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길만 걷지 못 해 미안해

영국 런던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여행의 핵심 역시 '굳이'

시간이 남아 돌면, 사람들은 가끔 정신 나간 짓을 한다. 이를테면 나는 군대에서 첫 장기 휴가를 나왔을 때, 기쁜 마음에 집까지 걸어왔다. 시간이 화폐라면 그 순간만큼은 재벌 2세가 된 느낌이었고, 그래서 아낌 없이 탕진했다. 어제도 시작은 비슷한 이유였다. 못해도 런던에 열흘 이상은 머무를 예정이다 보니, 내게는 어마어마하게 풍족하다 못해 템즈강 만큼이나 흘러 넘치는 여유가 있었다. 따라서 템즈강변을 따라 쭉 걸어서 그리니치까지 가 보면 어떨까, 라는, 그런 사치스러운 생각을 했고,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즈음 후회했으나, 후회와 고민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그 절반마저 지나쳤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접두사 ‘이왕 이렇게 된 거’가 내 정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늦었다는 생각이 들 땐 이미 늦은 경우가 대부분이기는 하나, 더 늦는 것과 덜 늦는 것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며, 어쩌면 그게 마지막 골든타임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역시 명심해야 한다. 안 그러면 몸이 고생한다.


그래서 내 몸이 고생했다. 그리니치까지 가는 길은, 템즈강변을 따라 일직선으로 걸으면 되겠지, 라는 안일한 첫 판단과는 달리 어마어마하게 구불구불했다. 그건 영국의 부호들이 강변 앞 도로를 개인 소유로 지정해 놓아, 출입이 불가했기 때문이었다. 길을 구매하다니, 이건 좀 스케일이 다른 사치였기는 했다. 덕분에 으리으리하게 큰 집들을 구경하며 변두리 골목 사이사이를 돌아 다녔다. 중간에 당이 떨어져서 동네 슈퍼에서 다이제를 하나 샀고, 생각지도 못했던 밀크 초콜릿의 부드러움에 놀라며 역시 과자는 서양 과자지, 따위의 사대주의적 사고방식을 하며 남은 길을 걸었다. 한 때 전 세계 모든 시계들의 기준점이었다던 그리니치로 가는 여정은 그만큼이나 쉽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쉬웠다. 내가 걷기 시작했던 지점에서 배를 탔다면 30분이 채 안 되어 도착했을 것이다. 하나 좋았던 건 배나 기차로 그리니치를 갔다면 전혀 몰랐을, 템즈 강변의 예쁜 골목들 여기저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나를 위로하며 길을 걸었는데, 막상 돌아오는 길에 탔던 전철에서 바라본 풍경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 한번 더 좌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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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니치까지 ‘굳이’ 걸어갔던 선택이 꽤 괜찮은 결정이었음을 증명할 만한건 딱히 없었다. 세상에 배와 열차가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들을 이용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몸소 실감한 정도랄까. 천문대가 위치한 언덕을 비롯하여, 그리니치(Greenwich)라는 이름에 걸맞게도시 여기저기가 푸른 색이라 생동감이 넘쳤으나, 그건 사실 내가 걸어가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음미할 만한 감정이었다. 다만, 이리도 편리한 세상에 그리도 불편한 루트를 일부러라도 콕 집어, 그 끝에 뭐가 있든 무슨 일이 벌어지든 우선은 걸어보는 게, 어떤 의미에서는 여행의 본질이지 않을까 싶었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개인적으로 아무 것도 안 하고 오로지 푹 쉬어 보기 위한 ‘휴학’이라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어떤 형태로든 매 순간마다 노력과 행위를 강제하고 그 산출값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재앙적 세상이다. 그런 곳에서 별다른 당위 없이 마음껏 쉬기 위한 휴식을, ‘잉여 시간’ 같은 표현으로 격하시키거나 폄훼할 이유란 전혀 없다. 뜬금 없이 휴학 얘기를 꺼낸 이유는, 여행을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정말 한 학기 내내 침대 속에서 틀어박혀 지내는 생활을 영위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재충전과 휴식이 정말로 절실했고, 여행을 통하여 삶의 환기 정도는 가능하겠으나 그 반대급부로 여전히 방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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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여행의 핵심 역시 ‘굳이’다. 조금 더 익숙한 편안함 보다는 훨씬 불편하고도 낯선 곳으로 굳이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이 여행의 결말이, ‘굳이’ 그렇게까지 걸어 다닐 필요란 전혀 없었던 그리니치로의 도보 여행처럼 허무함이나 약간의 후회로 귀결될 수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잃을 것도 없다. 그 잔잔한 평온함에 애써 돌을 던져 파동을 일으키고, 인생이라는 자동차를 누구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으로 핸들을 확 틀어버린것이, 나의 이번 여행이다. 그래서일까, 유난히 이 여행에는 ‘굳이’들이 많다. 그리니치로의 도보 여행은 단지 그 시작이었다. 기차로는 많이 해 봤자 채 이틀이 안 걸릴 거리를 굳이 40일 이상 걸어 다닐 예정이고, 굳이 어마어마하게 불편하고도 위험한 아프리카로 캠핑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웠다. 명색이 경영학과 학생인데, 이토록 연속적으로 ‘비합리적’인 결정들이 이번 여행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행 이후에 내 삶이 조금 더 낫고 멋진 의미들로 충만할 거란 보장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한 번 쯤은 그냥 해보는 것이다. 요즘처럼 매우 편리하게 음원 스트리밍이 가능한 세상에서도 나는 여전히 정규 앨범을 사는 사람이었고, 각종 메신저 어플레이케이션 들이 발달 되어 있지만 중요한 날에는 언제나 손편지를 쓰는 사람이었다. 굳이 애써가며 더 많은 시간과 돈을 들이는, 어떤 면에서는 참 바보 같은 선택지들을 선호해왔고, 여행도 그들과 동일 선상에 있다. 나는 잃을 것 없는 젊음이라는 문구를 믿지 않는다. 인생이라는 마운드에 선발 등판하여, 오로지 배짱과 담대한 만을 지닌 채 공을 던졌다가, 아무리 노력해도 좁힐 수 없는 점수차에 3회 만에 좌절할 수도 있는 일이다. 젊음은 잃을 게 아주 많다. 최악의 경우 한 경기 전체를 내줘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잔존을 위하여 치열하게 싸운 어제와 오늘로써만 기능했던, 그래서 당연하지 않은 내일을 당연하다 우겨대며 준비해야 했던 삶의 일상적 관성에서 벗어나서, 순간순간의 고됨과 고민으로 하루를 만들고, 그 하루들을 매일같이 반복하는 지리멸렬한 과정으로, 그 동안의 평온함과 평탄함은 절대로 줄 수 없던 인생의 또다른 표정을 미약하게나마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바로 여행이다. 그리고 그 문을 여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굳이’에 있다고 확신한다. 어떤 형태로 도래할 지 모를 미래의 상실을 담보로, 조금 더 깊이 있는 삶의 본질에 가까워 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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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거창하게 주저리주저리 적었지만, 사실 이 글은 오늘 아침에 잔뜩 알이 뭉쳐 무겁기 짝이 없는 내 다리를 애도하고, 어제의 삽질을 그나마 변명하기 위해 ‘굳이’ 쓴 반성문에 가깝다. 다리야 미안. 우리가 꽃길만 걸을 운명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Coldplay의 'Up&Up'이다. 기운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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