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뮤지컬의 아우라

영국 런던

by Nell Kid
라이브의 감동

버스로 흥한 자, 버스로 망할 뻔한 하루였다. 3일 전 도착했을 때처럼 카디프에는 오전부터 비가 내렸고, 젖은 캐리어의 무게는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버스로 이동할 예정이었고, 길가의 허름한 정류장에서 비를 맞으며 서 있어야 했다. 편의점에서 구매한 샌드위치 하나를 우적우적 씹으며, 그 정도에서 오늘의 고통이 끝나리라 생각했다. 탑승한 버스는 생각보다 더 널찍했고, 핸드폰을 충전할 수 있는 포트가 있었으며, 게다가 와이파이까지 터졌다. 세상에. 이 정도면 오전에 맞은 비 정도는 충분히 감수하고도 남을 만한 호사였다. 그때까지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기차에 비해서는 아주 싼 버스가 그리 불편하지도 않았고, 게다가 조금 여유있게 출발한 덕분에 런던에서도 뮤지컬 관람전까지 약간 시간을 추가로 더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차도 많이 밀리지 않아 예정보다 30분 일찍 런던에 도착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잠깐 침대에서 쉬다 나와도 될 만 한 정도였다. 잠깐 비를 맞은 것 빼고는 참 사랑스러운 하루라는 생각이었다. 본디 나는 어느 정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 오직 무탈하기만 한 하루의 여행 같은 건 기대도 않는다. 하지만 오늘 이쯤되니 뮤지컬 배우들 모두가 갑작스레 감기에 걸려서 오늘의 회차가 취소되는 말도 안 되는 경우 이외에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은 없었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런던의 지하철이 파업에 돌입했다는 걸 알았을 때 우선 1차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지난 열흘 이곳에 있으면서도 대부분의 이동은 전부 지하철로 다녔기에 이 갑작스런 상황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문제는, 나는 오늘 오전까지 카디프에 있었고, 따라서 이 도시의 파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에 관하여는 전혀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배차 간격이 조금 길어지겠지 정도로만 상상했지만, 대부분의 노선이 운영 자체를 안 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 2차 정신 붕괴가 찾아왔다. 서울의 공공운수노조가 파업한다고 시민들의 불편 어쩌구 했던 건, 속된 말로 속 편한 소리였다. 그건 아주 온건하고도 얌전하며, 또 잔잔한 파업이었다. 런던 지하철 파업의 스케일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이 정도는 돼야 불편이니 뭐니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환승 게이트 자체가 철문으로 닫겨 있었고, 나는 그 캐리어를 들고 게단을 수없이 오르 내려야 했다. 그리고 이내 지하철로 숙소에 찾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버스를 찾아 보았는데, 빅토리아 역의 버스 정류장은 A부터 V까지, 20개 이상이었다. 그 광할한 곳에서 A부터 하나씩 찾아 다니다 포기했다. 이게 무슨 보물 찾기도 아니고. 하필 내 노선이 V에 있었던 게 문제였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탔다. 택시 안에서 빨랐던 건 단 두 개 였다. 부지런한 미터기와, 그걸 지켜보는 내 심박수. 아저씨는 일부러 막히는 곳만 골라가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였고, 신호는 우리만 기다렸다는 듯 바로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설마 이건 못 알아듣겠지 하는 마음으로, 아주 작게, '씨발'을 내뱉었다. 다행히 못 들은 것 같았다.


숙소에 재빨리 체크인을 하고, 대충 짐만 풀어놓은 다음 바로 극장으로 향했다. 지하철이 정상 운행 됐다면 당연히 여유를 부렸겠지만, 도무지 낯선 이 버스 시스템 때문에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건 최근의 선택들 중 가장 잘한 것이었다. 런던 중심부로 향하며 도로는 과거 명절의 우리나라 귀성길처럼 꽉 막혔다. 버스들이 죄다 2층이다 보니 움직임이 둔했고, 그래서 더 정체되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지하철 파업의 여파로 사람들이 모두 버스와 자동차를 이용하다보니, 도로는 과포화 상태 그 이상이었다. 오늘 이후로 나는 어지간한 파업에 불평하지 않을 경지에 이르렀다. 보러 갈 뮤지컬은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 한국말로는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아침부터 빗 속에서 한참을 서있다, 런던에 도착해서는 파업때문에 생각조차 안했던 택시비를 지출했으며, 그 정도로 서둘렀는데도 이렇게 도로위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내가 '레 미제라블' 그 자체 같았다. 공연장에 가는 동안 나름대로 설렘을 느끼기 위해 OST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을 듣고 있었는데, 이건 마치 런던의 지하철 운전사들의 합창 같았다. 그들의 요구 사항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좀 들어주지, 이렇게나 무지막지한 파업을 진행하는데, 싶은 심정이었다. 비장한 심정으로 나는 시간을 재차 확인했다. 여의치 않으면 버스에서 내려 극장까지 뛰어갈 생각이었다. 다행히 버스는 그전에 극장 근처에 도착했다. 예매한 표를 찾아서야 안심이 됐다. 이거 하나 보기 위해 행했던 오늘의 고생이 스쳐 지나갔고, 갑작스런 허기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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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저녁을 먹고 입장했다. 극장과 무대의 폭은 좁았으나 앞 뒤 좌석 간 단차가 충분했고, 그래서 밀도 있게 관람할 수 있었다. 우리가 어떤 민족이냐 물어보면, 나는 단연코 덕질의 민족이라 대답할 것이다. 그 민족성에다가, 제도 변경 전에는 선착순 시스템이었던 학교 수강신청으로부터 단련된 손가락 운동까지 더하여, 꽤 괜찮은 중앙 자리를 4만원 남짓한 금액에 얻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레미제라블 오리지널 공연을 보려면 기본적으로 10만원 이상은 각오해야 한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아주 선방한 가격이었다. 거기에 자리까지 꽤 괜찮았다. 무대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조금 시야가 제한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조명이 강할 때는 배우들의 얼굴까지도 가끔씩 보일 정도였다. 뮤지컬 전용 극장이라서 그런지, 음향이 정말 좋았다. 덕분에 배우 한 명 한 명의 사운드가 또렷하게 들렸다. 이게 제일 감동적이었던 포인트였다. 'One Day More', 'Do you hear the people sing?', 그리고 'Epilogue'와 같은 익숙한 넘버들은 표현할 수 없이 좋았다. 원작의 힘이었다. 번안된 라이선스 버전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아우라가 있었다. 곡이 처음부터 영어 가사를 염두하고 쓰였고, 그래서 그런지 음절 하나하나가 위화감없이 잘 어울렸다. CG로 이루어진 실사 영화로 이 뮤지컬을 먼저 접했던 지라, 작은 무대에서는 그 배경들이 어떻게 구현됐을지 걱정 반 우려 반이었는데, 무대 장치들과 조명을 아주 영민하게 사용하면서 전혀 작위적이지 않게 연출되어 정말 놀라웠다. 무엇보다 라이브의 감동이 가장 컸다. 눈 앞에서 배우들이 혼신의 힘을 다 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그 전율은 몇 번을 돌려 본 DVD 영상에서도 전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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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파업의 여파로 아주 지랄스러웠지만, 이번에는 올 때 만큼 짜증이 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가장 마지막의 합창 장면이 계속 귀에서 맴돌았다. 이 정치적 시국에 큰 규모의 파업을 경험하고, 또 혁명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을 보니 기분이 많이 묘했다. 몇 백 년 전의 전근대적 배경을 다루었던 '레 미제라블'의 울림이 여전히도 유효하다는 건, 음악과 공연의 높은 수준과는 별개로 참 씁쓸한 사실이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었지만,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 황홀한 뮤지컬의 감동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울컥할 정도로의 여운이 남은 오늘의 커튼콜은, 아마 평생토록 잊기 힘든 기억이 될 것 같다. 왜 런던에 오면 사람들이 그렇게 뮤지컬 타령을 하는지 오늘 알았다. 타령이 아니라 넋을 잃고 부르다 죽을, 까지는 안 되지만 어쨌든 그와 비슷한 곡을 해도 모자를 감흥이었다. 잠은 좀 덜 좋은 곳에서 자고, 밥도 조금은 질이 나쁜 음식을 먹어도, 혹시 런던에 갈 일이 있다면 뮤지컬 만큼은 꼭 볼 수 있기를, 내가 여행에서 '강권'하는 것들 중 하나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유난히도 당혹스럽고 힘들었던 오늘 하루 뿐만 아니라 최근 몇 년을 이 뮤지컬 하나로 보상 받은 듯했다. 열렬히 박수를 치며 커튼콜의 여운을 곱씹었고, 이럴려고 그 동안을 견뎌냈나 싶은, 그래서 이건 행복이라고 밖에 말 할 수 없는 그런 마음이, 아주 잠깐이었지만 강렬하게 머릿속을 스쳐갔다. 당연히 이날의 플레이리스트로는 레 미제라블 뮤지컬 OST인 'Epilogu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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