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같은, 휴가 아닌 어떤 날

영국 에든버러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여행이란, 기억의 연금복권

오늘은 모처럼만에 확고한 계획을 세우고 여행한 날이었다. 그리 거창할 것도 없었다. 패키지 투어였기 때문이었다. 유일한 계획은 아침 7시에 무사히 일어나 5분 거리의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모를 긴장과 불안 속에 잠들어야 했다. 여행에서 나는 평균적으로 12시 조금 넘어 잠이 들어, 일찍 일어나야 아침 9시에 눈을 뜬다. 그러고 천천히, 아침에 일어나면 으레 해야 할 일들을, 이를테면 용변 보기나 샤워, 그리고 밤 사이 잊고 있던 짐이 그 사이 모두 무사한지 체크하는 행위 등을 마무리하고, 오늘은 어딜 갈까 궁리하며 스마트폰을 붙잡고 30분 정도는 더 침대에서 뒹굴거린다. 그러니 나의 실질적인 기상 시간은 오전 10시에 가깝다. 이런 생활을 계속하던 중에 아침 7시에 일어나야 한다니, 이건 정말이지 내게 있어 무한도전에 가까웠다. 그래서 오전 6시부터 알람을 10분 단위로 맞추고 잠을 청했다. 다른 호스텔 투숙객들에게는 다소 민폐였겠으나, 어쩔 수 없었다. 남들이 내게 폐 끼치는 걸 싫어하고, 그런 만큼 남들에게도 어떻게든 피해 주지 않으려 살아가지만, 오늘은 정말 예외적인 상황이었다.7시에 일어나지 못한다면 기껏 돈을 내고 예약한 여행을 날릴 수 있었다. 그런 재앙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밖에서 산책 좀 하려면 비가 내리고, 경기장 근처 펍에서 응원이라도 하려고 하면 술집들이 문을 닫고, 그나마 멀쩡하던 날씨가 캐리어 끌고 이동하는 날에는 갑자기 비를 뿌리는 등, 나쁘지도 않았지만 좋았다고도 할 수 없는 정도의 행운을 누리며, 여행을 다니고 있었다. 그런 전례로 미루어 보아 오늘의 기상도 그리 안심할 수 만은 없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이쯤에서 여지 없이 늦잠은 자느라 돈을 날렸어야 조금은 드라마틱하고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되겠으나, 무사히 제 때 일어나서 모임 장소에 제 때 도착했다. 아, '제 때'라는 이 두 글자가 주는 안도감이란. 이로써 하나는 증명됐다. 이 여행 동안 발생했던 모든 불행한 사건들은 나의 불성실함이나 불찰 등, 나의 어떤 품성이나 인격적 하자와는 아무런 관계 없는 것들이었다. 보시라. 나는 이렇게나 착실한 사람이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어두운 거리에서, 백마탄 초인처럼 불을 밝히고 다가오는 버스의 자태가 그리 아름다울 수 없었다. 저 버스만 타면 오늘 12시간은 아무 걱정 없이 다녀도 된다는 것도 큰 위안이었다. 혼자 모든 걸 책임지면 된다는 사실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자유를 주지만, 세상 모든 자유는 값 비싼 편이고, 따라서 나는 거의 24시간 내내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예민함을 지불해야 했다. 오늘만큼은 달랐다. 코스는 정해져 있고, 예약도 다 되어 있으며, 헤맬 필요도 없고, 이동 중에 조금 졸아도 상관없으며, 아주 마음 편하게 목적지까지 다녀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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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2시간이 소요되는 패키지 투어였다. 에든버러에서 출발하여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방의 위스키 공장을 견학하고, 꽤나 멋진 풍경을 자랑하는 지형을 돌파하여, 유명한 호수인 네스호까지 갔다오는 일정이었다. 오래 고민하다, 여기만큼은 패키지로 가도 괜찮을 것 같아서 어제 저녁에 부랴부랴 신청했다. 몇 박을 하기에는 애매하고, 에든버러로부터의 거리도 상당하지만,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안 가기에도 아쉬운 지역이었다. 무엇보다 아무 위스키 공장이나 단신으로 찾아가 무작정 견학시켜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어차피 그 주변에서 1박을 한다고 해도 투어를 신청해야 할 텐데, 하루면 볼 수 있는 것들에 굳이 추가적인 교통비와 숙박비를 지불하는 게 그리 합리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치밀했던 혼자만의 고민 끝에, 꽤 나쁘지 않은 가격의 투어를 발견했고, 바로 신청했다. 비슷한 가격대 중에서는 가장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상품이었다. 어쩐지 그게 더 풍성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기대감이 부풀었다. 사실 선택지도 몇 개 없기는 했다. 이 곳의 유명한 위스키 공장들은 겨울철에는 운영 자체를 하지 않는 경우가 꽤 잦다. 그래서 대부분의 투어 상품 역시 이 기간에는 판매되지 않았다. 다행히도 위스키 공장 견학을 할 수 있는 상품이 몇 개 있었고, 그 중 하나를 선택했다. 아침 7시 반이라는, 내게는 꼭두 새벽과도 같은 그 시각에 출발한다는 것 이외에는 대체로 만족스러운 조건이었다.


출발한 지 1시간 반 정도 만에 위스키 공장에 도착했다. 공장이라기 보다는 교도소에 가까워 보였던 스산한 외관이었다. 역시, 그 맛있는 술은 이런 험한 곳에서 탄생하는 구나. 여행을 하며 수 많은 술을 마셨지만, 아직은 단연코 위스키가 최고다. 그러니 이 여행의 주(酒)님은 위스키다. 한자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문외한인데, 그래도 이건 몇 안 되게 아는 단어라 다행이다. 어쨌든. 공장의 음산하고도 허름한 외관을 보니, 아 역시 모든 주님들의 탄생은 이리도 고독하고도 초라한 곳에서 이루어지는구나, 싶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위스키의 마굿간에 발을 들였다. 일반적인 투어 가격에 2파운드 정도를 더 내면 한 잔을 더 줬다. 당연히 나는 2파운드를 더 냈다. 일종의 봉헌금이었다. 그리고 안내원의 가이드에 따라 주님의 탄생기를 감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내 키 만한 술통들이 언덕처럼 쌓인 마당에서 공장 견학이 시작됐다. 그 후 효모가 발효되는 곳과 증류소, 또 보관 창고 등을 차례로 돌았다. 평소 같았다면 저 여자 뭐라고 혼자 중얼대나 싶었겠지만, 이 곳에서 만큼은 온갖 신경을 집중해서 영어를 들어냈고, 얼핏이나마 주님이 얼마나 복잡한 공정을 통하여 탄생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원래 그런 복음은 해석하기 어려운 법이다. 고대 성경도 죄다 라틴어로 쓰여있지 않았나. 위스키의 본고장에 왔으니 영어를, 그것도 심지어 스코틀랜드 발음을 들어내는 수고쯤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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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학 말미의 보관소가 특히 인상 깊었다. 창고에 들어서자마자 위스키 향이 확 풍기며, 아 그러니까 이곳이 주님의 천국이구나 싶었다. 1970년대에 빚어진 술부터 최근까지의 위스키가 거대한 술통 안에 담겨 있었다. 위스키가 되려면 최소한 만 3년 하고도 하루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 전까지는 스피리츠(Sprits)일 뿐이다. 역시. 그 깊은 맛은 아무나 따라하고 노력한다고 가능한 게 아니었다. 살면서 버킷리스트를 만들고 하나씩 지워나가며 만족감을 느끼는 편은 아니지만, 그 곳에서 하나의 목표는 만들었다. 내 직장이 어디가 됐든, 첫 월급을 받으면 무조건 1975년 위스키를 한 병 구매할 것이다. 월급이 얼마가 됐든 말이다. 그런데, 누가 나를 고용해주긴 하려나. 해주겠지, 한 사람 쯤은. 어허, 주님 앞에서 이런 속물적인 생각이라니. 견학을 마치고 공장 안 카페에 앉아 오전 10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스코틀랜드 법으로, 오전 10시 전에 주류를 판매하는 건 안 된다고 한다. 역시 맛있는 술은 시음마저도 기다림의 미학을 느끼게 한다. 최소한 3년하고도 하루를 거쳐 숙성되었으면서도, 또 오전 10시가 되기까지 한 번 더 인내하는 그 우직함과 강직함. 물론 나는 오전 10시 전에는 주류 판매가 안 된다고 하길래, 그럼 오전 1시나 2시는 되나, 1시나 2시가 되면 3시나 4시도 되나, 그게 되면 도대체 언제부터 언제까지 술 판매가 안 되는 걸까 하는 쓸데없는 고민을 조금 했다. 그리고, 위스키가 각자에게 배달됐다.


흐음, 이 향. 이 그윽함. 주님의 탄생지에서 마시는 위스키라니. 예루살렘에서의 포도주와 비견할 만했다. 물론 아직 예루살렘을 가보지는 못했다만. 느낌이 조금 특별했다. 직속 공장에서 만든 위스키라는 배경 지식이 있어서 그런가, 시음용 위스키임에도 꽤나 풍부한 향을 갖춘 듯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위스키를 마시고 입 안 여기저기로 굴렸다. 최대한 혀와 닿는 부분이 넓도록 재촉했다. 미뢰놈들아, 일을 하라고! 위스키를 한 일주일 정도 마신 베테랑의 입장에서 상세히 설명하자면, 왜냐하면 이런 고급 술을 일상적으로 마시는 사람들은 처음의 감각에 무뎌진지 오래일테니, 위스키를 마시는 건 총 네 단계로 나뉜다. 먼저 코로 향을 맡고, 입 안에서 맛을 느끼며, 식도를 타고 내려갈 때 다소간의 전율을 감지하고, 마침내 한 모금 이후의 호흡에서 코를 통해 나오는 그 지극한 향을 한 번 더 즐기게 된다. 조금 '쌈마이'한 표현으로, 한 모금 마시고, 코로 '흥'하고 숨을 쉴 때 위스키의 깊은 향을 역시 느낄 수 있단 소리다. 두 잔을 주문한 건 정말 잘 한 선택이었다. 방금 전까지 보고 온 이 위스키의 탄생 과정을 한 번 더 복기하며, 남은 한 잔을 더 마셨다.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과학을 지독히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내 내신 등급의 발목을 잡은 게 한 두 개가 아니지만, 그 중 과학이 유독 독보적이었다. 그건 교육 과정이 지지리도 지루하고 재미없기 때문이었음을 오늘 느끼게 되었다. 학창 시절에는 지루해 미칠 것 같던 증류니 발효니 하는 것들이, 이렇게 신기하고 재밌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술맛을 조금 알았더라면, 이 나라의 화학 분야를 이끌어가는 지성으로 거듭날 수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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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견학을 마치고는 하일랜드 지방의 네스호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패키지 여행의 은총을 느낄 수 있었다. 워낙 이른 시간에 일어났기도 했고, 또 꽤 높은 도수의 술도 두 잔 마신 상태라, 급격한 피로가 찾아왔다. 평소였다면 내릴 곳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긴장을 하고 마음을 졸였겠지만, 오늘만큼은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창문에 기대어 숙면을 취했다. 가족의 첫 해외 여행을 초등학교 5학년 때 자동차 캠핑 여행으로 경험했다 보니, 어지간한 패키지 상품들은 다들 시시해 보이는, 부작용 아닌 부작용이 생겼다. 모름지기 여행은 자유 여행이고, 그 고생 안에 삶의 진실과 행복이 있다는 신념을 지금까지도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그런 여행을 4주 가까이 하다 보니, 가이드에게 모든 결정권과 길찾기 등 여행자로서의 의무들을 위탁한 오늘 이 여행이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그 동안 패키지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 자신을 반성했다. 저렇게 무슨 재미로 다니나 싶었는데, 패키지 여행은 재미로 가는 게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편안함이 그 동력이었다. 내리랄 때 내리고, 타랄 때 타고, 먹으랄 때 먹고, 사진 찍으랄 때 사진 찍으며, 이거 사랄 때 이걸 구매하고, 저거 필요하다 할 때 저걸 구매하는, 이런 형식의 여행은 확실히 고민하고 걱정할 여지조차 없었다.


물론 앞으로도 나는 계속 자유 여행을 다닐테지만, 그 안에서 하루 이틀쯤은 이렇게 단발성으로 투어를 신청해도 괜찮겠구나 싶었다. 홀로 책임지는 여행을 다니며 그동안 꽤나 정신적인 부담감에 시달렸다는 걸 오늘에야 알게 됐다. 반대로, 그게 또 얼마나 매력있는 여행인지도 새삼 깨닫게 됐다. 구글 GPS를 실행하여 버스가 다니는 곳들을 보며, 만약 이게 자유 여행이었다면 여기쯤에서는 한 번 구경했을 법도 했겠다 하는 마음도 여러 번 들었다. 남의 말 같은 건 들을 새도 없이 그동안 여행한 지라, 타이트한 시간에 맞추어야 하는 것도 패키지 여행 나름의 고역이었다. 자유 여행은 시간의 강박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는 게 가장 큰 매력이다. 물론 시간은 내가 어떤 태도와 마음을 갖든 여전히 같은 만큼 흐르겠지만, 자유 여행에서는 그 시간을 조금 더 내 것으로 운용하는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 여행이 단 12시간 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패키지 여행의 가장 큰 단점 중 하나인 '강매'도 이루어지기도 했다. 강매란 별 다른 게 아니라, 점심 메뉴를 한 곳에서 주문할 수 밖에 없게 하거나, 혹은 생각도 없던 유람선을 타야만 하게 하는 방식으로, 교묘하고도 불가피하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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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문에 네스호에서는 배까지 타야 했다. 2시간 반을 거기서 머물렀는데, 배라도 타지 않으면 도저히 할 게 없는 곳이었다. 평소에 유람선에 대해 별다른 로망이나 동경이 없기에, 오늘의 배도 지루할 뿐이었다. 언젠가의 수학여행 때 탑승했던 금강에서의 유람선과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거기에 탑승객의 80%가 타 패키지 상품을 통해 여행하는 중국인들이었다. 오늘의 나처럼 현지에서 만나 잠시동안 같이 다니는 여행이면 모를까, 이들처럼 본국에서부터 함께하는 패키지 여행은 주로 가족 단위로 이뤄지고, 자연스럽게 애들도 많고 엄청나게 소란스럽다. 금강 휴게소와 그리 다를 것 없는 이 풍경을 보기 위해 원치 않은 소음까지 견뎌내야 하는 게 패키지 여행의 또 다른 단점이었다. 편하긴 편하지만, 확실히 내 취향은 아니다. 자유 여행이었다면, 길게 줄 서 있는 단체 관광객들을 보고 발 길을 돌렸을 것이다. 배에서 내려서는 항구 근처에 있는 펍에 들러 기네스 맥주를 한 잔 주문했다. 그걸 테이크아웃 하여 도시를 누비는 게 배에서보다 몇 배는 더 행복했다. 사람마다 여행에 기대하는 게 다르다. 나의 경우는 자유가 가장 크다. 모든 걸 내 멋대로 해도 괜찮다는 홀가분함도 한 몫 한다. 패키지 투어를 시작한 지 만 8시간도 채 안 되어 이런 불평이 쌓여가나는 걸 보며, 체질상 이런 여행은 도무지 못하겠다고 확신했다.


그래도 모처럼만에 아침에 일어나는 것 외에는 단 한 순간도 초조하지 않을 수 있던 하루였다. 생각해보면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의 입국 심사때부터 늘 긴장하고 조급하게 지냈으니, 오늘은 휴가와도 같았다. 패키지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기동성이다. 한 곳을 깊게 음미하지는 못해도, 밀도 있게 몇 군데를 찍고 오는 데는 아주 제격이다. 그 덕분에 다소 애매한 고민거리로 남아있던 하일랜드 지방과 위스키 공장을 단 하루만에 해결할 수 있었다. 가이드도 친절해서 다행이었다. 말이 너무 많았던 게 유일한 단점이긴 했다. 정말, 12시간 중 공장 견학과 보트 탑승을 하던 시간을 제외하고 그는 항상 떠들고 있었다. 그에 말이 너무 많다고 역정을 내기조차 미안할 만큼, 가이드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하여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다양한 연극톤의 목소리들로 풀어내고 있었다. 그의 모든 영어 설명을 전부 다 이해할 수는 없는 내 부족한 영어 실력이 다소 미안할 지경이었다. 아주 무심하고, 딱 필요한 만큼만 고객을 대하는 사무적인 가이드보다는 훨씬 낫다 싶었다. 함께 여행한 다른 15명의 사람들 역시 꽤 괜찮았다. 어쨌든 누구 때문에 일정이 지체되거나 미뤄지는 것 없이, 안전하고도 무사하게 12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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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위스키 공장을 직접 견학한 게 가장 큰 보람이었다. 여행의 추억은, 마치 교사나 강사들이 시험 대비 강의를 진행할 때, '이건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로 시작하는 문장과도 비슷하다. 수 많은 별표들로 요점 정리를 한 것 이외에도, 정작 시험에는 그렇게 '혹시 몰랐던' 내용들이 출제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여행도 그렇다. 런던에서는 빅벤, 파리에서는 에펠탑, 그리고 로마에서는 콜로세움처럼, 여행자라면 반드시 보고 감상해야 할 의무에 가까운 장소들이 존재하나, 정작 잔잔하고도 오랜 기억으로 남는 건 의외의 순간에서 탄생한다. 위스키는 영국에서도 값 비싼 술이고, 그러니 세금까지 붙는 한국에서는 더욱 마시기 지난할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가 어떤 나란가. 술담배에 있어서는 폭탄에 가까운 세금을 매기는 곳 아닌가. 그럼에도, 어쩌다 가끔씩 위스키를 마주할 때나 운 좋게 이 맛있는 술을 마실때, 나는 오늘의 위스키 공장 방문을, 그 견학이 포함된 패키지 투어를, 에든버러를, 스코틀랜드를, 영국을, 그리고 2017년 이 여행을 한 번 더 상기하고 음미하게 될 것이다. 사실 여행은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꽤 많이 소요되며, 신체적으로도 그리 편하지 만은 않은 날들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여행을 가는 이유는, 그것을 다녀왔을 때 아마 평생을 간직하게 될 정서적 풍요로움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여행이란 내 기억의 연금복권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 속물같은 비유인가.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로는 오랜만에 넬의 노래를 선택했다. '그리워하려고 해'다. 아마 분명히 오늘을 추억하고 그리워 할 미래 어느 날의 내게, 여행하고, 또 여행할 수 있던 과거의 내가 바치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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