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에든버러 (2016~2017 세계 여행)
실망할 겨를조차 없는 도시, 에든버러
어제 고작 몇 시간 더 일찍 일어났다고, 오늘은 아주 늦게까지 잠을 잤다. 이렇게 차변과 대변이 일치를 이루는 정신과 마음으로 대학 전공 공부를 했다면 못 해도 반액 장학금이라도 받았을 텐데, 학습에는 도무지 이런 종류의 의욕이 들지 않는다. 늘어지게 아침을 맞이하고, 아주 상쾌한 기분으로 호스텔을 나왔다. 대부분의 날들이 그랬듯, 오늘도 뚜렷한 목적지란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날들이 그랬듯, 오늘도 일단 마음이 가는 곳으로 걸었다. 어쩐 일인지 날씨가 청명했다. 확실히 스코틀랜드 지방의 전반적인 날씨가 잉글랜드에서보다는 훨씬 낫다.
해외 국가들에 대한 전국민적 입문서 '먼나라 이웃나라'를 통해, 여러 나라들의 역사와 정보를 한 권의 만화책으로 훑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방대한 정보를 얉고도 넓게 다루는 만큼 '먼나라 이웃나라'는 저자의 견해에 더욱 가까이 기울여 있는 경향이 있고, 가끔은 독자에게 왜곡된 선입견을 갖게 하기도 한다. '먼나라 이웃나라' 영국편이 내게는 그랬다. 아무래도 잉글랜드 지방을 중심으로 서술될 수밖에 없어서 그런 지는 몰라도, 이번 여행을 통해 스코틀랜드에 오기 전까지 나는 이곳에 대해 꽤 부당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 지형도 안 좋고, 날씨도 잉글랜드 지역 만큼이나 별로며, 사람들도 무뚝뚝할 거라 생각했고, 또 몇 년 전 분리독립 투표를 진행했던 사실때문에 어쩐지 다소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도 존재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지방은, 그중에서도 특히 에든버러는, 유럽에 간다면 한 번은 반드시 들러보는 게 좋을 만한 아름다운 곳이다. 사람들이 특히 무뚝뚝하다거나 그런 느낌도 없다.
모처럼 맑디 맑은 날씨에, 한참을 이리저리 걸었다. 원래 방랑에는 목적지가 없는 법이다. 그게 방랑과 방황의 차이일 지도 모른다. 뚜렷한 목적지가 있음에도 그걸 기피하거나 애써 가지 않는 게 방황이라면, 당위적 도착지가 없는 여정이 방랑이다. 이 여행은 못해도 몇 개월은 떠돌아다녀야 하는 일정이고, 그래서 방랑에 가깝다. 방랑이라는 게 이름처럼 그렇게 낭만적이지는 못하다. 늘 이야기했 듯,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방랑의 두 글자에 포함된 자유를 온전히 느끼려면, 방랑자로서의 책임의식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그건 때때로 상당한 피로감을 몰고 온다. 하지만, 오직 방랑안에서만 음미할 수 있는 맛이 있다. 아무런 목적 없이, 그저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걸어다니며 도시 골목 곳곳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게 가장 크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가능한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는 타이트한 일정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다. 특히 에든버러는 그렇게 느긋하게 걸어다니기 참 좋은 도시다.
늦은 점심으로는 피자헛에 들어갔다. 팬 피자라 얇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15쪽이나 먹었다. 많이 걸어서 그런지, 유독 배가 고팠다. 피자헛에 런치 뷔페가 있다는 건 나같은 배낭 여행자들에게 큰 축복이다. 아마 나처럼 본전을 이미 첫 판에 뽑고도 남을 사람들이 세상에 몇 안 되기에 저 서비스를 운영하는 거겠지. 뷔페에 와서도 낸 돈 만큼만 먹는 소식주의자들 덕분에 내가 수혜를 입고 있다. 세상은 이런 곳이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뜻하지 않은 선행으로 축복이 이루어지는 곳. 이런 선순환들만 계속되면 좋으련만, 피자헛에서 정말 오랜만에 확인한 한국 포털에서 쏟아진 뉴스들은 상당히 절망적이었다. 한 편으로는 절망적이고, 또 한 편으로는 감탄스럽기도 했다. 세상에. 일국의 국가 원수가 인터넷 방송에 출연하다니. 이것 만큼은 연설때마다 K컨텐츠 어쩌구를 주장했던 그녀의 말과 거의 유일하게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아닌가. 대안적도 아닌, 일탈적 매체로서 많이 인식된 인터넷 방송의 위상을 한 나라의 대통령이 이런 식으로 높일 줄 누가 알았을까. TV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느꼈고, 그 역사적 기류에 몸을 담구고 있다는 사실이 내가 먹은 피자 양 만큼이나 경이로웠다. 대통령의 인터넷 방송 출연, 이건 정말 꽤 충격적인 일이었다.
외국에 나와서는 한국 포털에 며칠에 한 번씩만 접속하고, 그래서 새로운 뉴스를 확인할 때마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대학 시절, 설마설마했던 내 체크카드 잔액의 바닥을 다음 입금날까지 열 흘 이상 남겨두고 학인할 때의 참담함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런 뉴스들에 매일같이 노출되어야 하는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여행의 또다른 중요한 매력일 지도 모르겠다. 에든버러의 경관을 조금 더 즐기다, 오후 다섯 시 쯤 숙소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했다. 저녁 7시부터는 에든버러 도시를 배경으로 한 '유령 투어'가, 호스텔 투숙객들에게 무료로 제공되어 이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주는 건 마다하지 않고, 새로운 경험을 할 기회가 생긴다면 가능한 최선을 다하여 그에 참가하려는 게 이번 여행에서의 또 다른 마음가짐이다. 꽤 흥미로운 투어가, 무려 공짜인 게 가장 컸다. 투어를 시작하기 전에 내가 상상한 이미지는 귀신의 집이었다. 호스텔 특성 상 혼자 다니는 여행객들도 꽤 있고, 나도 혼자고 그 사람도 혼자인데, 귀신의 집에서처럼 무서운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지면 누군가 '어머'하며 내게 기대게 되는, 그런 또 다른 선순환적인 일을, 다소 불순한 의도로 기대하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딴 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게 없어도 투어 자체는 정말 좋았다. 에든버러에 대한 간략한 역사적 사실에서부터 시작한 투어는, 유령 투어라는 명칭답게 주로 처형과 고문, 또 식인 등의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가이드의 발음이 토플 리스닝 영역에서의 교수만큼이나 또렷했다. 그래서 잠시나마 내가 영어를 잘 하는 것 같은 기분 좋은 착각에 빠질 수도 있었다. 밤 늦게, 한 도시의 어두운 사실들을 연결하여 이렇게 투어로 만든 게 꽤 참신했다. 언덕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예전에는 저기가 전부 오물 호수였고, 사람들을 그 안에 박아버리는 형식으로 고문과 처형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주머니 사정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은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들도 오물 호수안에 많이 버렸다는, 마음 먹고 투어를 신청하지 않았다면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들이 주를 이뤘다. 이렇게 역사의 야사들을 언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투어였기에 자연스레 귀신의 집 같은 분위기는 연출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 누구도 내게 기댈 일 따위는 없었고, 그 덕에 혼자 사업 아이템이나 궁리했다.
서울에서도 여름철 한정으로 이런 납량특집 투어를 기획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얼마나 가슴 아프고 잔인한 일들이 서울에 많았는가. 조선왕조 500년이 서울을 도읍으로 정한 이후에, 온갖 암투와 다툼이 이 곳에서 이루어졌고, 그건 조선왕조실록 등의 정사들을 제외한 많은 야사들에 영감을 주었다. 몇 년 전 당시 교제하던 여자친구와 가을 밤에 경복궁 야간 개장에 갔던 적 있었다. 그래, 나도 그럴 때가 있었다. 경희루의 야경도 예뻤고, 또 그 안의 정취도 상당했으나, 이걸 여름철만큼은 경복궁과 도심 주변에서 오싹함을 컨셉으로 한 투어를 진행해보면 어떨까, 하는 궁리를 오늘 유령 투어 도중에 많이 했다.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아버지가 자식을 뒤주에 가둬 죽인 비극적인 공간에서부터 시작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생을 잃었던 사대문 안팎의 많은 공간들을 천천히 걸어다니며, 역사 속 숨겨진 무서운 이야기들을 현장에서 들어보는 것이다. 다소 비판은 일 수 있겠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매력적인 관광 상품이지 않을까.
특히 우리나라의 여행 상품들은 대부분 '착함 컴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끔 다른 지자체들에서 '충효의 고장'이라며 놀러오라는 문구들을 내놓을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분명 저기도 예산이 투입됐을 텐데, 기껏 생각해낸 게 저런 지루하기 짝이 없는 문구라니.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할 수 있는, 그런 감각적이고도 과감한 여행 상품이, 아쉽게도 우리나라에는 별로 없다. 보여줄 게 그리 많지 않아도, 남아있는 것들이라도 어떻게 하나의 스토리 텔링으로 엮냐에 따라 호감도와 매력도가 상승할 수 있다. 에든버러의 유령 투어도 별 게 있었던 게 아니다. 그저 늦은 밤에 도시를 1시간 반 정도 천천히 걸어다니며, 역사책에는 언급되지 않은 이면들을 언급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늦은 밤, 에든버러 성을 비롯하여 고풍스러우면서도 쓸쓸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도시를, 그런 내용의 설명을 들으며 걷는 것 만으로도 색달랐다. 투어 상품은 조금 더 '유희'에 초점을 맞추고 다각화 될 필요가 있다. 왜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역사적 건축물들이나 장소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쇼핑과 클럽 문화만 찾아다니는 지, 답이 뻔하지 않은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역사적'인 건축물들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라도 조금은 더 흥미롭게 보이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드웨어적인 한계가 있다면, 컨텐츠를 집중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우리의 국가 원수께서도 친히 인터넷 방송까지 출연하시여, 컨텐츠 부분에 대한 자신의 관심과 애정을 몸소 보여주시지 않으셨나. '납량특집 투어'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 오직 탁상공론에서만 관광 산업 활성화를 외칠 게 아니라, 실제적인 노력과 고민이 동반돼야 한다. 물론 한 나라 수도의 캐치프레이즈를 'I.SEOUL.U' 따위로 지어버릴 정도로 관료주의적인 행정시스템에서 참신한 아이디어가 제대로 빛이라도 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령 투어가 끝나고, 참가한 호스텔 사람들과 함께 펍에 가서 뒷풀이를 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비영어권 국가 국적은 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내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전체를 대표하게 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게 큰 관심이 없었다. 자기들끼리 떠드느라 바빴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미국, 호주 등 아주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이 투어를 찾았고, 그들의 억양은 모두 달랐으며, 서로 다른 억양의 영어들로 소통하고 있었다. 마치 JTBC 프로그램 '비정상회담'을 보는 듯했다. 거기 사람들이 한국어를 할 때처럼, 같은 영어권 국가라도 발음이 서로 미묘하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다름'과 '틀림'은 완전히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고, 내 발음은 보통 '틀린' 편이었기에, 그저 분위기를 봐 가면서 눈치껏 적당히 웃는 타이밍을 잡느라 매우 힘들었다. 투어 가이드의 설명은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됐는데, 왁자지껄한 술집에서 이 사람들이 주고받는 회화는 맥락조차 따라가기 벅찰 때가 있었다. 어떤 미국인 여성은 한 문장에 두 번 이상의 'Holy Shit'이라는 감탄사를 내뱉고는 했다. 알아들을만 한 게 그것밖에 없었다는 게 조금 슬펐다. 그래도 사람들이 또 착한 게, 내게 말을 걸 때는 아이에게 이야기 하듯 천천히, 또박또박 발음하도록 노력하는 게 티가 났다. 거기서 인류애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 감복했다. 그 덕에 나도 몇 마디 정도는 할 수 있었고, 아주 지겹지는 않게 시간을 보냈다.
인류애로 하나되는 순간은 음악이 연주될 때였다. 라이브 음악 펍이었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팝송이 나올때마다 술집 안 모든 사람들이 떼창을 했다. 생전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이 하나처럼 같은 노래를 부르는 광경이 꽤나 뭉클했다. 역시, 컨텐츠가 중요하다. 어쨌든. 누군가는 그 음악에 맞춰 춤을 췄고, 또 누군가는 목청 크게 따라 불렀으며, 나같은 사람을 비롯한 몇몇은 그 모습들을 아주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멋지고, 좋았다. 이런 분위기를 여행이 아니면 어디서 즐겨볼 수 있을까 감히 상상도 안 됐다. 대학교 근처에 학교 응원가만 주구장창 틀어주고 고객들이 그에 맞춰 춤을 추고 노래를 따라부르는 술집들이 몇 군데 있기는 하나, 그런 곳에서 오늘 에든버러 펍에서 받았던 만큼의 감흥을 느낄 수는 없다. 내 영어 실력이 뭐 어떻게 되든, 또 국내 포탈에서 쏟아지는 뉴스들이 어떻든, 복잡한 세상사 같은 건 훌훌 잊어버리고 마음껏 따뜻함을 즐길 수 있었다. 셋리스트의 가장 마지막은 비틀즈의 'Let it Be'였다. 새삼 가사가 참 좋다는 걸 느꼈다. 살아 있었다면, 존 레논도 지난해의 밥 딜런처럼 노벨 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여행이어서 그런가, 순리에 맡기라는 'Let it Be'가 평소보다 더 와닿기도 했다. 참 잔잔하고도, 울림 있는 마지막 노래였다.
에든버러에 3일을 있었는데, 하루도 실망한 적이 없다. 정말로 매력적인 도시다. 여행이 모두 끝나면, 가장 오래도록 기억될 도시들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이소라의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다. 따뜻했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오늘 하루의 분위기를, 그녀 특유의 음색으로 계속 추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