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필스너를 마십시다

영국 런던(브라이튼)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여행의 모든 순간이 불운하거나 불행하지 만은 않을 거야



런던 남부에 위치한 브라이튼으로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 건, 순전한 우연의 결과였다. 우선 계획했던 기상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더 늦잠을 잤다. 예정보다 훨씬 더 빠듯하게 아침을 먹고 씻으려고 했으나, 내 앞에 샤워실을 쓰던 사람은 40분이 넘도록 나올 기미조차 안 보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일정이 한참이나 늦어졌고, 오늘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어제 늦게 잤던 것도, 같은 방을 쓰던 어떤 사람 때문이었다. 열 한 시가 넘은 시각에도 자신의 필요에 따라 불을 켰다 껐다 하며, 모두의 취침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바쁜 아침에 혼자서 샤워실을 독점하던 사람까지. 여행을 오기 전 다른 이들이 내게 걱정 섞인 우려를 보낼때면, 나는 줄곧 거기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답하고는 했다. 확실히 이곳은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그래서 여기서도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들이 존재했다.


12월 31일의 불꽃 놀이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일정들이 즉흥적이었던 그 동안의 습관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구글 지도를 실행한 다음 어디를 가야 하나 고민했다. 오늘은 조금 바닷가를 가고 싶었다. 원래의 계획 역시도 런던에서 세 시간 정도 떨어진 항구 도시로 가는 것이었다. 침대에 누워 런던 지도를 이리저리 보다가, 런던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그러니까 무려 근교라고 부를 만한 지역에 '브라이튼'이라는 도시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 영국의 해안 휴양지로 나름대로 유명한 도시였고, 이곳에서라면 겨울 바다를 볼 수 있겠다 생각하여 부랴부랴 준비했다. 브라이튼으로 가는 열차는 숙소에서 아주 가까운 런던 브릿지 역에서 출발했다. 세상에, 이런 기적같은 우연이! 어제 저녁의 불면부터 오늘 아침 샤워실 앞에서의 기다림까지 이어졌던 나의 짜증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곧 바다를 본다는 기대감으로 벅차기 시작했다. 그리 많지 않은 여행 경험들에서 하나 피부로 느낀 건, 해안 도시는 어지간해서는 중박 이상은 된다는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겨울 바다든 여름 바다든, 바다 여행이 실망스러울 확률은 아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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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튼이라는 이 작은 도시도 기대 만큼이나 훌륭했다. 소박하고도 조용한 마을과 그 작은 골목들을 이리저리 누비며, 여긴 참 매력 있는 곳이라고, 그래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압권은 해질 무렵이었다. 몇 시간 동안 여기저기를 걸어 다니다 마침내 바닷가로 다시 향했고, 거기서 정말 눈부실 만큼 아름다운 광경을 봤다. 일몰이 만들어낸 기가 막힌 수채화였다. 이렇게 굉장한 풍경을 얼마 만에 보는 것인지 가늠 조차 안 될 정도였다. 그래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겨울 바다의 바람을 꽤나 날카로웠지만, 그리 춥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당장 눈 앞에 펼쳐진 일몰이 어마어마하게 멋졌고, 그걸 두 눈으로 담아 내는 것도 벅찼기 때문이었다. 추워할 겨를조차 부족했다.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지명조차 몰랐던 이 도시가 이렇게나 아름다운 곳이었다니. 지난 밤 나의 잠을 깨워댔고, 또 오늘 아침에는 한참을 뻘쭘하게 샤워실 앞에서 진을 치게 만들었던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되려 고마움까지 느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내 평생토록 브라이튼이라는 곳으로 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도 아름다운 일몰도 못 봤겠지. 불행과 불운의 연쇄 작용으로 인한 차선책으로 브라이튼행을 결정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선물처럼 느껴졌다.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 먹냐와 소스를 부어 먹냐 사이의 치열한 논쟁처럼, 여름 바다와 겨울 바다도 사람에 따라 명확히 호불호가 갈리고는 한다. 하지만 오늘 이후로 나는 무조건 겨울 바다라고 대답할 것 같다. 여름 바다를 좋아할 만한 몸매도 못 된다.


해가 완전히 넘어갈 때까지 바닷가의 자갈 밭에 서서 한참을 기다렸다. 날씨가 조금 덜 추웠다면 와인이라도 한 병 사서 천천히 음미하고픈 풍경이었다. 맥주도 좋겠지만, 천천히 조금씩 마시기에는 와인이 조금 더 적합할 테니. 아쉬운 대로 물이라도 마시며, 한산하고도 적막한 겨울 바다가 오늘의 태양에게 보내는 진한 작별 인사를 정말 감동적으로 지켜보았다. 그 여운은 생각보다 길었다. 일몰의 분위기에 취한 나는, 조금 더 그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근처의 펍에 들어갔다. 매 번 흑맥주 기네스만 마시다 여기서는 필스너를 주문했는데, 와, 그 청량감과 시원함, 그리고 목넘김이 직전에 보았던 바닷가의 풍경 만큼이나 예술이었다. 아니 무슨 생맥주가 이토록 향이 좋고 맛있나 싶어 두 모금 정도를 더 마셨고, 내 생의 최고의 맥주가 여기있었구나, 라는 반가움이 들어다. 이제 세상 모든 맥주집들은 가혹하리만큼 확실한 이분법에 따라 나뉠 것이다. 맛있는 필스너를 파는 집과, 그렇지 않은 가게. 이걸 아까의 일몰을 지켜보며 마셨어도 굉장했겠다 싶었지만, 맥주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그렇게나 아름다운 풍광을 방금껏 보고 왔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다 싶을 정도로 맛있는 맥주였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한국에 다시 돌아가면 필스너 전도사가 돼야 겠다고 다짐했다. 똑같은 맥주 한 파인트를 더 주문했고, 정말 기분 좋은 취기를 안고 런던행 기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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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브라이튼은 지난 저녁부터 욕이 나올 정도로 꼬리를 물고 이어진 부정적 에피소드들로 인한 불가피한 선택에 가까웠다. 전 날 기껏 열심히 생각해 놓은 계획이 완전히 망가져버렸고, 그냥 바다나 보자라는 심정으로 아무런 기대 없이 찾아갔던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상상하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일몰과, 태어나서 마신 가장 맛있는 맥주까지, 최악일 거라 예상했는데 실은 최고의 하루였다. 역시 여행은 이런 맛으로 다니는 거지, 라고 생각하며 기차에 앉아 있을 때, 마침 Frances라는 가수의 'Don't worry about me'가 이어폰에서 흘러나왔다. 도대체 이걸 언제 다운 받은 거지 기억조차 안 날 만큼 평소에 쳐다도 안 본 노래였는데, 왜 그 동안 들어볼 생각조차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좋은 노래였다. 마치 여행이 내게 불러주는 응원가 같았다. 어떻게든 잘 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여행의 모든 순간이 불운하건나 불행하지 만은 않을 거라고. 입안을 여전히 감돌던 필스너의 향을 한 번 더 다시며, 음악의 작은 위안에 살짝 흐트러진 마음을 기댔다. 당분간은 무조건 필스너만 마셔야지 하는 강한 결심과 함께. 바다가 정말 아름다웠으니, 이날의 플레이리스트는 헤르쯔 아날로그의 '바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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