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2016~2017 세계 여행)
이 도시의 여행자라는 사실은 추운 날씨에도 충분히 설렐만 했다.
인간은 참 간사한 동물이다. 한국이었으면 집 앞에 나오면서 욕 부터 내뱉었을 만한 런던의 추위에도, 아, 이런 신선하고도 차가운 공기, 굳이 향수를 만들자면 '여행지의 설렘' 향이 느껴지는 것 같아, 따위의 생각으로 호스텔을 나섰다. 평생 향수를 써 본 적도 없으면서. 어릴 적 수련회 이후 처음으로 찾은 호스텔은, 12인 실에 남녀공용이었고, 그래서 어쩌다 단 몇 시간 만에 말레이시아에서 온 두 친구와 통성명을 하게 되어, 런던에서의 첫 일정인 런던 브릿지를 같이 가게 되었다. 한국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도 한국어 발음이 더 분명한 두 친구들은 각각 방탄소년단과 빅뱅을 좋아했다. 런던 브릿지에는 안개가 자욱했고, 그래서 다리는 희미하게 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별 계획 없는 편도 여행으로 인하여 런던에서의 시간이 남아도는 나는 다음에 보면 되지, 따위의 여유를 부렸다.
말레시아의 친구들은 킹스크로스 역에서 네덜란드로 향했고, 나는 그들이 추천해준 캠든 타운(Camden Market)으로 갔다. 영국의 남대문 시장 같은 곳이었다. 남대문이나 케임든이나, 뭔가 이름이 비슷해 보이지 않는가. 아니다. 나도 잘 안다. 억지다. 이런 실없는 소리에 혼자 낄낄이라도 대야 덜 심심하다. 런던의 남대문 시장에서 쇼핑은 안했지만, 뭔가 영국스러움 같은 걸 잔뜩 느낄 수 있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구경하며, 흡사 런던인으로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물론 그 곳은 관광지다. 거기서 봤던 사람들 역시 대부분이 관광객들이었다. 한국에서 미처 챙겨오지 못한 이런저런 물품들을 구매할 의향으로 캠든 타운에 갔으나, 정작 그 곳은 옷가지들과 악세서리를 집중적으로 파는 곳이었고, 시장 중간중간의 길거리 음식들에 조금 입맛을 다시기도 했으나, 군것질을 나쁜 거야, 라는 생각으로 영국의 리젠트 파크를 향해 걸어갔다. 벌써부터 낭비를 하면 안 되지 안 돼. 계속 걸었다. 정말 많이 걸었다. 그래도 공원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도심 속에 이리도 거대한 허파가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다. 시간이 지나며 안개가 걷혔고, 나름대로 짱짱한 햇빛이 비췄다. 약간의 따스함 속에서 영국 사람들은 조깅이나 러닝을 했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춘 선글라스를 끼며 잔뜩 폼을 잡았다.
런던을 어떻게 여행할까, 라는 주제로 걷는 내내 고민했고, 일단 이 도시에 위치한 프리미어리그의 구장들을 하나씩 가보며, 그 주변이나 가는 길에 볼 거리가 있다면 멈추자, 라는 대략적인 계획을 세웠다. 겨우 이 정도 계획임에도 뭔가 대단한 판단을 내린 듯한 좋은 기분을 느끼며, 리젠트 파크를 마침내 나오게 되었다. 지도를 보는데, 마침 가까운 곳에 베이커 거리 역이 있었다. 베이커 거리라니, 내가 이걸 어디서 들어봤더라. 알고 있는 영국 거리라면 해리포터의 다이애건 앨리밖에 없는데, 여기는 머글 세상이니 그런 게 있을 리 없을테고. 베이커, 베이커, 뭔가 낯이 익다 싶어 머리를 굴려 보니, 세상에, 셜록 홈즈가 사는 동네였다. 드라마에서 들었던 거리 이름이다. 베네딕트 컴베비치가 세상 나 혼자 잘 산다 싶은 표정과 말투로 택시, 를 부르며 뛰어가던 그곳이 바로 베이커가였다. 따라서 나는 잔뜩 부푼 마음으로 그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셜록 홈즈의 동네에는 그의 동상이 있었고, 홈즈라는 이름의 여러 음식점들이 있었다. 홈즈의 그릴이나, 스시나, 이런 것들. 그리고 나는 식사를 하며 조금 더 그의 정취를 느끼기 위해, 건너편의 피자헛으로 갔다. 탐정은 바쁜 사람이다. 얼른 먹고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 그럴 땐 역시 패스트 푸드가 답이다. 게다가 우리 돈 12,000원 정도의 가격에 피자 무한 뷔페라니. 이것이 피자헛으로 향했던 결정적인 단서였다.
누가봐도 두 사람 이상이 먹었을 만한 피자들을 혼자서 남김없이 다 먹고, 오랜만의 기름기에 이런저런 반가운 소리들을 연주하던 위장의 음악을 들으며,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겨울의 영국은 해가 어마어마하게 빨리 지는 곳이었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런던 브릿지에는 불이 들어왔다. 템즈 강의 폭은 한강의 3분의 2도 안 되는 것 같아 런던 브릿지를 바라보며 걷다보니 금세 '강북'에 도착했다. 강 건너편은 조금 더 오래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 골목 저 골목을 이리저리 걷다가, 넬슨 제독 비슷한 동상을 발견했고, 그때서야 이 도시에 대영박물관과 내셔널 갤러리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알고도 안 가는 것과, 몰라서 못 가는 건 엄연히 다르다. 미술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나는, 두 곳이 있다는 걸 알고도 안 갈 것이다. 사실은, 안 가고 싶기는 한데, 아마 어쩔 수 없이 한 곳 쯤은 방문할 것 같다. 한 도시의 가장 유명한 박물관을 어떠한 미련도 없이 지나칠 정도로 여행이라는 것에 아무런 강박이 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디에 가면 무엇은 해야지, 따위의 당위적 주장이야 말로 자유로운 여행에서의 가장 큰 적이다. 그런데 가장 큰 적이기 때문에, 모든 게임의 최종 보스들이 그렇듯 쉽게 물리치기는 어렵고, 그러니 분명 두 박물관들 중 하나 만큼은 속는 셈치고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저녁은 토트넘 핫스퍼의 홈 구장 '화이트 하트 레인' 바로 옆의 펍에서 세 잔의 기네스를 마시고, 그 맛에 감탄하며 축구를 보았다. 아쉽게도 손흥민은 선발 출전하지 못했다. 요즘 같은 스마트 세상에 누가 경기 라인업도 확인 안 하고 그 멀리까지 술을 마시러 가냐고 어떤 이가 묻는다면, 내가 그 '누가'를 맡고 있다고 답해야 했다. 토트넘은 경기 시작 후 2분이 채 안 되어 선제골을 실점했다. 화기애애하게 함께 축구를 보던 토트넘 팬 아저씨의 입에서, 살면서 들어본 것들 중 가장 밀도 있는 'F'욕이 나오는 걸 보았다. 역시 축구가 국기인 나라의 국민들의 분노는 그만큼이나 치열한 수준이었다. 사람들로 꽉 차 있는 펍에서 그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 굳이 다리를 건너 토트넘 홈 구장 동네까지 갔지만, 펍은 한산하다 못 해 고요했다. 조금 지루하던 분위기에, 내게는 다행히도 토트넘이 실점하며 약간이라도 주변 분위기가 달아오른 것 같아 살짝 신이 났다. 그래도 티를 내면 안 되어, 나도 'No Kidding'을 연신 외치며 머리를 감싸 쥐는 액션을 취했다. 나는 당신들의 아군입니다, 라는 표시였다. 손흥민이 선발 출전을 했다면, 원래 계획은 그가 공을 잡을 때 마다 헤이 마이 맨, 을 외치려고 했으나, 전혀 뜻밖의 상황에 주변 분위기에 맞추어 토트넘을 응원했고, 그러다 어떤 아저씨가 사 준 또 한 잔의 기네스를 마시며 영국 신사들의 넓은 아량에 감사했다.
인간은 정말로 간사한 동물인게, 무려 오늘 아침까지 설렜던 추위는 저녁이 되자 그렇게도 짜증이 날 수 없었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추위가 더욱 크게 와닿았다. 덜덜 떨며 버스를 탔고, 물론 사랑스럽도록 빨간 2층 버스가 좋은 나는 2층 맨 앞에 앉았으며, 숙소까지 오는 동안 주변을 감상했다. 예쁘고도 깊이 있는 골목들이 참 많았다. 그 곳들이 딱히 불편해 보이지도 않았다. 실용과 편리의 명분으로 모든 '옛' 것들을 '나쁨'과 동일시하는 정서가 팽배한 우리나라에서 조금은 적극적으로 배워볼 만한 태도가 아닐까 싶었다. 최소한 런던이라는 도시에서 나는 아직껏 불편함 같은 건 모르고 살고 있다, 라고 이 곳에 입국한지 이틀 된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기는 한데, 어쨌든. 현지의 사람들은 또 어떻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으나. 지금까지의 느낌은, 교통도 나름대로 편리하고, 도시 자체의 환경과 위생도 크게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곳곳에 문화적 유산들과 도시의 매력이 공존하고 있다. 새로운 형식의 건물들도 주변과 위화감 없이 어울리면서, 미관과 실용성 중 하나를 반드시 포기하기보다는 오히려 섬세한 계획과 세심한 배치로 둘 모두의 효과를 이룬 묘수들이 이 도시에 촘촘하게 존재하는 듯했다. 물론 그런 감탄은 다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흥이 깨졌다. 겁나게 추운 날씨 속에서 숙소로 걸어오며, 내가 펍에서 자리를 뜬 이후 손흥민이 교체 출전하여 골까지 넣었다는 다소 당혹스러운 뉴스를 보게 되었다.
그걸 실시간 중계로 보지 못했다는 게 안타깝거나 아깝기보다는, 아 이렇게나 뜻대로 안 되는 게 여행이지, 내가 정말 여행이란 걸 하고 있구나, 라는 실감이 문득 들었다. 나쁘지는 않은 자각이었다. 내가 이 도시의 여행자라는 사실은 추운 날씨에도 충분히 설렐만 했다. 물론 그건, 직전에 갔던 펍에서 한 잔의 기네스를 공짜로 받으며, 그로부터 '웰컴 투 런던'이라는 말을 들어서 그랬는 지도 모른다. 세상에 꽁술만큼 기분 좋은 건 또 없으니까. 비록 내가 펍에서 중계를 볼 때 손흥민이 출전하지는 못했더라도, 어쨌든 응원하는 선수가 골을 넣었으니 나쁜 소식이 분명 아니기도 했다. 한 잔의 기네스와 손흥민의 골 뉴스는, 영국에서의 첫 취한 밤을 밝혀주었다. '웰컴 투 런던'이라는 한 아저씨의 말, 아마 아주 오래도록 기억 날 것만 같다. 이날의 플레이리스트는 Nothing but the thieves의 'If I Get High'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