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글래스고 - 에든버러 (2016~2017 세계 여행)
지는 햇살의 찬가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는 경주처럼 도시 자체가 유네스코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크게 기대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유네스코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라고 하여 반드시 여행하기 좋은 것이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경주를 아주 오래 전에 방문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나 좋았다는 느낌은 아직껏 들지 않는다. 오히려 몇 년 전 개봉했던 영화 <경주>를 보고서야, 저기가 생각보다 꽤 괜찮은 곳이라는 걸 실감했을 정도다. 에든버러 직전에 머물렀던 글래스고가 아주 좋았던 곳이었다는 것도 한 몫 했다. 오늘 숙소를 진작 예약하지 않았더라면, 글래스고에서 며칠 더 체류할 수도 있었다. 글래스고와 에든버러는 기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다. 딱 맞춰 역에 도착하여 열차에 올랐다. 여행을 다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다른 이들의 블로그를 자주 보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여행의 매 순간을 상세하게 설명해 놓은 몇몇 블로거들의 열정과 정성에 진심으로 감탄하고는 한다. 그 무거운 짐을 이끌고 낯선 곳을 헤매면서도, 어떻게 태평히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길 수 있는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글래스고에서 에든버러가 그리 긴 이동이 아니라, 오늘은 나도 한 번 그런 식으로 여정을 기록해볼까 싶었지만 도무지 그럴 여력이 안 되었다.
잉글랜드나 웨일즈 지방에 비해 스코틀랜드는 산과 언덕이 참 많은 곳이다. 이게 관광을 할 때는 나름의 재미를 느끼게 하지만, 짐을 이끌고 숙소를 찾아갈 때는 최악이다. 오늘 예약했던 에든버러의 숙소는, 역에서부터의 직선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지만, 꽤 높은 언덕을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올라야 했다. 게다가 역을 기준으로 구시가지에 해당하는 구역이라, 매끈한 아스팔트 대신 울퉁불퉁한 길이 대부분이었다. 비가 안 와서 참 다행이었다. 이 경사진 언덕을 비까지 맞으며 올랐다면 몇 배는 더 고될 뻔했다. 숙소로 향하며 얼핏 오, 에든버러 꽤 멋진 곳인데, 하는 생각이 잠시 들기는 했지만, 워낙에 정신이 없어 제대로 둘러볼 틈도 없었다. 호스텔에 체크인을 하고 나서야 조금 여유를 찾았다. 근래 방문했던 호스텔들 중에서도 상당히 괜찮은 축에 속한 곳이라 기분이 좋았다. 조금 높은 언덕에 위치한 것만 빼면, 침대 바로 옆에 전자기기를 충전할 수 있는 포트도 있고, 아주 깔끔하며, 직원도 친절했다. 외관만 보면 전기라도 제대로 들어올지 의문이 가는 호스텔이었으나, 꽤 청결하고 안락한 내부 모습에 한 시름이 놓였다.
이번 숙소는 사실 조금 특별한 곳이다. 예약을 하며, 아, 내가 이제는 어른이구나 싶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살다보면 이렇게 어른이 되는 구나 싶을 때가 가끔씩 있다. 모든 걸 혼자서 책임져야 하는 여행에서는 그 느낌을 더욱 자주 받는다. 이번 여행에서도 그런 순간이 몇 번 있었다. 첫 날 중국의 면세점에서 담배를 살 때 한 번 그랬고, 런던에서 새 해 불꽃놀이를 볼 때도 그랬으며, 그리고 오늘 에든버러의 숙소를 예약할 때 어른이 된 듯 한 감정을 받았다. 이 숙소가 다른 곳들에 비해 뭐 그리 특별할 건 없지만, 그럼에도 예약 사이트에서 '성인 전용'이라는 문구가 붙은 호스텔이었다. 성인 전용이라니. 이거 뭔가 이름부터 아주 어른스러운 곳인걸. 마치 '애들은 가라' 이런 느낌이었다. 성인 전용이면, 그러니까 어른들 만의 공간이라면, 혹시 그렇고 그런 일들이 매일 같이 일어난다는 소리인가. 마치 일본에서의 러브 호텔들처럼? 성인 전용 숙소에서 겨우 그 정도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내 빈곤한 상상력을 잠시 자책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호기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침 가격도 가장 저렴한 축에 속했다. 지체없이 이 호스텔을 선택했고, 예약이 확정되자 다 자란 어른이 된 듯한 뿌듯함도 조금 느꼈다. 물론 이 호스텔은 지극히 평범하다. 굳이 '성인 전용'을 붙였어야 하나 싶을 정도다.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지난 날이 다소 무안할 지경이었다.
호스텔에서 한 30분 정도 휴식을 취하고, 시내 관광에 나섰다. 장기 여행은 이런 게 좋다. 에든버러에서 몇 박 며칠을 머물러야 한다고 정해져 있었다면 쉴 겨를도 없이 바로 배낭을 싸매고 관광지를 검색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텐데, 그런 압박이 없으니 따뜻한 커피를 들고 산책하듯 여유롭게 이곳저곳을 서성이고 둘러볼 수 있었다. 호스텔을 나오자마자 눈 앞에 에든버러 성이 있었다. 아까 숙소에 들어올 때는 여유가 없어서 미처 보지 못했는데, 꽤나 고독하면서도 웅장한 성이 눈 앞에 펼쳐지니 어쩐지 이 도시는 여행하기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성 하나를 보고 도시 전체에 대한 기대감을 갖는게 그리 논리적으로 합당한 추론은 아니겠으나, 어쩐지 저런 성 하나만 봐도 뭔가 도시 전체가 참 예쁠 것 같은 감정이 들 때가 있다. 여행지의 첫 인상으로부터 비롯된 직감인데, 이게 신기하게도 상당히 잘 들어 맞고 한다. 오늘도 그랬다. 에든버러는 단연코 이번 여행에서 여지껏 방문했던 곳들 중 최고의 도시다. 글래스고에서 조금 조금씩 도시의 고풍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면, 에든버러는 통째로 고풍스러움을 뽐내는 곳이다. 거기에 복잡한 지형으로 인한 다양한 건축물들이 함께 어우러져 뽐내는 분위기도 참 좋았다. 걷는 걸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행지에서도 즐겁게 걸을 만한 도시들이 유난히도 마음에 들고는 하는데, 에든버러는 걷기에 완벽한 곳이었다.
이전에 책에서만 보았던 아주 오래된 성들과 건축물들이 쓸쓸하고도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숙소로 향할 때는 그렇게도 짜증났던 비포장 도로마저도 한 편의 풍경으로 너그러이 감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에든버러는 중앙역을 중심으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나뉘고, 그래서 신시가지에서 구시가지쪽을 바라보면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황홀한 광경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다. 런던을 벗어나 영국의 다른 지방들을 여행하며, 이 나라는 그렇게 볼 게 많지 않구나 라고 종종 생각했지만, 스코틀랜드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인 글래스고에 와서는 색다른 분위기와 다양한 볼거리들에 즐겁게 여행하는 중이었고,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에서 그 즐거움이 정점을 찍었다. 조금 진부하게 표현하자면 '역사가 깃든' 도시가 바로 에든버러다. 오직 시간만이 그려낼 수 있는 작품들이 있다. 그 어떤 현대적인 기술로도 재현할 수 없는 효과다. 에든버러는 그렇게 시간에 그을린 도시였다. 인위적인 고풍스러움이 아니라, 긴 시간을 오래도록 견디고 버텨온 기다림과 인고의 세월이 도시 전체를 물들이고 있었다. 현재의 시간을 살고 있는 내가, 에든버러의 골목골목을 누빌 때는 도시의 과거와 상호작용하고 있는 느낌이기도 했다. 그 만큼 아름다운 도시였다. 영국에서 런던만큼이나 반드시 가야할 곳이 여기 에든버러다.
게다가, 에든버러야 말로 스카치 위스키의 본고장이다. 같은 스코틀랜드 지방임에도, 글래스고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많은 위스키 술집들이 이곳에서 영업 중이다. 스카치 위스키의 산지인 하이랜드와 더욱 가까워서 그런 것 같다. 위스키 산지 투어 상품도 글래스고보다는 에든버러에 주로 몰려있는 정도다. 아, 그렇게 향기로운 술의 본고장이 이곳이라니, 한국에서는 소주와 맥주밖에 안 마시는 주제에 괜한 먹먹함과 애틋함을 느꼈다. 구시가지의 거리를 여기저기 걷다 보니 뭔가 상당한 아우라를 뽐내는 주류 판매점 하나를 발견했다. 안에 들어가서 각종 위스키들을 구경했다. 세계 과자점에 술이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만큼의 기분 좋은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맛있는 술이 이렇게 한 곳에 모여 있다니. 기념으로 만 원 정도 하는, 아주 작은 꼬마 위스키 한 병을 구매했다. 내 손보다도 작은 크기임에도 만 원이 넘는 게 다소 경악스럽기는 했으나, 그동안 열심히 절약하고 다녔으니 이 정도 사치는 가능하겠지 싶어 별다른 망설임 없이 돈을 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30일에 가까운 여행 기간 중, 처음으로 필요가 아닌 욕망이 이끈 쇼핑을 한 셈이다. 아까워서 아직 상자도 못 뜯고 있는 중이다.
에든버러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정말 별다른 기대감이 없었다. 여행의 감흥은 퐁당퐁당, 그래프 곡선을 따라 형성된다. 어떤 날이 괜찮았다면 다음 날은 그보다 못하고, 한 도시가 좋았다면 역시 다음 도시에서는 그만한 감동을 느끼기 힘들다는 소리다.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퐁당이 아니라 퐁퐁이었다. 글래스고도 정말 좋았지만, 에든버러는 아주 훌륭하다. 영국을 여행했다면서 이곳에 오지 못했다면 나중에 정말 억울하게 느낄 만큼 아름답고 황홀했다. 아직 첫날밖에 보내지 않았지만, 그리고 고작 하루를 머물렀음에도 이런 감흥을 느꼈는데, 남은 날들은 얼마나 더 좋을까 하는 기대감이 드는 도시가 바로 에든버러다. 나는 런던에 열흘 이상을 머무르면서도 대영 박물관은 근처에도 가지 않을 만큼 모든 당위와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인데, 에든버러만큼의 영국 여행에서의 하나의 강제가 되어도 상관 없겠다 싶을 정도로 멋진 인상을 오늘 받았다. 물론 오늘 봤던 놀라운 광경들이 단 며칠만 지나도 금방 익숙해지겠지만, 그 익숙함을 만끽하며 이 도시에 될 수 있는 한 오래 머물러도 참 괜찮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그렇다면 처음 얼핏 생각했던 여행 계획을 불가피하게 수정해야 할테지만, 아무렴 어떠랴 싶다. 여긴 그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곳이니까.
에든버러는 해질녘 마저 정말 뛰어났다. 지는 햇살이 오래된 건축물들을 비췄고, 그게 다소 울컥할 정도로의 잔잔한 감동을 자아냈다. 지는 햇살이 이리도 따뜻해 보이는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정말 좋아서, 또 포근해서, 오히려 약간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어떤 도시에서나 해는 지고 그 때의 햇살이 도시를 비출텐데, 유독 그 마저도 위스키의 향 처럼 아름다운 에든버러였다. 불편한 길마저도 시간 안에서 충분히 음미할 수 있는, 그런 도시다. 길이 좋아서, 길이 좋지 않아서, 길이 적당해서, 오늘 걸어다닌 모든 길이 다 좋았다. 자꾸 이 대사를 인용하게 되는 것 같은데, 공유는 새삼 참 멋진 배우다. 도깨비에 공유가 있다면, 영국에는 에든버러가 있다. 쓸쓸하고 찬란한 것도 비슷하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9와 숫자들의 '창세기'다. 어쩐지 이곳 에든버러와 참 잘묘하게 잘 어울렸던 음악이었다. 저밋하게 쓸쓸한 보컬로 워낙 유명한 밴드지만, 이곳에서 들으니 느낌이 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