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와의 대화

영국 에든버러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어느 정도의 고독은 삶의 순환에서 아주 중요한 자양분이 된다는 게
여행이 선물하는 경이들 중 하나

신정과 구정을 모두 이역만리의 영국땅에서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신정과는 달리, 이곳 영국에는 구정에 대한 어떤 설렘과 떨림도 없다. 하긴, 새 해는 한 번이다. 한 달도 채 안 되어, 설날이라는 이유만으로 또 다시 해피뉴이어를 외치기에는 다소 민망하다. 그래도 습관이 무섭다고. 어쩐지 허전하다. 그런 민망한 짓을 20년 넘게 해오다 보니 그런 것 같다. 해피뉴이어는 한 번 해피뉴이어지, 구해피뉴이어는 무엇이고 신해피뉴이어는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무심함이 가득한 영국은, 구정의 기별이 단 하나도 없다. 아, 하나 있기는 하다. 중국 관광객들이 조금 더 자주 보인다. 거기도 구정 명절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놀러 온다. 예전에 동북아시아 3국의 여행 패턴을 도식화 했던 유머 아닌 유머가 있었다. 일본 사람들이 먼저 가고, 한국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 가며, 마지막으로 중국 사람들이 떼로 찾아간다는. 이제 많이 변화한 듯하다. 오히려 런던만 벗어나서는 한국 사람들을 쉬이 볼 수 없었다. 이제는 중국 사람들도 한국 국민들이 쉽게 가지 않는 도시들을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작년 12월 31일, 무려 일곱 시간을 기다려 다리 위에서 볼꽃 놀이를 봤던 게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아니, 뭘 했다고 시간이 이렇게나 빨리 흐르는가. 시간은 어디서든 가지만, 하고 싶은 걸 할 때는 더더욱 빨리 흐른다. 아마 국방부 시계가 종종 멈추는 건, 자꾸 다른 데 시간을 빌려주어서 그런 것 같다.


오늘은 숙소를 옮겼다. 에든버러 중앙역과 더욱 가까운 곳으로 이동했다. 사실 에든버러를 뜰 때까지 숙소를 바꿀 생각 같은 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도시가 꽤 좋아 이틀 정도 더 머무르기로 마음 먹었고, 그래서 원래 있던 숙소에 숙박을 연장할 수 있는지 물어 보았으나 이미 다 예약됐다는 소리를 들어서, 급하게 숙소 어플을 통해 다른 곳을 예약했다. 다행히 새로운 곳도 나쁘지는 않다. 무려 30박을 영국에서 묵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침대를 발견했다. 3층 침대다. 런던의 상징이 2층 버스고, 그 이후로 모든 2층에 대해서는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물론 버스와 침대 사이에 상관은 없겠지만 아무튼. 그런데 3층 침대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동안과는 상당히 압도적인 광경을 자랑했다. 천장의 높이는 크게 다르지 않은데 3층 침대를 비치하다보니, 자연스레 층과 층 사이의 간격이 그리 넓지 않다. 솔직히 아주 많이나 좁은 편이다. 명색이 침대인데 허리조차 제대로 펼 수 없다. 2층이 제일 불편할 것 같은데, 다행히도 1층이다. 체크인 시각에 딱 맞춰 들어온 보람이 있었다. 이렇게나 좁은 칸이 조금 새롭기는 하지만, 꽤 깔끔하고 방에 전용 화장실과 욕실도 있는 등 전반적으로는 만족스럽다. 이제 직전에 예약해도 어느 정도 이상의 질을 보장하는 숙소를 저렴하게 예약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긴 것 같아 뿌듯하다. 물론 비법 같은 건 없다. 가격 순으로 리스트를 정렬한 뒤, 도심과의 거리를 살펴보고 사진을 몇 개 보면서 고르는 게 다다. 그래도 혼자 하는 여행인데 이 정도의 성취감이라도 있어야 동기부여가 되지 않겠는가.


환경을 바꾸니, 어제 조금 많이 느꼈던 고독감이 어느 정도는 소제된 것도 같았다. 외로움이 아닌, 꽤 큰 고독이 어제는 지배적이었다. 아마 전 날에 모처럼, 정말 아주 모처럼, 많은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노래를 부르며 따뜻하고도 소란스런 분위기에서 함께 했던 여운이 남아서 그런 듯 하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문득 그 느낌을 더 이상 공유할 수 없다는 게 살짝 슬펐다. 둘이 다니는 여행은 이런 게 되려나. 나중에라도 결혼을 하게 될 지 아닐 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인생에 만약이라도 가능할 지도 모를 신혼 여행을 빼놓고 다른 여행은 전부 모조리 혼자 다니겠다고 결심했는데, 꼭 그 소신을 기어코 고수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신이라고 하기에도 조금 웃긴 원칙이기는 하지만. 여행을 혼자 다니며 가장 좋은 건 자유로움이다. 다른 이를 원망할 필요도, 또 그로부터 원망 받을 여지도 없는, 그 공간이 좋다. 지극히 방어적인 내 성격이 여기서도 조금 드러난다. 나는 혹시라도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보다는, 확실하게 불행하지 않을 선택지를 우선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다. 여행을 동고동락하며 기쁨과 슬픔, 때로는 분노를 나누며 서로의 추억을 쌓아가는 것보다는, 오직 혼자 다님으로써 타인의 존재로 비롯될 귀찮음과 짜증, 또 성가심을 원초적으로 차단하는 게 아직은 훨씬 더 매력적이다. 20대가 끝나기 전에, 한 번 쯤은 정말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여행을 떠나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하지만 스스로와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는 혼자 하는 여행이 아니라면 쉽게 가질 수 없다. 평소에 별다른 생각이 없다가도, 이렇게 홀로 떠나오면 아주 많은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러면서 천천히 조심스럽게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게 되는데, 당시의 치열함과 절박함으로 어지러웠고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씩 정리되는 느낌이 좋다. 거리상으로 꽤 멀리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이전보다 더욱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게 된다. 거기에 하루하루의 무사함을 최우선적인 가치로 두다 보니, 한국에서처럼 과거의 일들에 천착하며 살 겨를도 없다. 모든 것이 낯설다는 게 종종 불편할 때도 많지만, 그 덕에 일상적으로 나를 괴롭혀온 익숙한 감정들과도 조금 거리를 둘 수 있다. 그러면서 지난 일들이 훨씬 명징하고도 분명하게 보이며, 이전보다 겨우 약간 희미한 불빛들을 따라 선을 그으며 하나하나의 아주 미약한 인과관계나 상관관계를 도출해볼 수 있다. 실연이나 실업 등 개인적인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훌쩍 여행을 떠나는 건 어쩌면 이런 순기능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언제 해고되고 이별할 지 모를 이 불안 사회에서, 돈을 최대한 아끼고 모아 조금씩 매일마다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가 바로 여행이 주는 소중한 교훈이다, 는 물론 아니고, 어느 정도의 고독은 삶의 순환에서 아주 중요한 자양분이 된다는 게 여행이 선물하는 깨달음들 중 하나다.


영국에서의 날들이 이제 완연한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일정으로만 보면 아직 2주 정도의 시간이 더 남았지만, 도시만 따지면 단 두개다. 영국에서의 마지막 여행지가 될 리버풀에서는 이 후의 여행을 준비하는데 시간을 대부분 할애할 예정이다. 떨리는 고백과도 같던 입국 심사가 기억에 참 많이 남는다. 기나긴 면접끝에 마침내 입국 승인을 받고, 뭐 이딴 고고한 척 하는 나라가 다 있나 싶었는데, 영국에서의 일정이 이렇게 끝나가는 게 많이 묘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조금이라도 더 날이 좋을 때 걷기 위해 날짜와 비자 일 수를 계산하다 보니, 영국이라는 한 나라에만 50일 정도를 머무는 기형적인 일정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여기서는 한 도시마다 게으를 정도의 여유를 부리며 생활하고 있는데, 이런 날도 얼마 안 남았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본격적으로 쉥겐 국가들의 카운팅이 시작될 2월 중후반부터, 지금과는 비교할 수없이 빡빡하고도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물론 그 곳에서도 충분한 시간을 갖고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테고, 그리고 아마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그것밖에 할 일이 없겠지만, 그래도 한 도시에 충분히 머무르며 어디에 가야 하고 이동해야 한다는 강박 없이 오롯이 나를 마주할 수 있는 건 절대 영국에서만큼은 안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설명 못 할 애틋함이 영국에 든다. 좀 있어보이게 표현하자면, 느긋한 게으름으로 자신을 비춰볼 수 있던 곳 정도랄까. 써놓고 보니 그렇게 멋지지도 않고 재수만 없는 것 같지만.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메이트의 '늦은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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