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잘 어울리는 도시

영국 런던(옥스퍼드)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아주 질 좋고 격조 높은 우중충함

외고 입시를 앞 둔 중학교 3학년 때의 어느 날이었다. 당시의 우리 부모와 나는 몇 시간 동안 말도 안 되는 언쟁을 벌였다. 핵심은 원서를 쓸 때 유학반을 적을 것인지 국내반을 선택할 것인지였다. 나는 대학을 해외로 가고 싶다고 했다. 영어 실력도 그렇게 뛰어나지 못한 주제에, 내게는 영국에서 대학 생활을 하려는 허황된 소망이 하나 있었다. 그게 허황이었음을 몰랐던 게, 내가 많이 어렸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때는 그렇게 영국이라는 나라가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다. 'Water'를 '워러'도 아닌, '훠터'라고 발음하는 나라에서 대학을 졸업한다면, 삶이 영국 왕실의 품위와 고고함만큼이나 풍요로워질 것이라 쉽게 착각했다. 하지만 부모는 국내 대학 진학을 권유했다. 참 되도 않은 소리를 길게도 늘여놓을 수 있는게 사춘기 남학생의 멍청함이었고, 동시에 아둔함이기도 했으며, 또 무모함이었다. 어쨌든 양측의 논쟁 당사자들이 모두 간과한 게 하나 있었다. 유학을 가든 국내로 진학 하든 외고에 합격하지 못한다면 모두가 소용 없는 소리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나는 보기 좋게 불합격 통보를 받았고, 아마 그때부터 내 인생의 실체란 허황과 경이와는 거리가 멀며, 따라서 얄짤 없이 남들처럼 아등바등 수능을 보고 대학 입시를 위해 치열하게 공부해야 할 팔자라는 걸 느꼈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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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한 때는 나의 워너비 대학이었고, 지금도 동경해 마지 않는 영국의 옥스포드로 가는 오늘의 길은 상당히도 설렜다. 물론 그동안의 환상이 깨질까봐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단위 면적 당 술집의 갯수로는 전세계에서 상위권을 다투고도 남을 신촌에 위치한 대학을 다니는 사람의 입장에서, 옥스퍼드라는 대학 도시가 아무리 볼품없고 소박하며 그리 많은 관광거리가 있지는 않다 한들, 서울의 신촌보다는 그래도 훨씬 대학다운 곳일 거라 쉽게 단언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리고 다행히도, 옥스퍼드는 정말 멋진 곳이었다. 아무렇게나 사진을 찍어도 굉장히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는 피사체들이 세상에는 몇몇 있다. 배우 원빈의 얼굴이 그럴 것이고, 옥스퍼드라는 도시가 그랬다. 런던에서의 4일 동안 단 하루만 쾌청했을 정도로 인색했던 날씨는 옥스퍼드에 가는 날이라고 크게 다를 게 없었고, 지독한 안개 속의 고요한 대학 도시를 거닐게 되었다. 그래도 가끔씩이라도 햇빛이 안부 정도는 전하던 런던과는 달리, 옥스퍼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둡기만 했다. 그래서 좋았다. 나는 평생을 한국에서만 거주해왔던 사람이라 영국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존나 영국스럽다'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아주 질 좋고 격조 높은 우중충함이었다. 이런 진짜배기 우중충함은 오히려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마법 같은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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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원과 이나영 주연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영화를 마르고 닳도록 돌려 볼 정도로 감성 지수가 높았던 사춘기 시절에, 나는 부러 구글 등의 사이트에서 영국의 우중충한 사진들을 다운 받아 MP3 등에 넣고 다녔다. 그때는 다소 작위적이었던 감성 허세였지만, 어느덧 그게 습관이 되었고, 그래서 지금은 흐린 날이나 비오는 날씨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으로 거듭났다. 비가 오면 몸에 생기가 도는 느낌이다. 안개가 짙은 날에도 역시 기분은 좋아진다. 옥스퍼드는 근 몇 년 동안 경험했던 날씨들 중에서 가장 흐린 날이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조금은 들뜨기까지 했다. 거의 모든 건축물들은 마치 호그와트에서 본 것만 같은 아주 멋진 모습들이었고, 그게 날씨와 절묘히 조화되어 신비롭기까지 했다. 연말 휴가 시즌이라 그런지 학교에 학생들은 그리 많이 없어 보였고, 그게 안 그래도 조용한 도시를 적막하게까지 만들어 분위기를 더했다. 연휴 시즌의 런던에서만 며칠 있다가, 다소 한산한 교외로 나오니 조금은 어수선하고 복잡했던 마음 역시 차분해지는 듯했다. 이런 휴식처가 도심으로부터 단 한 시간 남짓한 거리에 여러 개 있다는 것이 런던이라는 도시의 또 다른 축복이었다. 이전에 마드리드의 근교인 세고비아나 톨레도로 갔을 때 느꼈던 부러움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한 나라의 수도는 그 중요성과 상징성 때문에라도 필연적으로 끊임없이 첨단 문화들로 개발되고, 발전하며, 또 사람들로 북적거릴 수밖에 없더라도, 그리 오랜 이동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거리의 근교 지역 만큼은 특유의 분위기와 매력을 유지하도록 도시를 계획할 수는 없을까,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옥스퍼드에서 나름대로 '잘 나가는' 곳처럼 보이는 메인 스트리트에서 이런저런 물건들을 구경했고, 살 의향도, 설사 구매했다고 해도 읽을 의사도 전혀 없는 책방에도 들어가 보았다. 옥스퍼드라는 도시에서 옥스퍼드 출판사 마크가 찍힌 책들을 보며, 영어 공부라는 명목으로 내 어린 시절을 괴롭혔던 수많은 악당, 아니 영어책들의 본거지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으며, 새삼 열이 받아 '네 놈이냐' 따위의 시선을 애꿎은 책들에게 잠시 건넸다. 어마어마하게 작은 도시라, 생각 없이 이리저리 걸어도 매 번 한 시간이 채 안 되어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 왔다. 내가 엄청난 길치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곳에서 만큼은 아무래도 절대 길을 잃어버릴 수는 없겠다는 확신까지 들 정도였다. 정말로 길을 잃지는 않았다. 다만 기차역으로 가는 방향을 완전히 착각하여 정 반대로 꽤 걷긴 했다. 뭐 이 정도 쯤이야, 이제는 실수 축에도 못 낀다. 영국은 해가 무척이나 빨리 지는 나라다. 네 시만 되어도 벌써 하늘이 제법 어둡다. 그래서 같은 장소라도 전혀 다른 느낌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쉽게 체감할 수 있는데, 한 바퀴를 돌고 와서 옥스퍼드의 다른 얼굴을 읽는 일 역시 작은 도시에서만 느낄 수 있던 소소하고도 소중한 매력이었다. 옥스퍼드라는 곳은 특히 해가 질 때 훨씬 더 사랑스러운 곳이었다. 신호등만 찍었는데도 사진이 꽤나 멋있게 나와 으쓱할 정도였다. 카메라 필터기능까지 알아서 다 해 주는 친절한 도시가 바로 옥스퍼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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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만 보면 내가 굉장히 근교 작은 도시들의 적막함과 고요함을 사랑하고, 그 소박함에 감탄하며, 번잡하지 않음에 감사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옥스퍼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런던의 명동 같은 동네, '피카딜리 서커스'로 향했고, 거기서의 고층 빌딩들과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광고판들을 보며, 역시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도시 체질이구나, 하는 확신을 한 번 더 느꼈다. 직전까지 옥스퍼드에 있다 와서 그런지 화려한 도시가 또 그 나름대로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역시 사람은, 아니 나는, 정말 간사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물론 그런 화려함에 가끔이라도 치이고 지칠 때면 언제든지 옥스퍼드와 같은 곳에서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는 환경이 다시 한 번 정말 부럽기도 했다. 피카딜리 서커스에는 <레 미제라블>이나 <맘마미아> 등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뮤지컬 등이 절찬리에 공연되는 중이었다. 얼마 전 영화로도 개봉했던 <레 미제라블>의 포스터를 보니 기분이 조금 묘했다. 조금만 늦게 제작되어 올해 한국에서 상영되었다면,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을 비롯한 뮤지컬 넘버들이 민중 가요로까지 거듭나거나, 못해도 700만 이상의 관객들을 모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 싶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모두 무서울 정도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의 끝이 눈 앞에 다가온 게 실감났다. 한국에서보다는 아홉 시간 정도 유예된 나의 나이 먹음을 준비하며, 해피 뉴이어. 이날의 플레이리스트는 김진호의 '안개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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