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포근함이 깃든 곳

영국 카디프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완벽한 타인들 사이에서 생활하는 자유로움

어제는 정말 경이로운 날이었다. 전 날 맥주를 두 캔 쯤 마시고 잠이 들었는데, 15시간 이상을 그대로 누워서 계속 잤다. 해가 빨리 지는 동네답게, 깨어났더니 세상이 그리 밝지 않아서 순간 아침으로 착각했지만, 곧 어마어마하게 잤던 것임을 깨닫고 경악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면 웃음 밖에 안 나오는 그런 상황이었다. 덕분에 몸은 역시 어마어마하게 상쾌했다. 여행을 쉬엄쉬엄 한다고 그리 무리하지 않고 있었는데도, 그 동안 몸의 피로가 꽤 쌓였던 모양이었다. 15시간이나 자고 났더나 몇 가지 가시적인 변화들이 있었다. 우선 식욕이 회복됐다. 게다가 짜증도 줄었다. 정말 오랜만의 숙면 덕에 몸과 마음 모두 생기를 회복한 듯 했다. 이왕 날려버린 하루 동네나 조금 산책하기로 결정했고, 강물을 따라서 카디프의 공원을 거닐었다. 도시의 발전 수준에 관계 없이 영국 어느 곳이든 충분한 녹지 공원이 있다는 게 참 부러웠다. 텀블러에 담은 커피를 조금씩 홀짝이며, 그 초록을 음미했다.


하룻 밤 사이 왕성해진 입맛 때문에 저녁을 먹었음에도 배고 고팠다. 어쩌지하다가 숙소 근처 마트에서 싸구려 초밥 두 세트를 샀다. 거기에 화이트 와인 한 병을 곁들었다. 생각보다는 괜찮은 조합이었다.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유럽의 마트에서는 술을 정말 싼 가격에 판매한다. 맥주도 그렇고, 와인도 잘 찾아보면 한국 돈으로 5,000원 남짓한 금액에 꽤 괜찮은 한 병을 구할 수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항상 현지 물가를 걱정하지만, 정작 여행 도중에는 그 동안 서울의 얼마나 물가가 미쳐 날뛸 정도로 높았는 지를 깨닫게 된다. 최근에는 소주 한 병 값이 4,000원을 넘는 정신 나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걸 술이라고 그 가격에 팔고 있다니. 정말 장담하는데 우리나라 주류 회사들은 어마어마한 폭리를 취하고 있을 것이다. 맛도 더럽게도 없으면서. 이건 정말 대대적인 불매 운동을 포함한 소비자 운동도 고려해보아야 할 차원인데, 매 번 속수무책으로 그들의 가격 인상에 당하고만 있어야 하니 조금은 억울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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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하다 못 해 넘치기까지 하는 체력으로, 오늘은 카디프 만에 갔다. 도심으로부터는 걸어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바다에는 사람의 마음을 탁 트이게 하는 매력이 있다. 오늘도 그랬다. 천천히 해안가를 걷다 보니 답답했던 무언가가 뻥 뚫리는 느낌까지 들었다. 카디프는 런던에서 고작 두 시간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평균적인 기온은 조금 더 따뜻한 편이다. 따라서 오늘은 무거운 패딩 대신 얇은 후리스 하나만 걸치고 다녔고, 가벼운 옷차림 만큼이나 발걸음도 경쾌했다. 객관적인 척도로 따진다면 미관이 아주 예쁜 바다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독특한 지형으로 물을 감싸는 만의 따뜻함이 있었다. 갈대숲도 존재했는데, 우리나라의 순천만이 생각났다. 이곳을 함께 올 애인이 있다면 참 좋았을텐데, 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하도 오래 자다 보니 몸의 컨디션은 완전히 회복됐는데, 얼마 전부터 찬란하고 쓸쓸하게 마음 속에 자리한 외로움은 가시지를 않는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카디프의 항만을,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미래의 누군가와 손을 잡고 걷는 상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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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색다른 경험이나 해볼까 싶어 작은 배를 탔다. 20분을 유람하는데 3파운드 정도로 꽤 쌌다. 문제는 배 위에 다섯 명이 있었는데 그 중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커플들이었다는 점이었다. 아, 저들처럼, 누군가와 함께 여행의 순간을 공유하며 다니는 것도 나름대로의 축복일 수 있겠다는 마음 역시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졌다. 뭐 그래도 나는 아직 혼자 다니는 자유로움이 좋다. 둘만 돼도 이런저런 상의와 의논, 또 그 안에서 발생하는 감정 노동으로 몸과 마음이 지칠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런 것 없이도 충분히 힘들고 고생하는 게 여행이다. 내게 여행은 도피의 의미가 크다. 현실과 충분한 거리를 두고 비현실의 시간을 살아내는 일이다. 일상에서는 다소 벗어난 어떤 섬으로 방문하는 듯한 느낌이다. 카디프가 런던보다 하나 좋았던 점도 이것이다. 여기서는 아직껏 한국인을 만나지 못 했다. 완벽한 타인들 사이에서 생활하는 자유로움으로 삶이 충만하다. 물론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비포 선라이즈>틱한 로맨스를 기대하기도 한다. 과연 나는 그 결정적인 순간에 낯선 술집에 들어가 와인 한 병을 얻어올 수 있을까. 그 시리즈의 남자 주인공은 우연의 선물을 낚아챌 정도로 큰 그릇의 남다른 사람이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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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일즈의 수도라는 직함에는 걸맞지 않게, 카디프는 참 소박하면서도 작은 도시다. 넉넉 잡아 반 나절이면 도심부터 근처의 해변까지 모두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그렇게 작은 도시임에도 언어는 공식적으로 두 개나 되고, 사람들은 스스로를 영국인보다는 웨일즈인이라 부르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들만의 웨일즈어가 있다는 사실에도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흐린 날이 많고 게다가 기상 상황 또한 상당히 변덕스러운 건 딱 영국의 전반적인 날씨를 닮았는데, 그 와중에도 기온은 조금 더 따뜻하다는 미묘한 차이점도 있다. 이전까지는 그저 무심하게 런던의 모습 만을 '영국'이라 생각했지만, 각 지역들만의 고유한 특색들을 느껴가며 조금 더 정확히 영국을 알아가는 듯하여 소정의 보람도 있다. 이제는 가레스 베일의 축구 경기를 볼 때, 이전보다 훨씬 생생하게 기억할 그의 고향에 관한 추억이 내 삶에도 있다는 게 새삼 감사한 날이다. 이 포근한 햇살 안에서의 따뜻함을 기억하며, 이날의 플레이리스트는 선우정아의 'City Sunse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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