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행의 삶

출국 D-1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모든 당위와 강제, 그리고 의무와 기한으로부터 자유로울 그 곳에서

삶이라는 게 그렇다. 습관처럼 사용하는 문학적 메타포가 현실이 되어버리면 아무래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인생은 긴 여행과도 같다, 라는 문장을 쓰다가, 막상 정말로 긴 여행을 떠나게 되니, 아, 이리도 답이 없고 막막하기에 그런 표현을 그동안 해왔던 것이구나, 라는 자각이 이제야 들었다. 인생과 긴 여행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답이 없다. 그리고 없는 답을 찾기 위해 열심히 발품을 팔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답 같은 건 없다 보니 꽤 많은 시간 동안 고되고, 고될 수밖에 없다. 삶과 여행 모두 완전히 끝나 봐야 어떤 의미였는지를 적확히 정의 내릴 수 있다. 뚜렷한 마지막을 설정해놓지 않은 여행은, 하지만 인생과는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삶의 모든 것에는 전부 끝이 있다. 안타깝게도 그 종결들 대부분에는 주체자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사랑이든, 학업이든, 삶 자체든, 전혀 예기치 못한 시점에서 마무리 된다. 따라서 인생이란, 섣불리 이야기하면 피고 지는 경험들의 유기적인 결합체다. 그러나 끝을 정해 두지 않은 여행에서 만큼은, 시간적 무중력 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 별 일이 없다면, 그리고 별 일 같은 건 제발 일어나지 않아 주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아무튼 별 일 없이 여행 한다면 이 여정은 오로지 나의 판단 하에 마무리 된다. 모든 것들이 유한히도 유효한 생명력을 지녔다가 소멸되는 삶 안에서, 그 마침표를 스스로의 의지 만으로 찍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경험이 바로 편도 티켓의 매력이다.


문제는 여행의 끝 뿐만 아니라 시작에 있어서도 오로지 나의 지향만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부모 두 사람이 이런저런 구성애 선생님 가르침 적인 행위들을 통하여 아이를 잉태했고, 그래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세상에 태어났던 나의 탄생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다 보니 여행에는 내가 이럴려고 한국을 떠나나 싶을 정도로 심한 자괴감이 드는 순간들도 꽤 존재할 것이다. 특히 지난 번에 말했다시피 나는 인생을 날로 먹는 걸 아주 좋아하는 사람인데, 긴 여행에는 꽤 많은 준비가 필요하여 어마어마하게 귀찮기도 하다. 누가 대신 모든 걸 다 차려놓고, 자 이제 비행기만 타시면 됩니다, 라며 티켓을 건네주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런 점에서 인생이든 여행이든 어쨌든 모두 '나'의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른 누구에게는 단 한 칸의 간섭조차 허용할 수 없는 나만의 영역이 반드시 존재한다. 패키지 투어가 아니기에, 홀로 모든 걸 검색해나가며, 범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고도 무사히 살아돌아올 수 있는 방안들을 강구해야 했다. 한참을 고민해도 마땅히 떨어지는 정답이 없다는 것도 인생과 여행이 퍽 닮은 점이다. 당장 내 앞에 놓인 캐리어부터 문제다. 내가 수 십 번을 다 헤집어 놓으며 짐을 싸도, 만족스럽지 않은 구석은 여전히 남아 있다. 물론 이건 내 공간 지각력이 조금은 부족한 탓인 것 같기도 하지만. 게다가 생전 처음으로 들어본 병균의 백신을 맞고, 그 덕에 역시 생각지도 못한 금주를 3일 동안이나 하면서, 도대체 3일 동안이나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접종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따라서 아프리카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그런 곳으로 가는 내가 혹시 미친 건 아닌지, 에라 모르겠다 술이나 마셔야겠다 싶다가도, 아차, 금주를 해야 하지, 내가 정말 어마어마한 짓을 저질렀구나, 싶은 생각으로, 결국 이 여행의 불확실성만 더 크게 보였다. 그래서 여행의 기대감보다는 막막함과 불안함 만이 훨씬 지배적이다.


마지막 준비는 여행 기간 동안 읽을 책 세 권 정도를 추리는 일이었다. 어쩌다 보니 올 한 해 꽤 많은 책을 구매했다. 그건 아마 올 한 해가 마지막일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활자 기피증이 있던 나였기에 평생 사 모을 책들을 올 한 해 죄다 몰아서 구매한 셈이다. 그 중에서 여행에 가져갈 세 권을 골랐는데, 선발 기준은 얇으면서도, 진도가 쉽게 안 나가는 책들이었다. 이건 장강명 작가의 <5년만의 신혼여행>이란 책에서 얻은 조언이다. 최종 엔트리 후보에 올랐던 작품들이 꽤 있었으나, 오로지 저 기준에만 입각하여 선별하였다. 선발 원칙을 어겼을 때 결과마저 좋지 않다면, 데미지는 훨씬 크다는 걸 우린 지난 월드컵에서 배울 수 있었다. 재미있거나 감명 깊게 읽어서 챙기고 싶은 욕구가 잔뜩 드는 책들도 있었으나, 그런 사적인 감정으로 짠 엔트리는 몇 년 전 브라질 월드컵에서 처럼 '엔트의리'가 될 것만 같았다. 이렇게 말하자면 평소에 굉장히 책을 많이 읽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도서를 구매한 것과 독서에는 엄염한 차이가 있으며, 따라서 여전히 단 한 페이지도 펼쳐보지 않은 책들도 수두룩 하다. 영어를 유창하게 사용할 줄 안다면 현지에서 책을 구매해도 괜찮았겠으나, 오로지 입시와 시험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내 독해 능력은 아쉽게도 아주 얇은 영어 책 한 권도 버거우니, 아름다운 우리말로 쓰인 작품을 가져가야 한다. 치열할 필요도 없는 경쟁을 뚫고 선발된 작품들은 존 버거의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카뮈의 <시지프 신화>, 그리고 이제니 시인의 <아마도 아프리카>다. <아마도 아프리카>를 진짜 아프리카에서 읽는다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여 고르게 되었다. 유일한 상대 맞춤형 전술을 위한 자원이다.


거듭 확인해도 이유 모를 부족함이 자꾸 느껴진다. 여행 기간동안 막상 닥쳐오는 이런저런 사건들에, 왜 나는 귀국하는 비행기 표를 구매하지 않았을까, 하면서 지난 날의 나 자신을 어마어마하게 타박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준비해도 완벽할 수는 없다는 게 삶과 여행의 또다른 공통점이다. 그 빈 공간을 채우며, 완벽하지는 못 한 삶과 여행을 완전하고도 아름답게 만드는 것 역시 둘 사이의 중요한 접점이다. 아직 다 살아보지 않아서, 인생이 긴 여행과도 같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길기는 긴데, 그것을 여행이라 부를 수 있을 지는 확신할 수 없다. 이리도 지루하고 지리멸렬하며, 뜻대로 되지 않은 여행이란. 어떤 시인은 이 삶을 '소풍'이라고도 했던데, 어떻게 해야 그런 감수성을 기를 수 있는 건지. 아무래도 좀 거부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당분간은, 긴 여행이 내 인생이다. 문자그대로, 긴 여행의 삶, 그 자체다. 구체적이고도 뚜렷한 '마지막' 같은 건 없는 세상에 드디어 첫 발을 내딛는다. 시간과 공간의 진공 안에서, 새로운 공기로 마음껏 호흡할 수 있는 여행이 되기를 소망한다. 모든 당위와 강제, 그리고 의무와 기한으로부터 자유로울 그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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