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언어를 쓰는 웨일즈

영국 카디프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의외로 참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피어났다.

세 개 이상의 도시를 이동해야 하는 빡센 일정을 자랑하는 장기 여행의 매 순간이 항상 즐겁다는 사람은 분명 둘 중에 하나다. 마조히스트거나, 존나 미친 마조히스트거나. 매일 아침마다 전담 기사가 숙소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금수저들일지라도, 도시간 이동은 그들에게도 역시 정말 괴로운 일일 것이다. 물론 그렇게 다녀보지는 못해서 장담은 못하겠지만. 늘 얘기했다시피, 여행은 굳이 불편한 짓거리를 애써가며 찾아서 하는 일련의 행위들이다. 편한 건 집이 최고다. 살다 보면 조상님들의 옛 말씀들 중 아주 많은 것들이 기성 세대를 옹호하고 변명하는 데 소비되는 듯한 역겨움을 느낄 때가 종종 있지만, 그럼에도 그 중에서도 가끔 진실은 존재한다. 이를테면 집을 나가면 개고생이다, 뭐 이런 것. 에스컬레이터도 설치되어 있지 않은 지하철 환승 계단을 그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오르내리다 보면, 참 지랄도 이딴 지랄은 없겠다 싶은 마음에 휩싸이기 십상이다.


게다가 날씨까지 엉망이라면. 그래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몸도 젖고, 가방도 젖고, 그걸 지켜보는 내 마음도 젖다 보면, 자연스럽게 남은 생에 두 번 다시 배낭 여행을 오면 그때는 내가 진짜 미친놈이라고 다짐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힘든 순간을 사진으로 찍을 겨를 같은 건 당연히 없고, 돌아와서는 여행에서의 아름다운 추억만을 곱씹게 되며, 그러다가 다시 슬며시 고개를 드는 역마살에 완패하고 짐을 꾸리는 악순환을 반복하는 기막힌 알고리즘이 완성된다. 이렇게 세상 만사가 불만스러운 듯한 말투로 여기서 떼를 쓰는 건, 내가 오늘 그 나쁜 기상 환경 안에서 어마어마한 무게의 캐리어를 끌고 런던에서 카디프까지 이동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요즘 도깨비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여기는 영국이라 도깨비가 못 따라온 것 같은데, 저승사자에게는 국경의 제약은 없는 듯했다. 비오는 날, 출근 시간대의 런던 지하철역에서, 오늘 지옥 비슷한 걸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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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표를 끊고 탑승을 해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미리 예약한 차편이 없어서 급할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럼에도 이동은 그 자체로 상당한 스트레스다. 내 캐리어 가방은 너무 뚱뚱해서 좌석 위 선반에 올릴 수도 없었다. 나는 굉장히 소심한 사람이라 혹시라도 가방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여행에서는 방심하는 것보다 다소 경직될 정도로 긴장하는 것이 무조건 이롭기는 하나, 기차에 올라서도 염려를 해야 하는 상황에도 내내 태연할 수 만은 없었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했다. 누군가 내 캐리어를 가져간다고 하면, 무엇이 없어질까. 여권과 지갑, 돈, 그리고 기타 중요한 물품들은 배낭과 주머니에 있으니, 가장 나쁜 상황이 닥치더라도 한 며칠 빈털털이 거지 차림으로만 지내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소 홀가분했다. 이번 여행 최초의 장거리 이동에서, 그것도 겨우 두 시간 남짓만 기차를 타는 이 짧은 순간에서도 가방을 도둑 맞는다면 그건 정말 팔자이리라 하는 해탈의 경지까지도 체험했다. 그 이상, 이를테면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천주교적인 자비 같은 건 당연히 못하겠지만.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가져갈 것도 더럽게 없으니, 혹시라도 자기가 도둑질 해놓고 나를 욕하는 버르장머리 없는 짓만 하지 말라고 그냥 속으로 빌었다. 참 가방 하나 짐칸에 넣으면서 혼자 별 쓸 데 없는 생각을 다 한다 싶었다. 이게 다 여행을 혼자 다녀서 그런 것 같았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되고, 또 신경쓸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건 참 좋은 점이지만, 이런 순간 만큼은 둘이 함께 무거운 짐을 옮기며 전우애적 동질감을 나누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누군가와 함께 부정적인 상황을 공유하지는 못하다 보니, 그저 마음속으로만 툴툴대고 불평불만하게 되며, 괜히 안 좋은 생각들만 거듭했다. 물론 어떤 희망적인 결의를 다지기에는 참 울적한 날씨였기도 했다. 도시를 벗어난 열차가 시골 마을로 진입하고, 창 밖의 거대한 목초지와 그 위에서 풀을 뜯으며 놀고 있는 양과 말 등의 가축들을 보았을 때 비로소 오늘 아침 기상 후 처음으로 긍정적인 기운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저런 거대한 초원에서 동물들이 평화롭게 노니는 광경을 보기 힘들다. 생각해보면 이런 목초지에서 자란 가축들로부터 만들어진 고기가 분명 한우보다 건강하고 질 좋을 게 당연한데, 어찌하여 우리 안에 갇힌 한우 가격은 그렇게나 비싼 것인지도 의문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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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한우가 또 맛있기는 맛있지, 라는 맛있는 녀석들스러운 이상한 결론을 내렸을 때 기차는 웨일즈 지방에 진입했다. 영국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라는 지역들의 연합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잉글랜드 이외로 여행을 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국경을 넘은 것도 아닌데 사뭇 다른 분위기에 조금 놀랐다. 영국 국기 대신 웨일즈 깃발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장 당혹스러웠던 건 언어였다. 러시아 말도, 그렇다고 라틴어도 아닌 것 같은 기묘한 조합의 알파벳 배열이 표지판 곳곳에서 읽혔고, 곧 그게 웨일즈 지방의 언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투리도 아니고 아예 말 자체가 달랐다. 공식적으로도 영어와 웨일즈어는 다른 언어다. 제주도의 혼자 옵서예 정도는 애교같은 수준이었다. 카디프의 거리 표지판 대부분은 영어와 웨일즈어가 병기 되어 있었고, 이게 고작 수도 런던에서 기차로 두 시간 떨어진 지역의 생활상이라는 게 충격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나라도 지역주의는 어마어마하겠구나 하는 추측이 들었다. 얼마 전 스코틀랜드가 분리 독립 투표를 진행한 것도 이제야 납득이 됐다. 이 정도 차이니 한 나라라는 동질감이 안 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굉장히 많은 걸 공유하는 한 나라 사람들끼리도 이런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데,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을 도대체 뭘 믿고 통일은 대박 따위의 되도 않은 뜬 구름 잡는 소리들만 늘여놓고 있는지 몰라 살짝 답답했다.


혹시 영어가 안 통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역시 영국 사람들은 영국 사람들이었다. 내가 본토 원어민들의 영어 실력을 걱정하고 있었다니, 상당히 부끄러웠다. 호스텔의 직원들은 정말 친절했다. 시설도 좋았다. 런던에서와는 너무 다른 가족같은 분위기에 덩달아 마음이 따뜻해졌다. 무엇 때문에 웨일즈 지방의 카디프까지 오게 되었는지 리셉션의 직원이 궁금해했고, 나는 바로 '가레스 베일'이라고 대답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더 많았다. 한국에서는 두 공식 형이 있다, 큰 형은 호날두고 작은 형이 베일이다, 그래서 웨일즈는 작은 형의 나라며 동생으로서 형제 국가에 당연히 방문한 것일 뿐이라는 깊은 의미가, '가레스 베일'이라는 다섯 글자의 대답에 담겨 있었다. 그런 시덥잖은 유머에도 사람 좋게 웃어주던 직원의 너그러움에 감사하며, 이곳까지 오는 데에 소요됐던 고단함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넉넉 잡아 한 시간을 걸으면 대부분을 둘러 볼 수 있을 만큼 작은 도시지만, 의외로 참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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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거리에는 아직까지도 비가 내리고, 사람들은 담담히, 하지만 좀비처럼 비를 맞으며 지나다니는 중이다. 시크한 그들이 멋져 보여 나도 후드 하나만 쓰고 나갔다가 이건 무조건 감기에 걸릴 것 같다는 우려로 한 시간 정도 만에 호스텔로 복귀했다. 런던에 열흘을 머물렀는데도 몸은 여전히 영국 날씨에 적응을 못 하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보는 낯선 언어를 쓰는 지역답게 혹시 날씨도 조금 쾌청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여기도 영국은 영국이었다. 그게 이 나라의 지독한 매력이기도 하고. 여기저기 비가 내렸던 하루였으니,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가을방학의 '곳에 따라 비'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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