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텔, 호스텔, 오 호스텔

영국 글래스고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사진 찍을 재미가 있었던 날

싱글 몰트 위스키 세 잔으로 굉장히 기분 좋은 글래스고의 첫인상을 안았으나, 역시 잠자리의 변화로 인해서인지 쉽게 잠에 들지는 못했다. 어느 정도 낯선이들의 코골이에는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어제는 거의 4중주에 가까웠다. 군대 기상 나팔로 써도 손색 없을 만한 울림퉁들이었고, 불행하게도 조금 늦게 잠이 들었다. 호스텔이 이런 면에서는 참 별로다. 물론 호스텔이 별로인 걸 굳이 찾자면 한 두 가지가 아닐테지만, 아무리 못해도 군대보다는 낫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다니고 있기에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처음에 여행을 올때 상상했던 가족같은 분위기와, 서로 술을 한 잔 씩 마시는 문화는 여태껏 별로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거나 방해하는 이들 역시도 별로 없다. 전자의 낭만보다 후자의 '덜 불편함'이 내겐 훨씬 더 중요하다. 그래 뭐, 코를 고는 것도 의도한 건 아닐테니까. 그래서 고의가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거슬리고 짜증이 나는 건 그걸 인지하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이어폰까지 뚫고 들어오는 그들의 합주 소리에, 이윽고 인터넷 검색창에 코골이 원인이나 코골이 치료법까지 찾아봤다. 도대체 어떤 어마어마한 인체의 신비로 저딴 소리가 나오는지 궁금했다.


단체 생활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숙면을 취하는 건 상당히 어렵다. 아침이 되면 또 나름대로 북적북적하면서, 늦잠을 자려고 해도 깰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랬다. 2층에서 짐을 내리는 소리, 샤워하는 소리, 머리를 말리는 소리 등등. 굳이 알람을 설정하지 않더라도 이른 시간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것도 호스텔 투숙객들을 비난할 건 못 된다. 나도 체크아웃을 해야 하는 오전이나, 어디를 반드시 일찍부터 준비해야 하는 아침에는 그런 부산스러움으로 사람들을 깨우곤 한다. 다인실 호스텔에서 숙박을 취하는 이상, 이건 숙명같은 일이다. 피해의 이어달리기랄까. 언젠가 본의 아니게 피해를 끼친다면, 또 다른 날에는 본의 아닌 피해를 입는다. 이것들이 모두 본의 아니기에 호스텔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 다들 알고 있는 것이다. 인내심이 극히 낮은 사람이라면 호스텔에서의 생활이 많이 힘들 수도 있다. 그래, 인정하자. 사실 이건 내 얘기다. 알고는 있어도, 내 인내심이 그리 강한 편이 아니기에, 남들에게 폐 끼쳤던 지난 날은 생각 못하고 혼자 속으로 온갖 불평불만을 해댄다. 어차피 물론, 속으로 투덜댈 수밖에 없다. 영어 실력이 그리 유창하지도 않고, 또 기본적으로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서양 사람들한테 어떻게 어찌어찌 개겨 볼 엄두도 안 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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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찝찝하고도 불쾌하게 시작한 하루였지만, 글래스고의 고풍스러움은 그 짜증을 어느 정도 해소해주었다. 언제나 그랬듯 오늘 역시도 별다른 준비와 검색 같은 건 하지 않고 호스텔을 나왔고, 길이 여기 있고 발길이 그곳에 닿으니 나는 걸을 뿐이다 하는 심정으로 방랑을 시작했다. 대충 이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한 시간 이내에 어느 정도의 견적이 파악 된다. 꽤 재밌게 다닐만 하겠다 싶은 도시가 있고, 지지리도 볼 것 없구나 싶은 도시가 있다. 다행히 글래스고는 전자였다. 특히 잉글랜드 지방에서는 여태껏 못 보았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오늘 잔뜩 누릴 수 있었다. 글래스고 대학쪽이 위치한 구 시가지 비슷한 곳으로 걸어갔는데, 건축물들이 아주 예뻤고, 옥스퍼드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유럽스러움'이었다. 여기서의 '유럽스러움'이란 독일의 대성당이나 해리포터 속 호그와트 건물들처럼 딱 봐도 오래돼 보이는 고딕 양식의 웅장함을 지칭하는데, 잉글랜드 지역에서는 이를 느껴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지방의 글래스고로 넘어오자, 이 색다른 느낌의 건축물들이 아주 많았고, 그것이 주변 지형과 잘 어우러져 꽤 괜찮은 광경을 자아냈다. 스코틀랜드 지방은 잉글랜드 지역보다 산이 더 많다. 그래서 오늘도 글래스고의 꽤 많은 언덕들을 오르내려야 했다. 건축물들은 그렇게 불규칙하고 울퉁불퉁한 지형을 따라 건설되었다. 따라서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사진을 찍는 맛이 있었던 날이었다.


한국의 대학교들은 방학이겠지만, 여기는 학기 중인 모양이었다.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여기저기 왕래하고 있었고, 나도 그 틈에 껴서 돌아다녔다. 몰래 강의실을 엿보기도 하고, 이 건물에서는 뭘 가르치나 쭉 훑어보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아담 스미스 비즈니스 스쿨'도 발견했다. 스미스 아저씨랑 글래스고 대학이 무슨 관계인가 싶어 찾아보니, 그가 14살 때 글래스고 대학에 입학했었다고 한다. 14살에 대학이라니. 역시 위대한 경제학자는 떡잎부터 달랐다. '보이지 않는 손' 같은 개념은 아무나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문득 경제학 원론을 듣던 대학교 1학년 시절이 생각났다. 매일마다 1페이지 리포트를 써야 했던 수업이었다. 잠시 그가 원망스러웠다. 오 아저씨, 아저씨 때문에 경제와 경영학을 택한 후대 학생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 아시나요. 아무리 봐도 보이지 않는, 그런 보이지 않는 손을 보느라 그 시절 제가 얼마나 힘들었다고요. 당신의 보이지 않는 손이 제 대학 생활을 망쳤, 아니, 공부는 안 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따져봤자, 14살에 대학에 입학한 그의 입장에서는 그게 왜 어려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겠지만. 탁 트이지는 않아도, 산과 언덕을 따라 굽이굽이 위치한 학교가 제법 운치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의 대학생들은 뭔가 '참 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분명 나도 그들도 같은 대학생들인데, 뭔가 그 자유로움과 당당함에 주눅이 드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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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학교의 미관도 자부심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재건축이니 뭐니 하면서 막대한 재정을 들여 있던 건물들을 다 부수지만 말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유서있는 건축물들을 건축, 유지, 보수, 재창조해내려는 노력이 학교마다 필요할 듯했다. 혹시 아는가. 내 손자의, 손자의, 손자가 대학에 다닐 때 즈음에는, 굉장히 전통있는 학교가 되어 있을지. 물론 산업화 시절에, 미관은 무엇이고 예술은 또 무엇이며, 건물이란 그저 사람들이 출입만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졸속으로 지어진 강의동들이 유지, 보수, 재창조 될 가치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참 이런 걸 보면 답답할 때가 있다. 진작 그 때 이런저런 요소들을 사려 깊게 고려하고 건축 디자인에 임했다면 지금쯤이면 꽤나 전통있는 건물들로 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뭐, 학교의 주인이 학생들은 아니라는, 그런 왜곡되고도 독점적인 주인의식을 가진 몇몇 교직원들에게 기대하기는 확실히 벅찬 요구이기는 하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잠시 호스텔 방으로 돌아왔는데, 자꾸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코를 고는 것은 아니고, 남녀가 진하게 키스하고 있는 소리인데, 살다살다 이젠 이런 거까지 듣고 앉아 있어야 하나 싶은 자괴감으로 몹시 괴롭다. 이건 '본의 아닌' 소리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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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호스텔들은 대부분 남녀 공용이고, 그래서 처음에는 무척 놀랐고, 이후에는 혹시라도 내게 운명같은 별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싶었지만, 이렇게 무난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무난하기 그지없는 호스텔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저것들은 지금 뭐 하는 거지. 키스 소리는 확실한데, 괜히 고개를 돌려서 확인했다가는 서로 민망한 상황만 연출될 것 같다. 게다가 저기는 두 명이고, 나는 혼자다. 쪽수로 2대 1. 나는 그저 고개만 살짝 돌릴 뿐이지만, 괜히 눈치 없고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다. 마이너리티의 비애를 이 곳에서 이런 식으로 느끼게 될 지는 몰랐다. 그들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의 작음 움직임으로, 이어폰을 한쪽씩 꼽았다. 청춘이야 청춘, 아주 좋을 때야. 그런데 나도 청춘이고, 나도 좋을 때인데, 왜 저런 소리나 듣고 있어야 하는 건가. 아무튼, 오늘 촬영했던 글래스고의 고풍스런 모습들을 보며 마음을 다독여야겠다. 7개의 2층 침대, 총 14명이 한꺼번에 들어올 수 있는 이 빽빽하고도 불편한 공간에서, 서로 뜨겁게 젊음을 건네는 내 등 뒤의 연인들을 응원하며.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브로콜리 너마저의 '이웃의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다.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존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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