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과 두려움 사이의 어딘가에서

출국 D-2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순간의 순간으로 빛나는 여행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인생을 어떻게든 날로 먹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그것도 아주, 맛있고도 싱싱하게. 그래서 살면서 기울이는 대부분의 노력들은 가능한 인생을 성심성의껏 맨입에 먹기 위한 방향으로 수렴된다. 하지만 동시에, 인생이라는 게 그리 만만히 날로 먹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어느 정도의 양심은 있는 놈이다. 그 덕에 아쉬움은 있어도, 원망이나 분노는 없다. 성실함, 인내심, 집중력, 경제력, 혹은 용기까지, 내가 가지지 못한 다양한 가치와 척도들을 지닌 이들을 보며, 때로는 열등감을 느끼고, 또 가끔은 그들은 동경한다. 그러면서도 자고 일어나면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 있다면 참 좋겠다, 따위의 생각만 할 뿐, 현실과의 간극을 좁히기 위한 노력 같은 건 별로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내 인생에 크게 만족할 만한 순간은 딱히 없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자존감이 무척 낮다는 소리다. 결국 나는 내 삶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타인의 인생을 질시하고, 시기하고, 혹은 동경하다가, 나의 그것과의 괴리를 깨닫지만, 그것이 내 삶의 질적 향상으로 이루어지는 선순환 구조는 아주 드물게 일어날 뿐이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내가 몹시 부러워하는 어떤 이의 삶이 통째로 선물로 찾아온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인생을 날로 먹을 아주 강력한 의향이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조금 거창하게 이야기 하자면 인생의 구매시장에서 나 스스로의 삶의 값어치를 제고하려는 목적으로, 혹은 더 쉽고도 저렴한 언어로 설명하자면, 참 닮고 싶고 부러워 하는 누군가의 인생을 날로 먹을 수 있는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그리 쉽게 내 삶을 버리지는 않으려고 나는 여행을 떠난다, 는 사실 너무 있어 보이려는 소리고, 어느 밴드의 가사처럼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은 해야겠는데 어디에 있더라도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으니 한국을 떠난다, 역시 허울 좋은 뻥이며, 그냥 좀 미련없이 떠돌고 싶다는 마음에, 어찌 되었든 내일 모레 출국을 하게 되었다. 어떤 중대한 사건이 인생에서 펼쳐졌다고, 그게 꼭 극적인 성장으로 이어지진 않는다는 걸 나는 경험적으로 목격해왔다. 서로 다른 단어들에 저마다의 이름이 있는 건 섣부른 동일시를 지양하라는 뜻이며, 그렇기에 상처나 아픔, 혹은 고생과도 같은 부정적인 단어들이 성장의 씨앗과 필연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이번에 떠나는 긴 여행을 다녀 오더라도, 나는 여전히 인생을 날로 먹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며, 그게 안 된다면 정규분표 그래프의 최정점에 위치한 인생이라도 살기 위해 하루하루를 아등바등 할 지도 모른다. 인생을 날로 먹고 싶어하는 나같은 사람은 본디 고마움이나 따뜻함 같은 감정들에는 또 인색하기에, 언젠가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삶의 과제들을 유예하고 한가롭게 여행이나 떠난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 저주를 퍼부울 수도 있다.


그래도 그건, 그때의 일이고. 당면한 삶의 숙제들 앞에서 도무지 지난 날의 내가 못마땅하다면, 그때 가서 욕을 하면 되는 일이다. 바뀔 수 없는 것들에 투덜거리는 게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그래도 감정의 분출 정도는 되지 않겠는가. 그 순간의 짜증과 후회를 제때 소진해내는 것이다. 미래에 느낄 지도 모르는, 그리고 아마도 느낄 것만 같은, 막연한 불안함과 두려움은, 당장의 내가 깊이 고민해봤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다만, 여행을 갈 수 있을 때, 그리고 그나마 떠나도 괜찮을 때, 그러지 못한다면 그 후회가 더욱 크게 다가올 것만 같긴 했다. 이건 다 내가 인생을 날로 먹으려는 사람이라서 그런건데, 어차피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고 그 시간에 나의 미래를 위한 치열한 노력을 전개할 계획 같은 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순간 순간의 쾌락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뒷 일은 둘쨰치고, 우선 지금이라도 조금 더 기분 좋은 게 먼저기에, 나는 여행을 주저없이 택했다. 생각해보면 인간만큼 현재의 '순간성'을 과소평가 하는 짐승이 세상에 또 없다. 우리에게 '지금'이라는 단어는 지난 과거 행적의 방정식이 내린 결과물이거나, 혹은 미래의 산출값을 위한 함수의 시작점 정도로 여겨지는 일이 잦다. 연속적인 그래프 안에 '지금'이 '지금'으로 가치 있을 만한 순간은 별로 없다. 지금은 언제나 도래하지 않은 미래로 도약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고, 부당하게 여겨지는 때가 많다. 하지만 순간만이 선사할 수 있는 선물이 분명 있다. 미래의 일부분으로서의 순간이 아닌, 그저 순간의 순간으로써 빛나는 가치다. 여행은, 이를 발견하기 아주 좋은 기회다.


여행을 다녀오더라도 나란 인간의 큰 틀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20년 이상을 살아도 크게 달라지는 것 없던 삶이 단지 몇 개 월의 여행으로 천지개벽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여행에서 어떤 중요한 삶의 깨달음을 얻을 정도로 그릇이 넓은 사람도 못 된다. 하루하루의 잠자리에 불평하고, 입에 맞지 않은 음식을 투덜거리며, 한국과 같지 않은 IT 환경에 악담을 퍼부울 것이고, 또한 구글 지도가 되도 않은 길을 알려줄 때에는 스마트폰을 저 멀리 던져 버릴 듯한 충동에 휩싸일 테다. 다만, 어찌 됐든 여행을 무사히 다녀온다면, 그때는 내가 나의 인생을 조금 더 아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는 있다. 무엇이든 날로 먹고 싶어하는 성격이라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한 기억이 이번 여행 동안 남기를 바란다. 여행을 다녀왔다는 것이 반드시 더욱 포용적이고, 너그러우며, 또한 이런저런 다양성을 품어낼 수 있는 인성의 함양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세상에 없다. 오히려 현지에서의 단편적인 기억들로 더욱 왜곡되고 편향된 사고 방식을 견지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이번 여행에서 누구의 기억과도 바꾸기 싫을 만한 기억을 쌓을 수 있기만을 소망한다. 나처럼 날로 먹는 인생을 무지도 밝혀 대는 사람에게조차, 이번 여행의 기억 만큼은 보물처럼 끌어안을 만한 추억으로 승화되기를 꿈꾼다.


20년 이상의 시간동안, 나는 단 한 번 도 나 스스로를 사랑한 적 없었다. 이 지점에서 기형도 시인의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작품이 떠오른다.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라고 말했던 그의 시처럼, 내게도 내 인생이 그렇게 사랑스럽지 만은 않았다. 단 한 번 여행을 다녀왔다고, 평생껏 사랑해본 적 없는 나의 인생이 돌연 사랑스러워질 리는 만무하다. 나는 원래부터 수동적이고,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비겁하기까지 한 사람이다. 행복보다는 불행하지 않은 날들을 먼저 꿈꿨고, 아프지 않거나 괴롭지 않은 인생에 관한 열망이 즐거움 가득한 그것보다는 항상 먼저 자리했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순례길을 걸을 것이고, 또 아프리카 남부를 횡단할 예정이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들을 무사히 마쳤다고 스스로가 기특해 죽을 지경에는 이르지 못 할 나의 자존감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삶을 날로 먹으려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삶의 호의 쯤은 당연한 권리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이리도 길게 떠나는 이 여행을 마치더라도, 나의 인격과 인품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다만 인생에는 그런 게 있다. 어떤 한 지점을 지나고 뒤돌아보면 아,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구나, 라고 느끼는 경우다. 누군가를 이를 '불타는 다리'라고 표현했다. 아마 이 여행을 기점으로, 나는 이전과는 전혀 같을 수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쪽이든 간에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인생을 어떻게든 날로 먹으려는 사람이고, 그래서 이왕이면 이 여행에서도 가능한 많은 것들을, 소위 말하듯 '뽕' 뽑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 여행을 기점으로 이전과는 절대로 같을 수 없는 나의 삶이, 여행으로 말미암아 조금이나마 덜 불행하고, 덜 절망적이고, 또 덜 아플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쉽지 않은 여행의 산출값이 내 인생의 가시적인 성장일 필요는 없겠으나, 그 추억으로 다가오는 내일을 섣불리 두려워하거나 살아가는 오늘을 애써 피하지는 않을 사람 정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조금 더 희망사항을 구체적으로 밝히자면 누구의 인생과도 바꾸기 싫은 삶으로 거듭났으면 좋겠지만, 다만 이번에 떠나는 여행이 평생토록 잃기 싫은 추억 정도만 돼도 참 좋을 것 같다. 그것만 돼도 어딘가 싶기도 하고. 설렘과 두려움 사이의 어딘가에서, 그런 소박한 즐거움과 섣부른 희망을 꿈꾼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