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맨체스터 (2016~2017 세계 여행)
잠이라도 많이 자서 괜찮았던 하루
술도 한 잔 안 마셨는데, 아주 잘 잤다. 불면의 또다른 해결책은 극심한 피로였다. 그래서 훈련소에서는 그렇게 훈련병들을 쥐 잡 듯 굴려대는 모양이었다. 잡 생각 못하고 잠이나 자게 하려고. 덕분에 정오가 넘어서야 느즈막히 일어났다. 뭐 어차피 마땅히 할 일도 없긴 했다. 오후에 리버풀과의 축구 경기를 펍에서 보는 정도 밖에는. 내가 묵고 있는 호스텔이 있는 곳은 맨체서터의 또 다른 축구 강팀 '맨체스터 시티'의 홈구정과 훨씬 가깝다. 이 지역 주민들의 선호도도 맨유보다는 맨시티에 조금 더 높은 듯했다. 실은 나도 맨유보다는 맨체스터 시티를 조금 더 좋아하기는 한다. 이게 다 한 시뮬레이션 게임 때문인데, 맨시티가 되면 더 많은 이적 자금으로 원하는 팀을 꾸리는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릴 수 있다. 그래도 현지에서도 관심이 많은 경기인 만큼 올드 트래포드로가서 경기 분위기를 느껴보고자 했다. 그 동안 축구장 근처로 몇 번을 갔지만 오늘 만큼 열광적이었던 때는 없었다. 어차피 나는 경기장에는 들어가지는 않을 거라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는데, 맨유의 목도리를 두른 빨간색 옷의 팬들이 힘껏 노래를 부르며 경기장으로 입장하고 있었다. 조금은 두근거리는 장면이었다.
나는 저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설렘과 떨림을 정말 잘 알고 있다. 꽤 오래된 골수 야구팬이기 때문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야구장이었다. 계단을 올라가 게이트에서 티켓 확인을 한 뒤 눈 앞에 펼쳐지는 녹색 다이아몬드의 전경이란. 그것만큼이나 아름답고도 반가운 인사가 세상에 또 어디있을까. 오늘 올드 트래포드로 들어가는 관람객들 역시 그런 부푼 마음과 떨림으로 입장했을 것이다. 거기에 아주 오래된 라이벌 매치인 리버풀과의 경기 아닌가. 그 기대감을 미약하게나마 추측하다 보니 내가 다 긴장되는 느낌이었다. 원래는 스타디움 근처의 펍으로 가서 한 잔을 마실 예정이었다. 원래는, 그랬다. 여행에서 '원래'가 제대로 지켜지는 일은 정말 드물다. 전혀 뜻밖의 암초를 맞이하는 경우가 꽤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경기 직전까지는 활발하게 영업하던 술집들이, 막상 휘슬이 울리고 나니 영업을 중단했다. 입장 전 시간을 때우려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곳들이었다. 그래도 한 군데는 근처에 있겠지 하는 심정으로 돌아다녔으나, 전멸이었다. 아주 의외의 상황이었다. 잠실에서 LG와 두산이 경기를 하는데, 신천의 맥줏집들이 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경기가 끝나고 사람들이 나오면 그제야 다시 오픈하려나. 하지만 마땅히 있을 곳이 없어진 나는,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이런 날 비까지 잔뜩 맞았으면 많이 억울할 뻔 했으나, 다행히도 아주 약한 비만 내렸다. 이 정도 비는 이제 그냥 그러려니 하고는 한다. 후드도 쓰지 않고, 마치 영국에서 유년서절을 보낸 사람처럼 여유있고 당당하게 빗길의 런웨이를 걷는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어느덧 신체가 이곳 영국에서는 밝은 날을 기대조차 하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어제는 하도 어두울 때 도착하여 잘 몰랐는데, 오늘은 조금이나마 맨체스터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상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런던과 비슷한 곳이었다. 잉글랜드의 도시들은 해안가에 인접한 곳들이 아니면 딱히 런던과 차이가 없다. 맨체서터는 영국 제3의 도시고, 그러니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인천이나 대구 쯤 되겠으나, 그런 인천이나 대구가 서울과 아주 다를 건 딱히 없듯, 여기도 마찬가지다. 본격적인 여행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고 오늘은 경기장만 잠시 다녀왔기에, 조금 더 특별한 감정을 남은 이틀 동안 받을 수도 있기는 하다. 바라건대 말이다. 이전에 스페인을 여행할 때, 도시들마다 분위기가 아주 다르고는 했던 것과는 꽤 대조되는 게 사실이다. 맨체스터 이후에 향할 스코틀랜드 지방이 그래서 조금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호스텔의 와이파이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다. 사실 런던에서의 호스텔이 워낙에 별로였기에 그ㅍ보다 못한 곳이 어디있겠나 싶었지만, 여기의 상태로 별로 멀쩡하지는 못하다. 심지어 사진 업로드에 시간이 몇 배로 걸리고, 성공률도 낮다. 공업 도시라는데, IT가 좋은 곳은 아닌 듯했다. 오늘은 정말 한 게 아무것도 없다. 뭐, 현지 요일이 일요일이었으니, 나도 좀 휴식을 취한 셈 쳐야겠다. 많이라도 자서 다행이었다. 사실 여행기를 적기도 민망할 정도로 한 게 없는 날이었으나, 오후 시간대에 할 게 없어 이거라도 해야 겠다 싶어 글을 적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플레이 리스트는 어떤날의 <오후만 있던 일요일>. 정말 노래 제목같은 날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