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리버풀 (2016~2017 세계 여행)
어쩌면 그게 바로 사랑
겨울 내내 잠만 자는 곰들도 오늘의 나보다는 더 부지런할 것이다. 이곳까지 오는 버스에서 한 꼬마에게 하도 시달려서 그런가, 여독 아닌 여독이 몰려왔다. 여행 초반부에 본머스의 호텔에서 1인실을 썼을 때 이후 처음으로 오직 나만의 공간에서 취침을 하다보니 모처럼만에 긴장을 안 하고 뒤척임 없이 푹 잘 수 있었다. 호스텔의 시스템이 아무리 잘 갖추어져 있더라도, 결국 그 곳 역시 여러 사람이 한 방을 함께 쓰는 공간이며, 필연적으로 불편함과 스트레스가 야기될 수 밖에 없다. 다만 배낭 여행객들이라면 으레 마땅히 어느 정도의 불편은 각오하고 있고, 또 어쩔 수 없이 본인 스스로도 남들에게 폐를 끼치는 경우들이 발생하기 때문에 서로서로 인내하며 지내는 것이다. 아침 시간대의 소음이 가장 대표적이다. 호스텔의 한 방에는 여러 사람이 있고, 그 중 누군가는 그 날 아침에 체크아웃을 할 것이며, 다른 누군가는 침대에 누워 밀린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할 테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체크아웃을 위해 짐을 다시 꾸리고, 몸을 씻고 머리를 말리는 과정에서는 부산스러운 소음이 발생할 수 밖에 없으며, 그건 누군가의 달콤한 아침잠을 짜증스럽게만 방해한다. 하지만 그렇게 피로와 짜증을 느낀 사람도 또 언젠가는 체크아웃을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의도치 않은 피해를 입힐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어달리기 같은 상황이다. 며칠 지내다 보면 그런 시스템에 익숙해지고 적응이 되지만, 그래도 아침마다 잠을 방해받는 게 즐겁기만 할 수는 없다. 다행히도 리버풀에서는 1인실을 쓰는 관계로 그 누구에게도 내 휴식을 방해받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오후 세 시까지 침대위에 늘어져 있었다. 아침 11시 즈음에 화장실 한 번을 갔다 온 게 전부였다. 물론 이렇게 따지자면 상당히 게을러 보이겠고, 실제로 게을렀던 것도 사실이지만, 조금 변명을 하자면 어제 저녁에 잠을 조금 늦게 잔 영향이 컸다. 우선 잠도 별로 안 왔고, 또 이런저런 짐 정리와 그 동안 찍었던 사진들을 하드디스크에 옮겨 담는 작업을 하느라 상당히 늦은 시간에야 잠을 청했다. 뭐 그렇다고 세 시까지 퍼질러 있던 게으름이 완벽히 변호되지는 못하겠지만. 사실 마음으로는 아예 오늘은 모든 일정을 침대 위에서만 보내고 싶었는데, 세 시가 넘어가니 너무 배가 고파서 잠도 못 잘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 곰들도 겨울잠을 자기 전에 식량을 비축하고는 한다. 수면도 분명 칼로리가 소모되는 신체 활동이다. 아주 느즈막하게 씻고, 숙소를 나왔다. 나오자마자 보이는 리버풀의 홈구장 전경이 아직은 낯설었다. 비록 최근에는 성적이 그리 좋지 않지만, 한때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빅4 구단들 중 하나로 항상 손꼽히는 게 바로 저 리버풀이었다. 언젠가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는 이탈리아의 AC밀란을 상대로 0대 3으로 지고 있다가 극적으로 동점을 만들고, 승부차기에서 우승을 차지한 기적을 연출한 팀이기도 하다. 리버풀 구단의 팬들은 '콥(The Cobs)'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데, 이들의 응원가 'You'll Never Walk Alone'은 한국에서도 많이 알려져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당연히 리버풀 구단의 홈구장 안필드도 상당히 유명한 경기장들 중 하나다. 어린 시절부터 오직 축구 게임에서만 보던 축구장이 숙소에서 단 1분도 안 되는 거리에 위치해있으니, 마냥 신기할 따름이었다. 경기장 외관에는 'You'll Never Walk Alone'이 적혀 있었다. 어쩐지 힘이 되는 구절이었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도착했다. 간단하게 허기를 달래고, 바로 숙소로 돌아가려다 여기까지 나온 게 못내 아쉬워 이리저리 도시를 걸어다녔다. 시내에서 부둣가가 그리 멀지는 않았다. 뉴캐슬 근처의 바다가 동해라면, 여기는 서해다. 첫 날의 일정으로 여유있게 부둣가를 거니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거기로 향했다. 이미 해는 지고 있었고, 바다는 아직 남아있는 햇빛과 가로등으로 잔잔하게 빛나는 중이었다. 영국 근교의 브라이튼에서 이번 여행 첫 바다를 본 이후로 상당히 많은 해안가를 거닐고 방문했지만, 바다마다 항상 새롭고도 색다른 느낌을 받는다. 리버풀의 부둣가 야경도 역시 정말 아름다웠다. 해질녘이어서 그런지 구름과 가로등과 함께 연출되는 분위기가 따뜻하면서도 멋졌다. 바닷가의 야경에 이제는 감흥이 무뎌질 법도 한데, 이 부둣가의 저녁은 정말 굉장한 풍경이었다. 남은 열흘 동안의 저녁에 최대한 이곳에 많이 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어쩐지 봐도봐도 절대 질리지는 않을 만한 그런 그림같은 곳이었다. 리버풀에서 아직까지 방문해 본 곳이라곤 축구장 한 곳과 부둣가, 그리고 음식점 하나밖에 없지만, 어쩐지 참 매력있는 도시일 것 같다는 좋은 설렘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동안의 호스텔에서 만난 꽤 많은 여행객들이 리버풀이 참 예쁜 곳이라고 한결같이 칭찬했던 이유가 있었다. 내일은 조금 덜 게으르게 생활하며 주간 시간대부터 도시를 천천히 음미해야 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냥 무작정 이리저리 걸어다니기만 해도 많은 걸 보고 느낄 수 있는 곳 같았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지점이어서 그런가, 바람은 무척이나 강했다. 어떤 지점에서는 마치 물에 들어간 것처럼 숨쉬기조차 힘든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기도 했다. 인상을 온갖대로 찌뿌리며 호흡을 하려고 애썼다. 자기가 바다 도시임을 어떻게든 과시하려는 듯한 강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따뜻하고도 안온하며, 거기에 무척이나 고요하고 자유로운 1인실이 기다리고 있다. 현지인의 집에 '민박'을 하는 거라 혹시 집주인이 불친절하거나 사전 설명과의 괴리가 심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괜찮은 숙소라 정말 다행이다. 사실 아직까지 집주인 얼굴을 한 번 도 못 보기는 했다. 그는 자기 집의 모든 방은 이렇게 민박으로 렌트해주고, 본인은 리버풀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고 있다. 어제도 숙소 문 앞 근처에 열쇠를 두었다는 메시지 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그래도 전화를 한 번 하기는 했는데, 상당히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혹시 여행을 준비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에어비앤비'라는 서비스를 꼭 이용해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현지인의 생활 방식을 느껴보고 싶다거나, 조금은 길게 체류할 예정인데 호텔값은 조금 부담된다거나, 호스텔의 단체생활에 조금 지쳤다면 '에어비앤비'는 상당히 괜찮은 선택지다. 나는 혼자 다니기에 방 하나만을 선택했지만, 여러명이 함께 하는 여정이라면 집을 통째로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에 빌릴 수도 있다. 일반적인 호텔에서는 조리나 취식이 불가능하니, 어떤 측면에서는 '에어비앤비'가 초저가 싸구려 호텔들보다는 조금 나은 측면도 꽤 있다. 현지 사람의 집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도 꽤 흥미로운 경험이기는 하고.
부둣가 근처에는 수많은 자물쇠들이 걸려 있었다. 남산의 자물쇠들과 같은 의미의 것들이다. 이 전에 프랑스 파리의 퐁뇌프 다리에서도 자물쇠들의 향연을 목격한 적 있었는데, 남산에서든 파리에서든, 그리고 오늘 리버풀에서든 이런 자물쇠들을 볼 때 마다 어쩐지 조금은 서글픈 느낌이 든다. 대부분의 자물쇠들은 아마 연인들이 서로 영원을 맹세하며 걸어놓은 것들일 테다. 그러니 그 많은 자물쇠들은,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맹세와 약속이다. '딱'하는 잠금음과 함께, 이 사랑은 영원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으로부터 파생된, 두 사람의 경이와 전율이 자물쇠에 묻어 있다. 세상에는 항상 이별이 횡행하지만, 한 자물쇠에 맞는 열쇠는 하나밖에 없다는 그 유일함처럼 자신들의 사랑 역시도 보편적인 기승전결과는 거리가 있을 거라고 힘껏 다짐했을 연인들이었다. 그렇게 함께 자물쇠를 걸며 영원을 이야기했던 연인들의 약속들 중, 지금까지 유효한 것은 얼마나 될까. 그 수 많은 자물쇠들 중 자신들의 것은 무엇이었는지 그들은 금방 찾아낼 수 있을까. 바다 바람에, 비에, 또 사람들의 손길에 공평하게 부식돼 버린 똑같은 자물쇠들 중, 그토록 특별하다 믿었던 자신들 사랑의 증거를 발견할 수는 있을까. 부둣가를 몇 번을 반복하며 뒤져보아도 쉬이 찾을 수 없는 그 자물쇠는, 이제 더는 살아있지 못하는 그들 사랑의 상징이지는 않을까. 영원의 증표와, 그 때 품었던 뜨거웠고 간절했던 마음과 사랑마저, 모두 결국은 저물었다는 건 몇 번을 생각해도 그저 저밋하고 아픈 진실이다. 길게 늘여진 자물쇠들의 나열이 퍽 슬프게 보였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절대로 영원할 수 없는 영원의 열쇠만 한 손에 덩그러니 쥐어준 잔인한 보편성이 새삼 섬뜩했고, 애틋했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영화 캐를외 OST 중 하나인 'Lovers'다. 세상 여기저기에 더는 쓸모없어진 자물쇠들이 그렇게나 널려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새로운 희망과 기대감으로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아주 많다. 아마도 절대적일 사랑의 뻔한 기승전결과, 절대로 호의적이지 않은 이별의 통계치에도 불구하고, 우린 사랑에 빠지고, 아파하고, 후회하고 회의하다, 또 다시 사랑을 나눈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는 영화 제목이 떠오른다. 사랑을 하지 않는다고 정말 숨을 못 쉬고 호흡마저 곤란해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테지만, 아마 사랑만큼 한 사람의 삶에 생명력과 숨을 불어넣을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저런 제목을 지은 거겠지. 철저히 개별적인 하나의 생에, "당신은 혼자 걷지 않을거예요(You'll never walk alone)"이라는 따뜻한 위안과 안도감을 선사하는 게 사랑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쉽게 떠오르지도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