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글래스고 (2016~2017 세계 여행)
이번 여행동안 마신 수많은 술들 중 단연 최고
여행이 20일을 넘어갔다. 이전의 여행 같았으면 슬슬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을 때인데, 이번에는 그런 생각 같은 건 전혀 안 드는 걸 보니 확실히 오래 나와있기는 한가보다 싶다. 20일을 넘겼다고 특별한 건 없다. 항상 그 날 그 날의 잠자리와 먹거리, 안전, 그리고 본전 뽑기 등에 열중하느라 바쁠 뿐이다. 오늘은 드디어 영국의 북부 지방에 진입했다. 도시 이름은 글래스고이며, 영국 제3의 도시이자 스코틀랜드 최대 규모의 도시다. 잠깐, 맨체스터도 영국 제 3이었던 것 같은데, 그건 그냥 잉글랜드 제 3이었던 건가. 이 정도로 부족한 고증으로 제가 여행을 다니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쨌든. 그런 규모에도, 글래스고는 스코틀랜드의 수도가 아니다. 다음 일정인 에든버러가, 바로 스코틀랜드의 수도다. 역시 언제나처럼 버스를 타고 맨체스터에서 이곳까지 달려왔다. 맨체스터에서는 4시간 거리인데, 새삼 이렇게 보니 영국이 참 큰 나라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런던에서 맨체스터가 4시간 정도였고, 또 맨체스터에서 글래스고가 4시간이니, 런던에서 글래스고는 버스로 도합 8시간 내외가 걸린다는 이야기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버스로 갈 때의 소요 시간을 생각해보면, 상당한 거리다. 혹시 이 곳도 지난 번 웨일즈에서처럼 제 2의 언어를 쓰지는 않을까 조마조마 했지만(그렇다, 나는 또 이 정도의 사전정보도 없이 여행을 다니고 있다) 다행히 영어 만을 사용하고 있다. 다만 발음이 조금 억세다. 잉글랜드 지방의 악센트보다 훨씬 억세다. 미국에서는 물을 '워터'라고 발음한다면, 런던에서는 '후어터'라고, 이곳 글래스고에서는 '훹텃' 비슷하게 소리낸다.
몇 년 전 스코틀랜드에서 영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 투표가 있었을 때, 이곳 글래스고는 유일하게 독립 찬성 표가 더 많았던 도시였다. 그래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파란색 바탕에 흰 대각선이 교차하는 스코틀랜드 깃발이 여기저기에 펄럭일 거라 생각했지만, 딱히 또 그러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난 번 방문했던 웨일즈의 카디프에서보다도 깃발 보는 건 더 힘들었다. 이 곳 사람들은 스스로가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는 어마어마한 자부심과 자의식 속에서 살아갈 것만 같았는데, 아직까지 그런 모습은 딱히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걸 보며 실제로 한 지역을 직접 방문하기 전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편견과 선입견 속에서 생전 방문해보지 않은 곳을 재단하고 있는지 반성하게 된다. 하긴, 그렇게 따지자면 한반도만큼 위험한 곳이 또 없다. 어쩌다 가끔씩 현지 사람들과 이야기 할 기회가 생겨 코리아 어쩌구를 말하면, 북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비선 실세와 국정 농단으로 대한민국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이들에게 코리아는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노스 코리아' 때문에 전쟁 가능성이 상주하는 위험한 국가다. 막상 한국에 찾아오면, 놀랍도록 팽배한 안보 불감증에 아마도 충격을 받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글래스고에서도 숙소는 싼 곳을 선택했고, 내부의 시설과 청결도 같은 건 이미 포기한 지 오래이지만, 생각보다 깔끔하고 지리적으로도 괜찮아 아주 만족 스러웠다. 마음을 비우고 살면, 가끔은 이런 좋은 일들이 일어난다.
글래스고를 저녁에나마 조금 돌아다녔는데, 첫 인상으로, 이 곳은 꽤 고풍스러운 도시다. 우선 건축물들이 그렇다. 딱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들이 줄지어 있고, 어쩐지 역사와 전통이 깃든 것만 같은 분위기를 뽐냈다. 사실 이건 공업 도시 맨체스터와 해안 도시 본머스에서 근 1주일 이상을 보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맨체스터에서도 꽤 오래 돼 보이는 건물들이 있기는 했으나, 거의 20일 정도를 영국에서 체류하다 보니 이제 그만한 옛스러움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글래스고는 뭔가 조금 달랐다. 한 마디로 하자면, 즐겁게 걸어 다닐 만 한 도시 같았다. 영국 제 3의 도시라지만 그렇게 크기 자체가 넓지는 않고, 그래서 이 곳도 그리 긴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한 바퀴는 무난하게 돌 수 있을 만하다. 하지만 항구와 이어지는 꽤 큰 강이 있고, 오래됐지만 나름 멋진 다리도 놓여 있으며, 분위기 자체도 조금은 색다르다. 그걸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수는 없겠으나, 굳이 표현하자면 '후어터'와 '훹텃' 정도의 차이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르긴 다르다는 소리다. 그건 아마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이곳을 돌아다니며 알아보아야 할 것 같다. 아침에 조금 여유를 부리다 제대로 씻지도 못한 상태로 버스를 타고 4시간을 달려왔더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여행지에서 양껏 시씻는 게 어렵다고는 하지만, 이건 좀 심하다 싶어 짐을 풀자 마자 바로 샤워를 했다. 수압과 온도가 그리 나쁘지 않아 기분이 한 번 더 좋았다. 더불어 맨체스터에서의 호스텔이 얼마나 지독하게 구렸는지 한 번 더 느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스카치 위스키였다. 이 곳 스코틀랜드에서 위스키를 첫 시음하기 위해 그 동안 배부른 맥주만 마셨다, 는 물론 거짓말이고, 값이 싸고 맛도 나쁘지 않은 맥주도 정말 사랑스럽고 좋았으나(라고 말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러나'다. 영국은 맥주 물가도 비싼 편이다.), 그래도 스코틀랜드까지 왔는데 위스키를 안 마셔볼 수 있나 싶어 검색까지 해서 술집을 찾아갔다. 20일이 넘는 여행기간 동안 음식점 한 번 검색 안 해 본 이력 치고는 상당히 이례적인 날이었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고, 많이 먹으면 두 끼 아니면 한 끼 정도로 생활해 오다보니, 술 한 잔을 마시겠다고 구글맵을 실행시켜 여기저기를 찾아 다니는 게 나조차도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게 찾아간 바의 이름은 'The Pot Still'이었다. 음, 뭔가 문학적인 제목이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팟 스틸(Pot Still)은 위스키나 브랜디를 증류하는 데 쓰이는 증류기를 뜻한다고 한다. 세상에, 가게 이름부터 이렇게 알코올 냄새가 풀풀 나는 술집이라니. 뭔가 이름부터 신뢰가 가는 곳이었다. 바에 자리를 잡고, 어떤 것을 주문할지 물어보는 직원에게 아주 장황한 이야기를 늘여놓았다. 오늘이 내 인생에서 스코틀랜드 첫 날이고, 나는 스코틀랜드가 위스키로 유명하다는 걸 예전부터 알고 있어서, 이번 기회에 한 번 맛을 보고 싶은데, 그런데 위스키가 처음이라 어떤 게 좋을 지 모르겠고, 그래서 혹시 추천해줄 수 있겠냐는, 그런 소리를, 사실은 마지막 문장만 했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조금 더 절실한 이미지를 풍겨내고자 작문에 가까운 영어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추천을 받은 위스키는 싱글 몰트 종류중 하나인 탐나불린(Tamnavulin)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생의 첫 위스키를 시음했다. 우선 향을 맡았다. 아, 이 은은함. 혹시 영화 <향수>에서의 향이 이런 종류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이건 물론 양주는 다 맛있다라는, 주류에 있어서의 사대주의적 선입견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향은 정말 대단했다. 앙증맞게 생긴 위스키 잔의 줄기를 엄지와 검지로 잡고, 살짝 한 모금 입에 물었다. 그리고 입 안에서 위스키를 이리저리 굴리며 혀 전체의 표면에 술이 닿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아까는 오직 코로만 맡았던 위스키의 향이 아주 훌륭한 풍미가 되어 입 전체에 퍼졌다. 그리고 목구멍으로 술을 삼켰고, 독주 특유의 날카로운 촉감이 조금 느껴질 때 쯤, 코로 숨을 쉬자 위스키의 향이 코와 입 전체에 번졌다. 순간 느꼈다. 사람이 돈을 버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중 하나는 싸구려 소주 대신 이런 좋은 술을 집에 쟁여두고 마시기 위함이었다. 그 자체로 정말 맛있고 향이 깊어, 굳이 위스키 워터나 얼음을 넣어 중화시킬 생각조차 안 들었다. 달콤함인데, 그게 마냥 달기만 한 것도 아니고, 다소 상큼하기까지 한, 그런 깊은 맛이었다. 총 세 잔을 그 자리에서 마셨다. 위스키가 원래 이렇게 맛있는 술인지, 아니면 유독 스코틀랜드 이 지방의 것이라서 더 깊은 향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번 여행동안 마신 수많은 술들 중 단연 최고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숙소로 도착하자마자 옷도 안 갈아입고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산지인 '하이랜드'로의 관광 일정을 알아 시작했다.
생각보다 너무 볼 게 없는 맨체스터였고, 또 생각보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지난 3일 정도는 대부분의 시간을 휴식을 취하는데 사용했다. 어느덧 여행도 20일 넘어갔고, 그래서 조금은 감동이 시들해지고 또 약간은 지루해질 때 쯤,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서 심지어 첫 날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기분 좋은 활기와 생기를 약간이나마 되잧았다. 고풍스런 건물들도 좋고, 또 숙소 앞에 흐르는 강도 참 마음에 든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오늘 마신 위스키의 첫 모금이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어주는 듯했다. 잘 때 옆에 두고 냄새만 맡더라도 꿈속에서 피터팬과 팅커벨을 만나 네버랜드로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향이었다. 하루를 마무리지으며, 당장 다음 날의 음주가 기대되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굿나잇, 위스키. 좀 촌스럽지만, 그렇게도 맛있는 걸 어떡하리. 그래서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전람회의 '취중진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