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글래스고 (2016~2017 세계 여행)
여행이 아니라면 도무지 느낄 수 없는 감흥들
숙소를 옮겼다. 글래스고 도심 한복판과 아주 인접했던 곳에서, 다소 한산한 교외로 바꾸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은 원래 예약했던 호스텔의 체크 아웃 날짜가 다가왔기 때문이고, 둘째는 글래스고가 생각보다 괜찮은 곳이라 며칠 정도 더 머무르고 싶었으며, 셋째는 그런 와중에 원래의 장소보다 더욱 싼 곳을 발견했기 때문에, 오늘 아침 이동을 했다. 오케스트라에 가까웠던 코골이 소리와, 등 뒤에서 자꾸만 들리던 은밀한 사랑의 소리들을 제외하면, 원래의 숙소도 그리 나쁜 곳은 아니었다. 호스텔 치고 라운지나 주방이 없어 간단한 커피조차 끓이지 못 한 게 아쉽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깔끔했고, 샤워실과 화장실이 방에 붙어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와이파이가 아주 많이 훌륭했다. 새로 바뀐 숙소도 나쁘지는 않다. 도심과는 조금 떨어져있지만 글래스고 대성당과는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고, 무엇보다 오직 5명이 한 방을 쓴다. 직전의 숙소에는 14명이 북적거렸던 것과 아주 비교된다. 자연스럽게 깔끔하고, 모처럼 만에 2층 침대가 아닌 1층 침대를 배정받았다. 다 좋은데, 여기는 또 와이파이가 구리다. 기어코 완벽하지는 못한 숙소들의 모습이 이제는 다소 귀여울 지경이다.
여행이 어느덧 25일째를 맞았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현재 진행 중인 무언가의 의미를 적확하게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모두 다 지나고나서야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파악하고, 미약하게나마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25일. 한국으로부터 꽤 길게 나와있던 것 같은데 크게 보면 아직 도입부라는 게 조금은 신기하다. 교환학생이나 파견 등의 경우들을 제외하고, 내가 해외에 이토록 오래 나와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온 연락들을 보면 아직도 영국이냐 묻는 사람들이 많다. 아직도 영국이다. 역산하여 180일 동안 최대 90일을 무비자로 체류할 수 있는 쉥겐 협약을 맺은 국가들의 특성상, 영국에서 충분히 머무르지 않으면 자칫 나중에 비자 문제 때문에 일정과 머리가 복잡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영국은 여행지가 아닌 체류지에 가까운 느낌이다. 요즘은 체류형 여행이 유행이라고 보니, 굳이 카테고리를 나누자면 저렇게 붙일 수 있겠고.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지는 것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절대로 현지인은 아닌 지라, 여행자와 체류자 사이의 애매한 경계를 매일같이 넘나들며 살고 있다.
어제는 비누를 샀다. 한국에서 가져 온 바디워시가 다 떨어졌고, 그래서 주위 대형 마트에서 1파운드짜리 도브 바디 샤워를 구매했다. 이 때 느낌이 조금 묘했다. 그 동안 한 번 도 여행지에서 이런 생필품들을 구매해본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 가져간 것들을 크게 무리하지 않고 사용하다 보면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첫 샤워를 했는데 몸이 다소 가렵기에, 혹시 내가 영어를 잘못 읽어 개 샴푸를 샀던 건 아닐까 하여 놀란 마음에 다시 확인했는데, 다행히 사람들이 쓰는 도브 바디 워시가 맞았다. 두 번째 샤워에서부터는 가려움도 없어졌다. 내심 피부트러블이면 어떡하나 걱정도 되었는데 한 시름을 놓았다. 비누를 사고, 마실 물을 사고, 또 기타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하며 현지인의 느낌을 내다가도, 또 무언가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영락 없는 여행자의 신분으로 돌아온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주는 긴장과 낯섦, 떨림, 또 두려움 등의 감정들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충분히 느끼고 있다. 호스텔 생활에서의 다른 어려운 점은, 손 빨래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전에 작은 호텔들에서 체류할 때는 양말이나 속옷 등은, 물론 사실 그래서는 안 됐긴 하지만, 어쨌든 방 안의 욕실에서 빨래 비누로 빨곤 했었는데, 공용으로 써야하는 호스텔에서는 그게 안 된다. 그러자고 그 때 그 때 빨래를 맡기기에는 돈이 아까우니 어느 정도 모아두었다가 돈을 내고 빨래망을 건네는데, 그 때까지의 빨래들을 이동하는 내내 가방 속에 박아 놓고 다니는 것도 고역들 중 하나다. 오늘 샤워를 하고 나니, 돈을 내고 빨래를 맡겨도 그리 아깝지는 않을 만한 양이 쌓이게 되었다. 드디어 저것들을 씻길 수 있다는 생각에 내가 다 상쾌했다.
새 호스텔 방의 또 다른 장점은 책상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개인용 책상은 아니지만, 지금은 쓰는 사람이 없길래 내가 바로 차지했다. 창가 건너편에는 현지 시각으로 겨우 오후 4시임에도 서서히 해가 지고 있다. 해가 짧고, 밤은 긴데, 그렇다고 밤에 마땅히 할 게 많은 나라는 또 아니다. 그래도 여기 호스텔에는 작은 라운지와 주방이 있어 간단하게 맥주 한 두 캔 정도를 사와서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해보면 여행의 즐거움은 이토록 별 거 아닌 소소한 곳에서 잉태된다. 그게 또 삶과 크게 다를 것은 없어, 인생에서도 이게 행복이지 싶은 순간은 그리 거창하지 않은 곳에 있는 때가 많다. 삶이 워낙 길고 방대하기에, 우린 다양한 메타포들로 인생을 비유한다. 삶은 야구일 때도, 여행일 때도 있다. 삶의 축소판이 녹색 그라운드나 여행길 위헤 펼쳐져 있다는 의미고, 그 안에서 다시 인생이라는 큰 개념에 해당하는 의미들을 도출해낼 수 있다. 여행 중에서도 편도 여행은, 조금 더 인생의 실제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언제 끝이날 지 모르고, 또 어떻게 흘러갈 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당장 이 여행의 계획 조차도 아주 옅은 그림만 있을 뿐이다.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해도 뜻하지 않았던 일들에 항로가 변경되는 것 역시 인생과 여행의 중요한 접점들 중 하나다. 한 번도 발을 들여보지 않은 곳으로 떠나기 전에, 나는 항상 구글 오프라인 지도를 다운 받고, 숙소까지 가는 길을 몇 번이나 확인하며, 그 와중에 여권이나 지갑, 그리고 노트북과 같은 가장 중요한 물품들은 아주 경직된 상태로까지 늘 소지하고 있는다. 하지만 그렇게 꼼꼼히 오프라인 지도를 살펴보아도, 막상 현장에 도착하면 어느 정도는 헤맬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길을 찾을 수 있는 여행은 패키지 여행 말고는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여행은 낯선 곳에서 굳이 길을 헤매겠다고, 짐을 싸서 돌아다니는 행위다. 막상 이 행위가 이루어지는 순간에는 낭만이나 로망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숙소까지 안전하게 도착하겠다는 기원과 결심만이 나를 추동할 뿐이다. 생각해보면 여행에서 가장 로맨틱한 순간은 출국하는 공항에 도착해서 수하물을 맡기고 티켓팅을 끝마쳤을 때 까지다. 비즈니스나 퍼스트 클래스를 타지 않는 이상, 기나긴 줄의 출국 심사부터 설렘과 낭만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렇게 길을 잃고 헤매다가도 목적지에 도착하면, 성취감보다는 이제 됐다는 안도감이나 이걸 왜 이렇게까지 돌아왔지 싶은 회의감이 먼저 든다. 무거운 배낭과 더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여기저기를 다니는 데 지치지 않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모든 걸 감수하고서라도, 여행이 아니라면 도무지 느낄 수 없는 감흥들이 분명 있다. 그건 정말 임의의 순간에 찾아온다. 어쩌다 마신 술일 수도, 무심코 방문했던 골목일 수도, 그리고 지금 창 밖의 한산한 풍경도 모두 그렇다. 생가해보면 스코틀랜드에 도착한 이후로는 아직까지 비를 맞은 적이 없다. 대부분의 시간이 그리 편하지 만은 않았고, 그래서 누군가가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선뜻 그렇다고 얘기하지는 못하겠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그래서 우연같지만 내가 여행을 떠나오지 않았다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그런 순간의 선물들 때문에, 여행을 원하고, 또 다닐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한 사건이나 경험이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성장에 자양분이 된다는 신화적 이야기 따위는 전혀 믿지 않는다. 선후관계 정도는 될 수 있어도, 무작정 인과관계로 묶어버리는 일은 오히려 폭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 여행에서 무슨 커다란 교훈을 얻어 더 나은 인간으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도 역시 없다. 다만 일상에서는 둔감할 지라도, 여행 중에서는 감수성만큼은 간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살아가며 아주 가끔씩 찾아오는 작은 기쁨에도, 이 맛에 인생을 사는거지 싶은 그런 소소한 예민함 역시 잊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굳이 애써가며 길을 헤매는 이 여행을 위하여, 좋아서 하는 밴드의 '길을 잃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