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맨체스터 (2016~2017 세계 여행)
맨유 vs 리버풀, D - 1
여행 중 가장 어렵고도 긴장되는 순간은, 버스나 기차에서 내려 낯선 도시의 숙소까지 찾아 갈 때다. 아무리 구글 지도를 비롯한 각종 내비게이션 어플리케이션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생면부지의 공간에서 무거운 짐을 이끌고 무사히 숙소로 한 번에 도착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도착지에 다다를 수록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른다. 이 곳도 나름대로 선진국이고, 그래서 설마 치안이 불안하겠냐 만은, 모든 것이 낯선 골목들 사이사이로 예약한 숙소까지 향할 때는 설명 못 할 두려움과 무서움에 압도된다. 이는 몇 번을 반복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이번 여행까지 포함하여 해외로 출국한 건 총 네 번이다. 그 중 두 번은 혼자서 떠난 자유 여행이고, 다른 두 번은 동아리에서 운 좋게 중국과 일본으로 갔던 단체 관광이었다. 홀로 다니는 자유 여행의 여유와 독립성은 참 소중하나, 숙소를 찾아갈 때 만큼은 인솔자가 존재했던 단체 관광이 얼마나 편했는 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이동만큼은 주간 시간대에 하려고 노력한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시야가 확보된 밝은 공간에서 첫 걸음을 떼는 게 훨씬 더 마음 편하기 때문이다. 야간에 도착하여 오직 구글 지도에만 의존한 채 숙소를 찾아 내는 건, 흡사 불이 완전히 꺼진 어두운 방에서 오직 촉감만으로 강아지의 견종을 추리하는 것만큼이나 지난한 일이다.
오늘 맨체스터의 버스 터미널에는 오후 9시 반에 도착했다. 런던에서 출발한 지 5시간 만이었다. 인류가 멀쩡한 도로와 자동차를 놔두고도 지속적으로 철도 산업을 함께 발전시켜온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세 시간이 넘어가자 온 몸이 쑤시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 버스의 노선은 맨체스터가 종점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내릴 때를 놓치면 완전히 답이 없는 상황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내 경직되었으며, 버스 좌석 안에서 거친 눈빛으로 불안한 시간을 소비했다. 그 덕분에 다행히도 제 때 하차하기는 했다. 과도한 긴장은 피로로 직결되지만, 그래도 여행에서만큼은 여유나 방심보다는 너무할 정도로의 각성과 경직이 당연 비교할 수도 없을 만한 미덕들이다. 심신이 조금 힘들기는 해도, 재앙같은 참사가 여행 중 발생하는 걸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후 9시 반에야 도착했으니 당연히 주위는 온통 어두컴컴했다. 거기에 보슬비까지 내렸다. 문득 신부님이나 스님들 같은 종교인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짜증을 내지 않느지 궁금했다. 그 분들도 이런 케이스에서는 험한 욕을 뱉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캐리어를 빗길 위로 이끌며 생각했다. 15분 정도를 걸었고, 이윽고 숙소를 발견했다. 한 두 번 헤매기는 했어도 큰 실수는 아니었고, 다행히 생각보다는 무탈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체크인을 완료할 때 즈음에야 안도감이 들며 피곤함이 급격히 몰려왔다.
사실 어제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고, 그 여파가 오늘까지 이어지는 듯했다. 3일동안 편안한 1인실을 쓰다 다시 호스텔로 돌아오니 그 새 몸이 편한 것에 적응했는지, 아니면 잠자리가 갑자기 바뀌어서 그런지, 아주 늦은 시각까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상태로 오늘 아침에는 버킹엄 궁전에서 근위병 교대식까지 보았다. 어차피 체크 아웃은 해야 하고, 버스 출발 시각까지는 시간이 좀 붕 뜨니, 그 사이에 교대식을 구경하고 근처의 하이드 파크에서 반 나절 정도를 때우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그랬듯 그리 맑은 하늘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교대식은 큰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문자그대로 개판, 혹은 새판에 가까웠던 하이드 파크의 호숫가에서 조류들을 구경하던 도중에 비가 한 두 방울씩 내리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제법 많은 양으로까지 불어났다. 런던아, 어쩜 너는 내가 떠나는 이 날 마저도 지랄이니, 싶었다. 문득 어제 새벽 도무지 잠이 안 와 이런저런 영상들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보게 된 도깨비의 한 잠면이 생각났다. 공유의 명대사를 빌리자면, 런던의 날이 나빠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아주 나빠서, 거의 모든 날에 비를 맞았다. 이쯤되니 허탈한 웃음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한국에서 흐리고 비오는 날을 유독 좋아했던 지난 날의 사치스러움을, 런던에서는 거의 날마다 고해성사 하는 중이다. 귀국하면 다른 종교는 안 믿어도 태양신만은 숭배할 수 있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런던을 떠날 때 까지는 그래도 기분이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오늘까지 비를 뿌려대는 런던의 하늘이 다소 야속하기는 했으나, 또 언제 이렇게 이곳에서 마음껏 비를 맞아 보겠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게다가 한 번 더 생각해보니 아슬아슬하게 근위병 교대식은 볼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비가 10분 만 더 일찍 내렸어도 한참을 기다려놓고 완전히 허탙칠 뻔했다. 물론 근위병 교대식은 그리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서양 군인들의 제식을 본 정도의 감흥이었다. 다만 그 짧은 훈련소 수료식 입장을 위해서도 훈련병들을 며칠씩이나 굴려대는데, 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영국 근위병들의 훈련 강도와 군기는 정말 끔찍힌 수준이지는 않을까 하는 서늘한 상상이 잠깐 되었다. 마땅히 볼 건 없었어도, 볼 건 없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했기에 런던에 별다른 아쉬움을 남겨두지 않을 수 있었다. 만약 오늘 교대식을 보지 못했더라면 근위병 이야기만 나올 때마다 열흘 넘게 런던에 있었으면서도 저거 하나 안 봤다는 자책에 시달렸지 싶다. 비록 폭우에 가까운 비를 맞고 오전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지긴 했으나, 어쨋든 가장 중요한 목표였던 교대식이라도 본 것에서 어떻게든 의의를 찾았다. 하지만 전날의 불면부터 누적되기 시작한 피로감이 뜻밖의 비로 상승하고, 맨체스터에 도착하여 극심한 긴장으로 정점을 찍으면서 온통 부정적인 감정들에 포위됐다.
더욱 절망적인 건 이곳에 체류하는 4일 내내 비 소식이 예고되어 있다는 점이다. 날씨 운이 이렇게나 없나 싶다. 그래도 하나 기대되는 것은 내일 이 곳 맨체스터에서 열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의 빅매치다. 호스텔의 직원은 다소 비장해보이기까지 했다. 체크인을 하는 그 짧은 시간에도 내게 '빅 매치'라는 점을 몇 번이나 강조했을 정도다. 조금 더 과장하자면 이 오랜 라이벌 매치를 앞 두고 맨체스터에는 다소 전운까지 감도는 느낌이다. 어쩌면 내일 이곳에서 영국 펍 문화의 정수를 경험할 지도 모른다는 설렘도 있다. 내일 모레부터의 3일 동안 내내 비를 맞고 다닐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조금 갑갑하긴 하다만. 뭐 아직은 닥쳐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은 이쯤에서 접어 두고, 오늘 여행의 플레이리스트는 도깨비 OST인 <Stay with me>로 선곡했다. 물론 전반적으로 참 구렸던 런던의 날씨였지만, 그래도 가끔은 날이 좋아서, 또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혹은 적당치 못할 만큼 때때로는 괴팍하여, 런던의 날들이 눈부셨다. 공유의 이 대사를 들으며 어제 새벽에 괜히 혼자 설렜고, 나도 한 번은 따라해보고 싶었다. 그나저나 저승이가 영국에도 있다면, 하늘에서 자꾸만 비 뿌리는 저 놈 좀 어떻게 데려가주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