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본머스 (2016~2017 세계 여행)
달빛 아래 눈부신 밤 바다
레 미제라블 뮤지컬을 원작으로 본 여운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마리우스를 짝사랑했던 에포닌의 마지막 넘버가 귀를 맴돌았다. 아, 그런 처연함이란. 장발장과 자베르, 마리우스나 코제트 등의 배역을 맡았던 배우들도 참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감동적이었던 건 에포닌과 판틴이었다. 두 사람의 음색을 내내 감탄하며 들었었다. 에포닌이 애절했다면, 판틴은 정말 따뜻했다. 극의 후반부 죽어가는 장발장에게, 'Come with me'라고 노래부르는 그녀는 마치 세상 모든 죄악과 고됨을 지우는 천사 같았다. 숙소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서도 한참을 뮤지컬을 곱씹었다. 유투브를 뒤지며 에포닌과 판틴의 영상들을 새벽까지 찾아보았다. 그 때문에 다음날 아침에 버킹엄 궁전에서 근위병 교대식을 보겠다는 나의 계획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 파업 때문에 캐리어를 끌고 빗속에서 고생을 하고, 장거리 이동에도 별다른 휴식 없이 곧바로 뮤지컬을 보기 위해 강행군의 피로는 생각보다 컸다. 온 몸이 쑤시는 찌뿌둥함과 함께 기상했고, 처음 내뱉은 말은 '교대식을 얼어죽을'이었다. 체크아웃 직전까지 잠을 잤고, 예약한 버스를 타기 전까지 숙소 근처의 런던 브릿지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감상하며 시간을 때웠다.
이번 목적지는 런던 서남부에 위치한 본머스라는 곳이었다. 영국인들에게는 나름 휴양지로 유명한 남쪽 지역의 도시다. 그래서 조금은, 겨울철에 제주도를 가는 것과 비슷한 심정으로 선택했다. 여행이 2주를 넘어가는 이 시점에서, 바닷가 근처 도시에서 약간은 여유있게 쉬어야겠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원래는 본머스 대신 포츠머스라는 곳을 우선적으로 고려했었다. 하지만 런던 여행 이틀차에 찾았던, 토트넘 홈구장 근처의 펍에서 만난 현지인들로부터, 언젠가 대영제국 시절의 위대한 해전 역사에 대해서 '지극한'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면, 포츠머스는 굳이 가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 심지어 그 중 한 명은 포츠머스 근처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포츠머스에 대한 그의 평가는 아주 정직했고 직설적이었다. 그곳으로 여행을 가느니 런던에서 한국까지 수영을 하는 게 몇 배는 나을 거라는 진정성 어린 충고였다. 그렇다면 포츠머스 대신 영국 남부에서는 어디가 괜찮은지 물어보았고, 두 사람 모두 본머스를 추천했다. 구글에 검색해보니 바다도 예쁘고, 또 여름철 휴양지로도 명성이 있어서, 바로 선택하게 되었다. 여름철 휴양지라는 문구에서 포커스는 '휴양지'가 아닌 '여름철'이었다. 굳이 '여름철'을 붙인 이유가 있었다. 겨울철에는 휴양을 위해서는 썩 좋은 곳이 아닐 수도 있다는 숨겨진 의미였다. 이곳이 제주도와 비슷한 점이라면 아름다운 바다와, 상당한 바람이다. 지중해식 기후를 기대했던 내 마음은 와장창 박살났다.
본머스는 이번 여행에서 최초로 1인실을 쓰는 도시다. 여행지에서의 숙소를 정할 때 나름의 기준이 몇 개 있다. 첫째는 가격이고, 둘째는 저렴한 가격이고, 셋째는 그 중에서도 가장 싼 가격이다. 한 마디로 무조건 싼 곳들이 최우선이다. 두 가지 믿음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하나는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아무리 시설이 개판이어도 훈련소보다는 괜찮을 것이라는 사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호스텔을 예약한는 것에도 전혀 거림낌이 없었다. 단체 생활의 가장 극단적 형태를 경험한 사람으로, 그 보다 더 못 한 공간은 세상에 존재하기 어렵겠다는 슬프고도 단단한 확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본머스에는 마땅한 호스텔이 없었다. 오히려 호텔들이 더 저렴했다. 사실 호텔이라기보다는 모텔이나 여관이라고 보는 게 더 적당하겠지만, 오직 나만이 사용할 수 있는 욕실과 화장실, 그리고 침대가 갖춰진 이 정도의 방은 배낭여행자에게는 5성급 스위트룸과 마찬가지다. 호스텔 문화가 잘 발달되어있는 영국이고, 또 실제로도 큰 불편함은 그 동안 못느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1인실에 오니 이렇게 편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이곳이 제주도처럼 따뜻한 휴양지는 못 되더라도, 호텔방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모든 피로를 회복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호스텔의 침실은 공용룸이기 때문에 음주와 취식이 금지다. 그래서 언제나 라운지나 주방에 가서 맥주를 마셔야 했다. 그게 그렇게 불편하다고는 못 느꼈으나, 본머스의 1인실 침대에 누워 맥주를 마시니 천국이 있다면 이 곳이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아주 기분 좋게 맥주 네 캔을 마셨고, 근 2주 만에 처음으로 이어폰을 귀에 꼽지 않고도 별다른 소음 없이 잠을 잘 수 있었다.
이 곳은 전에 방문했던 카디프 만큼이나 작다. 두 시간이면 도시 대부분을 둘러 볼 수 있다. 사실 바다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볼거리가 많은 곳도 아니기는 하다. 게다가 여름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만큼, 비수기인 겨울에는 아주 한산하고도 적요하다. 런던 근교의 브라이튼과 얼마전의 카디프에서 바다를 벌써 몇 번이나 보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고요한 바다는 언제나 색다르고 좋다. 게다가 본머스는 영국에서 본 바다들 중 가장 탁 트인 시야의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바다가 끝나는 지점에는 프랑스 북부가 맞닿아있다는 사실이 새삼 새로웠다. 다 좋았으나, 바람이 너무 많이 불었던 게 문제였다. 때때로 호흡조차 곤란할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었다. 1인실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아주 오랜 시간동안 드라이기로 머리를 손질했는데, 그 노력이 아무 소용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숙소와 바다가 아주 가까웠다. 천천히 걸어도 10분이면 도착할 정도였고, 방에서 조금만 더 쉬다가 일몰 때 즈음에 한 번 더 나오자 하는 마음으로 들어갔다. 가는 길에 맥주 몇 캔을 샀던 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차가운 바람을 맞다가 따뜻한 침대에 누워 술까지 들어가니 슬슬 잠이 왔다. 일어나니 일몰은 무슨. 이미 해는 다 지고 말았다. 귀찮은 마음에 그냥 오늘은 이렇게 잘까 싶었지만, 밤 바다라도 보자는 마음에 아무 기대 없이 옷을 주섬주섬 차려입고 다시 바닷가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말 놀라운 순간을 경험했다. 밤바다가 그토록 운치있고, 파도 소리가 그렇게나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나는 여태까지 몰랐다. 쏴아 쏴아 같은 의성어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 없는 파도의 멜로디가 적막한 바닷가를 가득 매웠고, 한 동안을 넋 놓고 그 소리에만 집중했다. 게다가 밤에는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는지 오히려 낮 보다 훨씬 덜 추웠다. 해안가의 기후에 대해 중학교 언젠가 배운 적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물론 다 잊어 버렸다. 어쨌든 생각보다는 아주 따뜻했던 날씨 덕분에 밤 바다를 온전히 음미할 수 있었다.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라는 노래 때문에 예전부터 밤바다에 대해 막연한 환상이 있었지만, 정작 여수에서든 부산에서든 주변의 조명이 아름다웠지 바다 자체가 그렇게 예쁘다는 느낌은 못 받았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밤 바다의 진가를 제대로 느꼈다. 사람들도 없어서 그 운치가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특히 파도 소리가 정말 좋았다. 레 미제라블의 뮤지컬 음악보다도, 여기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더 아름다웠다. 오죽하면 스마트폰의 음성 녹음 어플로 녹음해서 지금까지 계속 듣고 있다. 빗소리 어플레케이션도 있던데, 파도 소리 어플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하늘에는 거의 보름에 가까운 달이 바다를 비추고 있었다. 듬성듬성 위치한 그리 밝지 않은 가로등들은 겨울 밤바다의 분위기를 더욱 영롱케 했다.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는 어떤 에세이 제목도 생각났다. '우리'가 아닌 '나 혼자'인게 조금 서글프긴 했지만, 밤 바다는 그런 외로움마저도 따뜻하게 안아주고도 남았다.
여행의 감동은 정말 의외의 순간에서 찾아오는 경우들이 많다. 오늘의 밤 바다도 마찬가지다. 그곳에서 그토록 많은 위안과 따뜻함, 또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이런 순간이 언제 어떻게 찾아올 지는 누구도 모르기 때문에, 여행을 하면서 만큼은 아무리 염세적이고 회의적인 나조차도 쉽게 낙담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자다 깨서, 그렇게 귀찮은 와중에도 기어코 옷을 바꿔 입고 바닷가까지 걸어 나갔기에, 이런 벅찬 감흥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은 여행이라는 단어의 메타포같은 하루였다. 분명 여행은 때때로 버거울 정도로 귀찮고, 긴장되며, 또 벅찬 놈이다. 자유 여행일 수록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이 여행에서 반드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저기에 바다가 있으니 일단 한 번 나가보자, 라는 마음과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무거운 배낭과 캐리어를 끌고 여기저기를 다니는 건 때때로 이해 못할 정도의 회의감과 허무함을 주기도 한다. 역시 조금은 지리멸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의 밤바다처럼 뜻하지 않았던 선물이 깜짝 방문을 하는 게 또 여행이고, 그 맛과 보람으로 또 다시 짐을 꾸린다. 물론 사실 이건 당장 내일까지는 이토록 평온한 1인실에서 짐 걱정 따위 일랑 제쳐두고 맘껏 쉴 수 있기에 할 수 있는 호사로운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여행기를 적으며, '나의 여행 플레이리스트'를 작성해보는 취지에서 하룻동안 인상 깊게 들었던 음악을 하나씩 적어보고 있다. 그건 나중에 음악들을 하나씩 들으며 여행의 순간들을 조금 더 생경히 기억해내기 위함도 있지만, 사실 혼자 다니는 여행이기에 음악이나 어마어마하게 많이 듣고 있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그 느낌을 공유해보고 싶은 마음에서다. 어쨌든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넬의 'Moonlight Punch Romance'다. 달빛 아래의 밤 바다가 뭉클하도록 아름다웠던 오늘의 본머스였다. 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