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리버풀 (2016~2017 세계 여행)
빨래, 커피, 그리고 라디오
빨래를 해야 했다. 오후에 비가 올 지는 모르겠으나. 그 동안은 간헐적인 손빨래로 연명하고 있었으나, 그게 어제 즈음 되어 드디어 한계에 다다랐다. 세탁기를 한 번 돌릴 때마다 돈을 꽤 내야 하다보니, 기본적인 속옷과 양말만 손빨래로 버티다가, 마침내 어떤 임계치를 넘어섰을 때야 세탁기를 돌리고는 했다. 호스텔에서는 리셉션에 빨래망과 돈을 가져다 주면 알아서 세탁을 해주었지만, 이곳은 에어비앤비인만큼 그런 서비스 같은 건 없다. 아니, 그런 서비스가 없는 정도만 되었어도 아무 문제 없을 뻔했다. 서비스도 없고, 집주인도 없고, 세탁기도 없다. 일반 가정집을 숙박 업소 비슷하게 개조하는 과정에서 세탁기는 없애버린 듯했다. 처치 곤란한 핵폐기물을 제 곳에 옮겨야 하는 비밀스런 임무를 맡은 듯, 배낭에 빨래망을 우겨넣고 세탁소를 찾아 여정을 떠났다. 구글에 'Laundry Liverpool'이라고 검색하니 몇몇 지점들이 나왔는데, 걸어가기에는 도무지 불가능한 곳들이었다. 빨래 한 번 하러 가려다 교통비가 더 나오는 촌극이 벌어질 만한 거리였다. 그래도 구글 지도에 등록되지 않은 세탁소가 있을 지도 모르니, 일단 큰 길로 한 번 나가보자는 계획을 세웠다. 손에 커피를 들고, 그렇게 대책 없는 오늘의 모험이 시작됐다.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오늘이 일요일이었던 만큼 대부분의 상점들이 문을 닫고 있었다. 세탁소가 있더라도 그게 꼭 열었다는 보장도 없을 것이었다. 물론 닫아도 좋았으니 아무 세탁소나 하나 발견하기를 바랐다. 런던이나 다른 도시들에서는 이 정도의 주택가에서 꼭 하나 쯤은 셀프 세탁소가 있었는데, 여기서는 코빼기도 안 보였다. 구글 지도의 그 불안한 안내가 점점 현실처럼 느껴졌다. 설마설마 싶었는데 30분을 뒤져도 세탁소가 안 나왔다. 에어비앤비가 본질적으로는 가정집인 만큼, 걷다 보면 주변에 하나쯤은 세탁소가 있겠지, 하는 심정으로 후드 하나만 걸치고 나왔는데, 계속 헤매다보니 땀이 흐르고 흘러 정말 빨래가 필요한 건 옷이 아니라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불결함까지 들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소요될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다. 만약 세탁소가 일요일이라 문을 닫은 것이었다면, 내일 오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나름대로 가볍게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아예 보이지 조차 않으니 이거 정말 빨래 한 번 하려고 시내까지 나가야 되나 싶은 두려움이 커졌다. 거기에 제대로 씻지도 않고 나온 관계로 찝찝함도 심했다. 그저 숙소 앞에 잠깐 다녀올 계획이라 이후 오후에 천천히 씻으면 되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후회했다. 숙소 주변에는 세탁소가 확실히 없다는 걸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기대보는 심정으로 에버튼의 홈구장 구디슨파크 근처로 향했다.
그 근처에는 맥도날드나 KFC 등의 프랜차이즈, 그리고 대형 마트도 있기에 혹시 세탁소도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이고도 절박한 추론의 결과였다. 한참을 찾아다니다, 마침내 맥도날드에서 대각선으로 7분 정도 떨어진 곳에 'Laundrette Liver'라 쓰인 간판을 발견했다. 할렐루야. 가게 안에는 십 여 대의 세탁기와 비슷한 숫자의 건조기가 있었고, 경쾌하게 작동하는 중이었다. 아, 그 청량한 기계음이란. 마치 놀이공원에서의 후룸라이드처럼 속 시원하고 세찬 물 소리. 무더운 여름날 쨍한 얼음물로 등목을 한 듯한 상쾌함을 느꼈다. 사랑하는 옷들아, 목욕할 시간이야. 서툴고 미약한 내 손길에만 몸을 맡겼던 속옷과 양말들아, 너희에게 세신사를 준비했단다. 비장함과 애틋함에 가까운 감정으로 빨래망을 꺼냈고, 세제가 어디있나 찾았다. 그런데, 세제가 안 보였다. 그러니까, 이곳에는 세제가 없었다. 아하 세상에, 세제를 개인적으로 구비해와서 세탁을 하는 시설이었다. 그럼 그렇지. 음식점을 가도 물도 공짜로 안 주는 나라에서 40일째 생활하면서, 세탁소에 세제가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 이런 바보. 속 시원한 빨래는 일단 미루고 근처 마트로 가서 세제를 구입했다. 분홍색과 파란색이 있었는데, 어쩐지 분홍색이 조금 더 향기가 진할 것 같아 그걸 선택했다. 남은 여행기간 동안 이 많은 세제를 어떻게 가지고 다녀야 하지 싶었지만, 뭐 어떻게 방법이 있겠지 하는 심정으로 세제 한 통을 골랐다. 일단 이 빨래부터 끝을 내야 했다.
세탁소로 다시 돌아와 이런저런 버튼들을 누르고 동전을 넣어 기계를 작동시켰다. 물이 '쏴아'하고 쏟아졌다. 안심하고 세제를 뜯었다. 잠깐, 뭔가 순서가 잘못된 것 같은데. 세제를 먼저 투입해야 '쏴아'할 때 비눗물이 나올 텐데. 급한 마음에 세제통에서 플라스틱 컵을 뒤적였으나 보이지 않았다. 이런 센스없는 영국 사람들 같으니라고. 한국 세제통의 호의를 권리라 착각해온 지난 날을 반성했다. 일단 빨리 세제를 넣긴 해야 되는데 어느 정도를 투입해야 하는지 도저히 감이 안 섰다. 세제칸 자체가 한국에서 보던 세탁기의 그것과 상당히 다른 모양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거의 붓다시피 하여 세제를 넣었다. 과유불급이라지만, 어쩐지 세제만큼은 넘치는 게 모자른 것보다 몇 배는 더 나을 듯했다. 그제야 '쏴아'하는 물이 조금 탁해지더니 비눗물의 꼬라지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세탁기 건너편 벤치에 앉아 내 새끼들, 아니 옷들이 목욕하는 장면을 유심이 지켜보았다. 아주 제대로된 거품 목욕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비눗방울이 너무 심하게 일어 드럼통 안의 내용물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흐음, 역시 성공적이었다 싶었다. 아파하는 지구와 자연환경에는 미안하지만, 넘치는 비눗방울이 선사한 청결함의 신뢰감이 그저 달콤했다.
건조까지 마치자 시간이 꽤 흘러 있었다. 커피를 준비해오기를 정말 잘했다 싶었다. 덕분에 조금 덜 지겨울 수 있었다. 상상력이 빈곤하다 못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내 입장에서 신기하지 않을 사업 아이템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싶긴 하지만, 이전에 '런더리 카페'를 보며 진심으로 감탄했던 적이 있었다. 세탁과 카페라니, 다소 이질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최근의 수요와 주거 환경에 상당히 부합하는 아이템이었다. 거기에, 생각없이 세탁기 안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소간의 마음의 고요와 평화도 얻을 수 있다. 물론 그건 오늘의 나처럼 세제를 너무 많이 투입하지는 않았을 때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똑같은 패턴으로 세탁기 안 드럼이 굴러가며 빨래감들이 몸을 씻는 게 의외로 마음에 정화가 되었다. 이것이 요즘 유행하는 슬로 라이프인가. 마침내 빨래를 꺼냈다. 그렇게나 많은 세제를 집어 쳐 넣다시피 했으니 당연한 이야기지만, 완료된 빨래에서는 향기가 났다. 강신재의 소설 <젊은 느티나무>의 첫 문장이 생각났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살아오며 많진 않더라도 또 아주 적지만도 않은 양의 소설들을 읽었는데, 첫 문장이 이토록 생생히 기억나는 소설은 <젊은 느티나무>가 거의 유일하다. 그 모든 여행의 악취를 벗어내고 화학 공산품의 향긋함을 머금은 빨래들이 못내 사랑스러웠다.
숙소에 와서는 이 세제를 페트병에 옮겨 담는 '공정'을 진행했다. 어떻게 사람 손이 저렇게도 야무지지 못할까 싶은 내 손으로, 그 좁은 페트병 입구에 세제 가루를 옮겨담는 건 가히 나노 작업과 비견될 만했다. 큰 페트병과 작은 콜라병에 나누어 담았다. 흘린 가루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큰 탈 없이 세제 가루 대부분을 무사히 이동시켰다는 사실이 정말 뿌듯했다. 어쩐지 살림의 고수가 된 듯했다. 이렇게 살림을 잘 하는 남편이라니, 누굴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결혼하는 미래의 아내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일 거란 자뻑도 잊지 않았다. 실상은 달갈 후라이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수준이긴 하지만. 아침에 빨래를 하고, 남은 세제 한 통을 페트병에 옮겨 담았다고 이렇게 자화자찬이라니. 말끔하게 싱크대를 정리하고, 커피를 한 잔 더 마시며 개운한 기분으로 팟캐스트를 들었다. 대한민국 군대가 내게 남겨준 긍정적인 영향은 정말 하나도 없지만, 그나마 그 중에서 굳이 하나를 꼽자면 라디오를 듣는 취미다. 핸드폰을 자유로이 쓸 수 없는 환경이다 보니 다른 유희거리를 찾을 수밖에 없었는데, 나의 경우는 라디오에 빠졌다. 처음에는 '테이의 꿈꾸는 라디오'의 '테이스티 무비(김현지&이준오 게스트)'와 '쿡앤 밤(박연경&노중훈 게스트)' 코너 정도를 듣곤 하다가 이제는 팟캐스트까지도 찾아 듣고 있다. 처음 들었던 팟캐스트는 '배순탁, 생선의 하라는 음악은 안 하고'였다. 도대체 이걸 왜 찾아 듣고 있지 싶다가 나도 모르게 웃고 있던 프로그램이었다.
요즘 빠져있는 팟캐스트는 '김혜리의 필름클럽'이다. 씨네21의 김혜리 기자, SBS 라디오의 최다은 PD, 그리고 어릴 적부터 나의 숙희, 나의 타마코, 내 인생을 망치진 않았지만 어쨌든 나의 구원자 비슷했던 영원의 이상형 임수정 배우까지 세 사람이 진행하는 영화 관련 팟캐스트인데, 아주 재미있다. 김혜리 기자의 깊이 있는 영화 해설에, 음악 전공자 최다은 PD의 영화 음악 설명, 그리고 연기자로서 현업에 종사하고 있는 임수정 배우의 생동감 넘치는 코멘트까지, 거의 완벽한 조합이다. 특히 최다은 PD의 영화 음악 설명이 정말 신선했다. 1회에서였나, 영화 <캐롤>의 메인 스코어가 극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주되는지를 상세히 설명해주었는데, 학창 시절 미적분을 배울 때 이후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똑똑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팟캐스트를 다 듣자마자 바로 음원사이트에서 캐롤 OST 전곡을 다운 받아서, 그 설명을 떠올리며 종종 잘 듣고 있다. 김혜리 기자의 영화 설명이야 워낙에 유명하니 두 말 할 필요도 없고, 거기에 임수정 배우는 '배우의 시각'이라는, 그 동안의 영화 프로그램에서는 쉽게 접하지 못했던 관점의 틀을 제시한다. 이를테면 4회 <녹터널 애니멀스>편에서 영화의 미술을 이야기할 때, 이런 미술 작업이라면 배우로서 정말 욕심나는 환경이다, 와 같은 코멘트는 배우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코멘트였고, 덕분에 영화 제작 현장에 대해서도 상당히 실감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세 사람의 목소리가 모두 매력있어, 듣고만 있어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효과도 있다. 어쨌든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는 팟캐스트다. 축구팀 FC바르셀로나의 메시, 네이마르, 수아레즈의 트리오가 역대 최고의 공격 트리오로 평가 받곤 하는데, 여기 팟캐스트 출연진 트리오도 그처럼이나 정말 훌륭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 인기있는 팟캐스트 방송으로 오래도록 남았으면 하는 간곡한 바람이다.
오늘은 이렇게 주변 정리와 일상 준비 등으로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좋게 말하면 재충전의 날이었고, 까놓고 말해서는 빈둥빈둥 흘려 보낸 시간이었다. 그래도 좋게 말하는 게 더 나으니, 굳이 포장하자면 여유있는 장기 여행의 장점을 십분 느꼈던 하루였다. 아침에 빨래를 무사히 완료하면서, 조금은 현지인이 된 듯한 뿌듯함은 덤이었고. 남은 여행 기간에서도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어디 떨어져도 제 몫은 하며 생활할 수 있겠구나 싶은 자기 확신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던 날이었다. 밀린 빨래를 해서 속이 시원하기도 했고. 절대 오해하지는 말기를. 속옷과 양말은 시간 있을 때마다 꼬박꼬박 손빨래를 하고 다녔다. 수건이야 좀 며칠 두고 쓴 적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청결하기 위해 무지하게 애쓰는 중이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강아솔의 '매일의 고백'이다. 어느덧 40일이 된 여행을 소소히 기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