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2016~2017 세계 여행)
새해에는 조금 더 멋진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
호스텔의 리셉션 직원에게 다가가, 새해 불꽃 놀이를 보려는데, 어디가 전망이 괜찮은지 물어봤다. 그녀는 두 개 정도의 선택지를 주었고, 어디를 가든 굉장히 이른 시간에 가서 아주 추운 날씨를 견뎌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녀가 말했던 '굉장히 이른 시간'은 저녁 9시나 10시였다. 나는 4시 반 부터 기다릴 생각이었다. 한 도시에 오래 머물며, 반드시 해치워야 할 목적지나 당위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건, 이런 중요한 날 선택과 집중을 가능하게 했다. 덕분에 오후 1시까지 취침을 하며 체력을 최대한으로 비축해 놓은 뒤, 며칠 전 그리니치를 가던 길에 구매해놓은 고열량 초콜릿 과자로 열량을 충전했으며, 텀블러에 따뜻한 커피를 듬뿍 담았고, 각종 방한 용품들을 챙겼다. 그 정도면 7시간 이상의 시간도 무난히 기다릴 수, 아니, 견뎌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강한 추위 속에서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니겠냐는 리셉션 직원의 친절한 걱정에, 아니 이보시오 직원 양반, 나는 21개월의 군생활도 견뎐낸 사람이며, 오늘 나는 중무장이 되어있다오, 라는 속마음을 몰래 건넸다. 그건 과도한 자신감이었고, 허세였으며, 그래서 오만함이었다.
우리의 역사는 오만함을 심판하며 발전했다. 히틀러의 잔혹성을 응징했고, 민주주의를 평가절하한 독재자들의 안일함에 경종을 울렸다. 나의 오만함도 피할 수 없이 징벌의 대상이 되었다. 생전 가보지도 않은 템즈 강변의 강바람을 너무 쉽게 생각했고, 따라서 문자 그대로 '얼어 죽을' 뻔했다. 한산한 다리에 저녁 5시 쯤 올라, 봐도봐도 달라질 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강물을 내려다보았고, 그 상태로 얄짤 없이 7시간을 그대로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은 어마어마하게 좌절스러웠다. 1시간이 채 안 되어 나는 이게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빡센 기다림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승열의 <기다림>이란 노래가 있다. 첫 시작이 '미칠 것 같아'이런 구절인데, 이 보다 적확할 수는 없을 듯했다. 가져 온 커피를 마침내 다 마셨을 때는, 기댈 수 있는 따뜻함이란 단 하나도 없었고, 살이 쪄서 바람에 닿는 면적이 넓어진 이 망할 육체를 저주했다. 역시 사람은 언제나 겸손해야 한다. 어쨌든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추위를 대비 하는 데 있어, '충분함'이란 없었다. 다만 끝도 없이 '필요한' 것들만 생각났을 뿐이었다. 강물 아래에는 화려한 유람선들이 떠다니고 있었고, 그 안의 사람들은 겉 옷을 벗고 맥주를 마시는 사치까지 누리는 중이었다. 결혼을 할 수는 있을지, 한다면 언제, 누구와 하게 될 지는 도무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내 신혼여행에서는 밥은 굶어도 유람선은 한 번 타야겠다고 다짐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점점 더 모이기 시작했다. 후발 주자들이 내 등 뒤에 더 많이 도착할수록, 아주 약간의 보람과 성취감에 기분이 조금씩 나아졌다. 그 많은 인파 안에서도, 나는 그 누구로부터 시야 방해를 받지 않고 온전히 불꽃놀이를 다리의 난간 근처에서 즐길 수 있었다. 그건 내가 7시간이라는 엄청난 시간을 기꺼이 지불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런던에 도착해서도 대영박물관이나 내셔널 갤러리 등의 명소를 굳이 갈 필요는 아직도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새해 불꽃 놀이는 조금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당장 남은 20대의 어느 날에 새해를 한국 이외의 국가에서 보내는 내 모습이 쉽게 상상되지 않았고, 그 와중에 영국에서 신년을 맞이하는 건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1일, 자정, 런던 템즈강 불꽃놀이는, 모든 요건이 충족돼야 완전할 수 있는 상품이었다. 그 공급량은 극히 제한적으로 한정되었기에, 가격이 비싸지는 건 경제학 기본 그래프 상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지불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많은 돈을 내거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거나. 근처의 고층 빌딩이나 런던 아이, 혹은 유람선에서 따뜻하게 불꽃놀이를 기다리는 게 전자라면, 나의 선택은 후자였다.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일 지도 모를 런던에서의 신년 불꽃 놀이를 보기 위해, 간신히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다.
불꽃 놀이가 별로였다면, 내가 이럴려고 그 시간동안 기다렸나 심한 자괴감이 들어 마음이 괴로울 수도 있었겠으나, 다행히도 정말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7시간의 기다림에 비해 단 15분이라는 시간은 비교조차 미안할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으나, 그 만큼 강렬했던 불꽃이었다. 자정에 다다를 수록 다리에는 묘한 긴장감과 흥분이 감돌았고, 다리 위의 사람들은 절규에 가까운 함성을 내지르며 신년을 축하했으며, 이윽고 빅벤의 불이 꺼지고 런던 아이로부터 폭죽이 폭발하자 모두가 동시에 '해피뉴이어'를 외치는, 그런 영화같고도 비현실적인 시간과 공간의 문이 열렸다. 뭉클했고, 울컥했다. 그 지난 7시간 동안 한국 안방에서의 연말 시상식이 얼마나 따뜻하고도 훌륭했던 송구영신의 방안이었는지를 동시에 복기했고, 역시 마찬가지로 지난 스무 번 이상의 새해동안 보신각 타종을 보러 나가지 않았던 게 얼마나 기가 막힐 정도로 괜찮았던 스스로의 판단이었는지 감탄했다. 이 정도로 무지하게 춥고도 다리 아픈 기다림이었지만, 기다림에는 무색하리만큼 짧고도 짧은 단 15분 만에, 그리도 따스한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조금은 놀랍고 신기했다. 모르긴 몰라도 새해에는 조금 더 멋진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조금 더 멋진 일들을 위하여 매 번 이런 식으로 기다리고 고생해야 한다면, 그건 좀 사양하겠지만.
런던의 강변에서 그 추위를 뚫고 새해를 기다리는 건 이번 여행에서 정말 손에 꼽을 만한 '반드시 할 일'들 중 하나였다. 모든 것들에 표현 못 할 스트레스와 회의감을 느끼다 그게 마침내 폭발하기 직전에 정말 아릅답게 수놓아진 불꽃을 보며, 이번만큼은 억지와 당위의 가혹함과 못 돼 처먹음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해에는 희망이 깃들기를 바라며, 이날의 플레이리스트는 넬의 'Let the Hope Shine'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