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글래스고 (2016~2017 세계 여행)
한 도시의 모든 기억들이 그리 쉽게 휘발되지는 않기를 바라며
나의 친애하는 이어폰이 순직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만의 MP3를 처음으로 가진 이후 10년 이상 여러 이어폰들의 생사를 지켜보고 있으나, 이들과의 작별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어쩐지 내가 모조리 다 잘못한 것만 같다. 한 이어폰이 그 생을 다할 때마다, 나는 무한한 죄책감을 느낀다. 내가 그렇게나 함부로 사용했었나, 아니면 주머니에 막 집어 넣었나, 혹시 이어폰 잭을 빼고 낄 때 너무도 사려 깊지 않게 행동했던 건 아닐까. 오른쪽 부분이 말썽이었다. 차라리 아예 안 나오는 것보다 더 신경이 거슬리는, 들렸다 끊겼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어폰이 내뱉고 있는 마지막 호흡은 거칠었고, 그래서 퍽 슬펐다. 조심스럽지 못한 성격 때문에 내 이어폰들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다. 그 와중에서 오늘까지 사용했던 이어폰은 꽤 긴 시간동안 나와 함께한 친구였다. 특히 혼자 여행을 할 땐, 이어폰은 단순한 전자기기 이상의 기능을 수행한다. 벗에 가깝기 때문이다. 먼 한국에서부터 이곳 영국의 스코틀랜드 지방까지, 나와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늘 붙어있던 이어폰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이어폰들이 수명을 다 하는 걸 목도했음에도, 오늘은 유난히도 더욱 아쉬웠다. 잘 가게나, 내 소중한 친구여.
이어폰이 맛이 가기 전까지, 오늘 나는 그리 나쁘지 만은 않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오늘 역시 아침에 일어나서 즉흥적으로 동선을 짰는데, 그게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우선 오전에는 글래스고 중앙 역에서 대략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로몬드 호수에 방문했다. 숙소에서 글래스고 중앙 역까지 대략 20분이 걸렸으니, 순 이동 시간은 한 시간 20분에 가까웠다. 그 동안 도심 주변에서만 숙소를 잡은 게 습관이 되었는지, 고작 20분 거리인데도 이곳이 상당한 근교처럼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서울 잠실에 있는 우리집에서 서울역까지 가는 것도 족히 40분 이상이 필요하다. 버스로 20분이면, 그리 먼 거리도 아니다. 그런 걸 보면, 확실히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특히 몸이 편한 것에는 더욱 잘 적응한다. 그래서 단 20분 거리인데도, 숙소와 도심이 그렇게 멀어보일 수 없었다. 로몬드 호수는 산악 지대에 위치한 거대한 호수였다. 구름과도 아주 가까운 듯했다. 영국이지만, 스위스 같은 분위기를 내는 곳이었다. 마을도 아기자기 했고, 호숫가는 더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표지판을 보니 이곳은 전통, 혹은 보존 마을(Conservation Village)이었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북촌 한옥마을 쯤 되려나. 그것보다는 더 예뻤다. 호수와 구름, 그리고 안개가 만들어낸 분위기가 참 신비롭고 좋았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어찌 그동안 스코틀랜드에서는 비를 맞은 적이 없다 싶었더니, 바로 이 곳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 시간에 한 번 있는 버스가 도착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고, 비를 피할 곳은 마땅히 없었다. 여행에서 운이 좋은 날도 있었고, 불운한 날도 있었다. 그리 좋지도, 또 그리 나쁘지도 않은, 그런 평균적인 날들을 생활하는 중이었다. 원래 '33' 정도 이상의 유효 숫자만큼의 횟수가 반복되면, 확률은 평균치로 수렴한다고 한다. 뭐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1학년 때의 통계학 입문 시간에서 배운 것 같기는 하다. 이제 여행이 30일 째를 향해 가고 있으니, 사실상 유효 숫자에 근접한 셈이다. 그러니 평균적인 만큼의 행운을 누리며 여행을 하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단, 한 가지 아쉬운 건 날씨 운 만큼은 지지리도 없단 사실이다. 물론 나는 비 오는 날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건 감수성이 대폭발하던 사춘기 시절에 조금이라도 더 어른스러워 보이려고 발악하던 중에 만들어진 습성인데, 그게 지금까지도 유효하게 남아있다. 조금 이상하게 보일 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나는 비가오면 엔돌핀이 샘 솟는 느낌을 받는다. 아니, 그랬다. 이곳의 비는 사람 기분을 잡치기 위해 내리는 것만 같다. 김첨지가 유난히도 돈을 많이 벌던 날 내린 비처럼 모양새가 '추적추적'이었다. 어쩐지 이 정도면 감당할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곧 그게 오산이었음을 깨달았다.
뭐 그래도, 어차피 이 정도의 비야 영국을 한 달 가까이 여행하다 보니 거의 단련이 되었고, 처음 짰던 일정이 미뤄지거나 지체되는 것 없이 제 때에 계획한대로 실행되어 그것만으로도 참 다행이었다. 로몬드 호수 마을의 고요하고도 아기자기한 풍광들을 감상하고, 하산하여 가장 가까운 벨로크(Belloch) 역으로 갔고, 거기서 기차를 타고 다시 글래스고 중앙 역으로 향했다. 벨로크 역은 단선 철도의 아주 작은 역이였다. 역이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정말 작은 곳이었다. 올 때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나라에서 운행됐던 지하철 1호선과 비슷한 외관의 기차를 타고 왔는데, 그래도 갈 때는 스코틀랜드 국기가 비교적 선명히 새겨진 기차로 이동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기차를 아주 많이 좋아했다. 요즘은 철도 동호회 등을 비롯하여, 기차와 기차 시스템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같이 활동도 하는 모양인데, 어린 내가 그걸 알 겨를은 없었고, 다만 가끔씩 마주하는 기차를 반가워하는 게 다였다. 아주 어릴 때부터 기차를 좋아한 걸 보니, 무엇을 좋아하는 것에는 딱히 어떤 이유가 필요한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그게 가장 '순수한 좋아함'의 한 형태겠고. 다음에 내가 정말 많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꼭 말해주고 싶다. 너는 어릴 적의 기차만큼이나 소중한 사람이야, 라고. 내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로맨틱한 대사들 중 하나다.
글래스고는 사실 항구 도시다. 도심에서는 바다 사장의 자갈이나 모래 가루 하나 보이지 않아 조금 의아스럽긴 하지만, 사전에 따르자면 이곳은 항구 도시다. 실제로 '글래스고 항구(Port Glasgow)'라는 역도 있다. 한국에서는 평생을 내내 수도권에서만 살아서 그런지, 이상하게 바다만 보면 애틋한 감정이 든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오면 가능한 만큼 항구나 부둣가 주변을 꼭 한 번 씩은 방문하는 편이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에서 어떤 영감을 얻거나 그런 것은 아니고, 다만 기분은 후련하고 좋다. 강은 주지 못하는 바다 만의 매력이 있다. 무한함, 혹은 궁극체로서의 완전함이랄까. 모든 강은 다 바다로 흐르니까. 아마 이건 내가 여지껏 바닷가 근처 도시에서 살아보지 않아서 할 수 있는 속 편한 소리일 수도 있다. 글래스고 항구까지 가는 길 역시, 로몬드 호수를 갈 때 만큼이나 버스와 기차의 환승을 반복해야 했다. 사실 기차 하나면 됐는데, 무슨 사정인지 환승역까지의 열차가 운행하지 않았고, 버스로 대체 운행을 하고 있었다. 이제 이 정도의 변수 쯤에는 무감각하고도 자연스럽게 대처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건 좀 자랑스러워할 만 하다. 덕분에 아주 태평한 마음으로 글래스고 항구까지 갈 수 있었다.
바다의 흔적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든 글래스고라 기차역 이름만 '항구'면 어쩌나 했는데, 그곳은 정말로 항구였다. 아주 넓은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와중에 등대도 하나 있어 정취를 더했다. 항구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평소에도 산책을 좋아하지만, 유난히도 바닷가 주변을 걷는 게 참 좋다. 해질녘 쯤에 이 곳에 오겠다는 계획은 어쩐 일인지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바다 반대편 언덕에서 하나 둘 불이 들어오는 모습도 퍽 아름다웠다. 오전에 갔던 로몬드 호가 스위스 같았다면, 이곳은 포르투갈의 리스본 비슷한 느낌이었다. 영국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런던의 이미지들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런던은 영국 남동부에 위치한 하나의 도시일 뿐이다. 물론 그 곳이 수도고, 따라서 영국 전반에 대한 상징적인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국에는 런던 이외의 훨씬 더 다양한 모습의 얼굴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 당장 잉글랜드 지방을 벗어나, 웨일즈나 스코틀랜드로 가면 아주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스코틀랜드의 지형은 잉글랜드의 그것과 아주 많이 다르다. 이곳에는 산이 아주 많고, 도시도 그에 따라 발달되어 있다.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혹은 웨일즈 지방의 차이점들을 느끼며 돌아다니는 것도 영국 여행의 큰 매력들 중 하나다. 물론 '워터'가 '후어터'로 발음 되는 것도 모자라, 스코틀랜드에서는 '훳텃'이 되는 사실이 조금은 경악스러울 지도 모르지만. 오늘도 세 사람 정도가 내 말을 못 알아 들었다. 내 발음이 나쁜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곳의 억양 자체가 워낙 독특하다.
이어폰만 순직하지 않았더라면, 여행 중 가장 완벽한 하루들 중 하나로 기억될 수 있었다. 이어폰 한 쪽이 맛이가는 걸 보면서, 기어코 완벽한 하루란 이 여행에서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구나 라고 느꼈다. 정이 많이 든 이어폰이라 순간적으로 핸드폰의 기계적 결함이길 바랐으나, 생각해보니 그게 더 큰 문제인 것 같아 얼른 단념했다. 한 편으로는 이어폰도 소모품이라지만, 그래도 어제 바디 워시를 하나 새로 살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늘 항상 귀 안에서 함께해서 그런가, 참 애틋한 존재였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의 대사, '너에게 무한한 애틋함을 느껴'가 떠올랐다. 뜻하지 않게 글래스고 중앙역 부근의 대형 마트에 들러 새 이어폰을 하나 구매했다. 여행이란 이 처럼 익숙한 존재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무언가를 맞이하는 과정의 연속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겨우 익숙해진 도시와 작별하고 새로운 곳을 방문해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새로움은 설렘과 떨림이 되고, 과거의 것들은 소중한 추억이 된다. 이렇게나 허망히 이어폰의 수명이 다하고 말았지만, 그 동안의 여행 내내 그 이어폰을 통해 들었던 음악을 잊지는 못할 것이다. 내일은 글래스고에서 에든버러로 이동한다. 방문하게 되는 도시가 늘어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작별해야 하는 도시도 쌓여간다. 비를 맞았든 길을 헤맸든, 한 도시의 모든 기억들이 그리 쉽게 휘발되지는 않기를 바라며.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검정치마의 '젊은 우리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