용하는 것 역시도 아프리카 여행의 중요한 미덕들 중 하나

지난 이틀 내내 대부분의 시간을 길 위에서만 소비했고, 딱힌 한 게 없음에도 기력이 소진됐다. 오전의 추가적인 게임 드라이브를 굳이 신청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어차피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계속되는 게임 드라이브가 예정되어 있고, 또 몸도 힘드니 아침에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힘든 몸을 텐트에 눕힌다고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여유있는 하루를 보내다 보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아침 일찍 다른 아일랜드 출신의 일행 한 명과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게임 드라이브를 떠났다. 그들을 위해 준비된 아침이었지만, 어차피 부스럭 대는 소리에 일찍 일어나버렸고, 함께 식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텐트로 돌아와 잠깐 눈을 붙였다. 후반기가 시작된 이 후로, 홀아비 신세에서 벗어났다. 케이프타운에서 함꼐하고 있는 미국인 친구와 텐트를 같이 쓰게 된 것이다. 두 배의 노동력은, 텐트를 펴고 접는 피로도를 무려 네 배 정도 감소해주었다. 지금보다 네 배 정도 힘든 걸 지난 20일 내내 혼자 했던 셈이니, 몸이 어지간히 지칠 만도 하다. 전반기에서도 그렇지만, 일행들 대부분이 오전 액티비티를 떠난 채 느그막히 시작하는 캠프사이트의 아침이 나는 참 좋다. 다소 쌀쌀한 아침의 공기를, 담요 한 장을 어깨에 두른 채 따뜻한 커피 한 잔과 맞이하는데, 티파니에서보다도 더 매력적인 '아프리카에서 아침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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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0_145812.jpg 오전의 한가로운 캠프 사이트
20170610_150031(0).jpg 귀엽고도 무서운 원숭이들

이 곳의 캠프 사이트에는 와이파이가 된다. 올레. 시간 제한이 있기는 한데, 오늘은 별 제재를 안 하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야구 소식들을 실컷 보았다. 친애하는 팀 삼성 라이온즈가 어제 또 승리를 거두었다는 승전보를 접했다. 스톡홀름 신드롬의 일종 같다. 하도 팀이 못하다 보니, 이런 간헐적 승리들에도 무척이나 기쁘다. 인터넷 서핑도 하고, 또 주변을 산책하기도 하며, 참 여유있는 시간을 보냈다. 패키지 투어가 아닌 개인 여행이었다면, 이런 아침들을 조금 더 자주 가질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도 조금은 들었다. 하지만 워낙 이동해야 하는 코스가 방대하고, 그 중간중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르며, 또 틈틈히 액티비티들까지 하려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 하는 게 옳다. 그러니 이렇게 가끔이나마 주어지는 이런 여유를 운이 좋다 생각하며 즐겨야지. 어제 이 곳의 해질녘이 참 아름다웠다. 쓸데없이 이 곳에 일찍 도착해서 하는 것도 없다고 투얼거렸는데, 적당한 여유를 부리다가 참 예쁘고 아름다운 해질녘을 맞이할 수 있었다. 덕분에 돈이 아깝다, 라는 어제 초반에 했던 생각이 많이 누그러졌다. 참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보고만 있어도 복잡한 세상살이와 그것만큼이나 번잡스러운 마음이 조금은 안온해지는 느낌이었다. 템플 스테이 등을 떠나는 이유를 조금 알 것도 했다. 그냥 자연과 시간의 흐름을 보고만 있는 것인데도, 어떤 평화 비슷한 게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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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9_180501.jpg 어제의 일몰. 감상하자.

가장 놀라웠던 건, 물을 마시러 오는 동물들의 기가 막힌 로테이션이었다. 육식동물과 초식동물, 그러니까 말하자면 얼룩말, 사슴, 코끼리, 하마, 원숭이 등등이 모두 이 사우스루앙가 강을 이용한다. 혹시라도 이들 사이에 다툼이 있으면 어떨까 싶기도 했는데, 정말 예약이라도 한 것 처럼 각자의 무리들이 전혀 겹치지 않는 시간대에 와서 물을 마시고 다시 길을 떠났다. 그 질서정연함은, 일몰의 석양과 겹쳐 울컥한 뭉클함을 자아냈다. 아, 정말 귀 기울이지 않고 눈 여겨보지 않았던 것들이, 세상에는 저렇게 많았고, 그것들은 또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구나. 거대한 무언가를 마주하게 되면, 괜한 경외감이 생겨 되려 숙연해지기도 한다. 어제가 그랬다. 평화로움과 질서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며, 직접 경험해보지 못 한 세상을 쉽게 재단해서는 안 된 다는 다짐을, 한 번 더 했다. 뭐 이런 교훈적인 메시지는 차치하고라도, 우선 해질녘의 평화로움이 그저 좋았다. 사슴이 와서 물을 마시고, 저 멀리에서는 하마의 울음 소리가 들리며, 옆에는 원숭이들이 뛰어다니던, 그런 비현실 속의 현실, 혹은 현실 속의 비현실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최대한 오감을 다 활용하여 이 광경을 포착하려 애썼다. 더 듣고, 더 냄새를 맡고, 더 느끼고. 다양한 동물들의 서로 다른 울음소리들과, 저녁을 준비하는 우리 팀 가이드들의 요리가 풍기는 냄새, 그리고 조금은 쌀쌀한 날씨까지. 최대한 오래, 또 온 몸 깊숙히, 이 날의 기억을 간직해야지.


오늘 아침 일찍 나갔던 팀원들이 돌아왔고, 그들이 오자마자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파스타였는데, 확실히 파스타는 맛 없기가 힘든 음식이다. 식사를 하고 잠깐 휴식을 취한 뒤, 브런치 타임을 갖고 우리는 게임 드라이브에 나섰다. 오늘은 사자를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 게임 드라이브가 지나면, 남은 게임 드라이브는 이제 한 번 밖에 남아있지 않다. 너무 비싼 세렝게티는 가지 않을 예정이기에, 그리고 그 돈을 지불할 만큼 동물들에 지대한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라, 수컷 사자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셈이다. 오늘의 게임 드라이브는 게다가 해질녘부터 야간까지 진행되는 드라이브였다. 4x4 차량을 타고, 아주 강한 플래시 라이트를 비추며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것이다. 이 경우 동물의 눈이 빛과 닿으면 아주 짙은 어둠 속에서 그 눈이 보인다고 한다. 이 때 운전자에게 뭔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거기를 조금 더 세심하게 비춰보는 식으로 게임 드라이브는 이루어진다. 해가 지기 전까지는 일반적인 게임 드라이브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이렇게 쓰고 나니까 참 배부른 소리다. 코끼리나 얼룩말 들이 이젠 '평범한' 동물들이 되었다니. 분명 언젠가는, 고개만 돌리면 코끼리가 있었어, 라며 그땐 그랬지를 중얼댈 날이 올 것 같은데, 그럼에도 지금 당장은 코끼리가 흔한 동물이 된 것이 솔직한 심정이기도 하다.

20170610_155356.jpg 이런 차량에 탑승하여
20170610_161507.jpg 국립 공원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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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0_164723.jpg 그리고 동물들

지는 해를 바라보며, 각자가 준비해온 맥주를 한 병 씩 마셨다. 이 맥주가, 남은 게임 드라이브 동안 배뇨 욕구를 어마어마하게 불러일으킬 원인이 되리라고는 그 때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어쨌든 아름다웠다. 어제는 강을 바라보며 지는 해를 보았다면, 오늘은 넓은 초원 뒤로 넘어가는 태양이 있었다. 아프리카는 참 자연적인 곳이다. 이게 무슨 당연한 소리인가 싶겠지만, 그래서 부연하자면 자연은 원래 이런 곳이구나 라는 걸 아프리카에서 느끼고 있다. 해는 저렇게 지고, 해가 지고나면 원래 세상이 이렇게 어두운 것이라는 걸, 그래서 '밤'이라는 건 실은 그저 캄캄한 세상이라는 걸, 아프리카에서 절감하고 있는 중이다. 인공 불빛들이 많아도 너무 많은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들에서는 쉽게 느껴볼 수 없는 사실이다. 해가 자취를 감추자마자 어둠은 급속하게 찾아왔고, 우린 플래시라이트를 켠 채로 야간 게임드라이브를 시작했다. 조금 시간이 지났을까. 표범 한 마리가 우리 쪽으로 유유히 걸어왔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라 숨울 죽이기도 힘들었다. 아직은 어린 표범이라고 했다. 온 몸에 새겨진 표범 무늬가, 표범이니 그 무늬가 있는 게 당연한 것인데, 그저 신기했다. 핸드폰 카메라의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표범을 시작으로 하마, 새, 그리고 하이에나까지 보았다. 하이에나는 어떤 동물의 고기를 물고 있었다.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하이에나는 도망갔고, 우린 차량으로 그를 추적했다. 하이에나가 너무 빨랐던 관계로, 결국 명확한 사진을 담는 데는 실패했으나, 이것 역시도 정말 놀라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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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0_172431 (1).jpg 일몰 즈음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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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0_184419(2) (1).jpg 표범이 나타났다!
20170610_184955.jpg 하마
20170610_191004 (2).jpg 아주 잘 보면 하이에나가 있다.
20170610_195307.jpg 오늘 길에 잠시 들른 마을

오늘도 수컷 사자는 보지 못 했다. 그럼에도 신기한 동물들을 많이 보았고, 아쉬움은 그리 크지 않았다. 현실판 신비한 동물사전을 찍는 느낌이기도 했다. 이제 수컷사자를 볼 수 있는 게임 드라이브는 단 하나 밖에 남지 않았고, 그 동안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아 썩 낙관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사자 외에도 보기 힘든 동물들을 오늘 이것저것 보아서 그랬던 건가, 아니면 어제 저녁 석양의 여운이 아직 남아서 그런 건가, 끝내 사자를 못 보게 되더라도 이 역시 좋은 방향의 아쉬움이 될 것이라는 추측이 들었다. 언젠가 다시 아프리카를 찾아올 미련이 될 수도 있겠고. 여행을 다니며 하나 느끼고 있는 건, 삶이란 원래의 뜻과 기대대로만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마치 어제 저녁의 루앙가 강에서, 이런저런 동물들이 차례로 물을 마시고, 또 어떤 시각이 되자 알람이라도 울린 듯이 바로 떠난 것 처럼, 수컷 사자와 나도 제 때에 마주하게 되는 인연이면 좋은 것이고, 아니면 어쩔 수 없을 뿐이다. 그 인연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어지면 좋겠지만, '만나지 못 함'을 수용하는 것 역시도 아프리카 여행의 중요한 미덕들 중 하나인 것도 같다. 내일은 잠비아를 떠나 말라위로 이동한다. 비자 등의 문제 때문에 이 곳으로의 입국이 가장 긴장된다. 부디 별 일 없기를. 이렇게 점점 아프리카의 동쪽으로 향하는 중이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검정치마의 'EVERYTHIN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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