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은,
연속된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

영국 런던(노리치)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익숙함에 속아 저 눈부심을 잊고 있었구나

가끔씩은, 운명이 베푸는 과도한 호의를 의심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행운 총량의 법칙이란 삶에서 최우선적으로 기억돼야 할 진실일 지도 모른다. 전 날 이런저런 불운들이 겹쳐 가지 못했던 노리치에 오늘은 일찍부터 부산스럽게 준비해서 도착했지만, 관광지로서는 너무도 척박한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어쩐지, 어제 갑작스럽게 갔던 브라이튼이 어마어마하게 좋더라니. 그 때 마냥 감탄하기보다는 조금은 회의적이었어야 했다. 여행의 신이 나보다 먼저 노리치에 다녀와서 실망하고, 그래서 나 만큼은 뜯어 말리려는 친절이 바로 어제의 브라이튼이었음을 진작 알았어야 했다. 런던에서 두 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가는 중에 창 밖으로 바라 보았던 풍경이 노리치의 어떤 곳보다도 더욱 멋졌고, 괜찮았고, 목가적이었으며, 이전부터 몹시 기대했던 모습이었다. 정작 노리치에 볼 것은 많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성곽에 올라 도시를 바라보았으나, 여행에 와서 처음으로 서울의 낙산 공원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떤 측면에서 노리치는 일찍이 들어왔던 ‘영국스러움’이 꽤나 묻어있던 곳이기도 했다. 먹을 게 많지 않고, 날씨는 지랄스럽고, 명성에 비해 딱히 볼 게 많지 않은 것까지, 여행지로의 이 나라에 쏟아지는 박한 평가들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한 마디로, 괜히 갔다.


문제는 이미 결제해 놓은 왕복 기차 티켓이 꽤나 비싼 가격이었다는 점이었다. 그 정도의 금액이나 지불하고 온 이 도시의 풍경이 겨우 이 모양이라니. 아찔한 기분까지 들었다. 동네를 아무리 걸어 보아도 본전을 되찾을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가톨릭 종교의 영향 때문인지, 유럽에서는 아무리 볼 것 없는 도시라도 성당만큼은 꽤나 웅장하고 멋스러운 자태를 뽐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하필 영국, 그 중에서도 특히 잉글랜드 지방은 가톨릭이 그들의 제 1 종교가 아니다. 그래서 성당 건축물이 다른 도시들에서처럼 발달하지는 못했다. 그 말은 오늘 갔던 노리치에 세워진 성당 역시도 큰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는 소리다. 최후의 보루와도 같던 성당까지 실망스러웠고, 나도 그냥 남들처럼 스톤헨지의 고인돌이나 보러 갈 걸 왜 굳이 여기까지 왔을까, 호스텔 리셉션에 노리치는 어떤 곳이냐고 한 번만 물어는 볼 걸, 망할 구글 이미지들은 왜 쓸데 없이 멋지게 찍혀 나를 현혹했던 걸까, 이곳에서 런던으로 몇 시쯤 출발해야 기차표가 그나마 덜 아까울까, 따위의 생각들로 지루함을 버텨냈다. 그것도 한계가 있으니, 그냥 강가 벤치에 주저 앉듯이 자리를 잡고 깡생수를 마셨다. 하지만 날이 추워서 오래 앉아 있지도 못 할 곳이었다. 이놈의 도시는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20170104_115524.jpg
20170104_120958.jpg

잠시 볕이 비출 때, 비로소 분노가 조금 누그러졌다. 영국처럼 날씨가 변덕스럽고, 그 마저도 대부분은 흐린 곳에서, 가끔씩 보이는 햇빛은 참 반갑다. 맑은 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조차도 해를 보면 상쾌할 정도다. 영국은 오후 네 시만 되어도 아주 어두컴컴할 정도로, 참 인색한 마음씨의 태양과 함께 하는 나라다. 어제 브라이튼에서의 일몰이 어마어마했듯, 혹시 오늘도 해질녘 만큼은 괜찮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헛된 희망이었다. 브라이튼의 겨울바다는 주간 시간대에도 꽤 멋졌다. 거기에 해가 질 때의 하늘이 덧입혀지니 그런 아름다운 광경이 나왔던 것이다. 보정에도 명확한 한계가 있다. 본판 불변의 법칙이기도 하다. 노리치는 일몰의 브러쉬한 번으로 어떻게 좀 만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여행 가이드나 추천 어플리케이션 말고도, 관광 부적격 도시들을 경고하고, 정말로 그곳에 갈 생각이냐고 끊임 없이 물어보는 모바일 서비스가 세상에 하나 정도 있어도 나쁠 것 없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얼마 전 수면용 빗소리 어플리케이션을 다운 받으며, 앱 개발 시장이 정말 포화돼도 지나치게 과포화 되어, 나 같은 사람이 그쪽에 섣불리 발도 못 내밀 거라는 확신을 느낀 적 있었다. 상상할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상상조차 못 할 웹서비스까지 모조리 다 출시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여행지 경고 어플레케이션은 아직 없는 것 같아 한 숨이 놓였다. 만약 정말로 그런 어플을 기획한다면, 나는 노리치부터 조질 것이다.

20170104_144921.jpg
20170104_145505.jpg

아직까지의 여행에서 유난히도 교외 지역으로 향했을 때의 타율이 꽤 괜찮았다. 런던같은 대도시에 있다가 주변부로 가면 다소 한산하고도 적막하며 조금은 낯설기까지 한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남은 여행에서도 꼼꼼한 준비나 사전 조사 없이도 우선 교외라면 기차부터 타고 보는 나쁜 버릇이 생길 뻔했다. 다행히 노리치 덕에 당분간은 교외 지방으로 가는 걸 최대한 조심할 것 같다. 런던이 가까워지며 고층 빌딩들을 비롯한 이런저런 시설로부터의 조명들이 반짝이며 빛났고, 그게 오늘만큼은 새삼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이곳에 꽤 오랜 시간동안 체류하다 보니, 익숙함에 속아 저 눈부심을 잊고 있었구나, 따위의 자책도 했다. 템즈강을 수놓은 인공 조명들이 마치 나를 놀리는 듯했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든가, 혹은 그렇게 교외를 좋아하더니 꼴 좋다, 뭐 이런 시선으로. 그게 조금은 재수없지만, 오늘은 완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권순관의 '우연일까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