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말아요 우리

영국 리버풀 (2016~2017 세계 여행)

by Nell Kid
이들의 고통은 독립과 동시에 끊어진 불연속함수가 아니라,
지금껏 계속되는 현재진행형의 트라우마다

외국어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할 때였다. 나는 참 애매한 학생이었다. 영어 실력이 아주 뛰어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내신이 엄청 좋은 편도 아니었다. 일반 전형만이 내가 합격할 수 있는 유일한 전형이었으나, 그렇다고 특별 전형이라는 기회조차 날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 끝에 일반전형과 함께 영어 특기자 전형에도 지원했다. 영어 특기자 전형에는 추가적인 작문 시험이 있었다. 그 작문을 위해, 나는 직전해 겨울부터 아주 많은 습작들을 써냈다. 그건 '글쓰기'라기 보다는 '반복훈련'에 가까웠다. 무슨 주제가 나오든 내 글은 어떻게든 하나로 수렴됐다. 인류애 비슷했던 것 같은데. 어쩐지 휴머니즘은 있어 보이는 단어였다. 지성과 인성을 겸비한 글로벌 리더를 선발하겠다는 학교 취지에도 부합하는 듯했고. 영어에 능통하지는 못했지만 능통한 것처럼 보여야 했으며, '있어 보이는' 문장과 표현들을 죄다 집어넣고 그걸 손에 익히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피겨 스케이팅으로 따지면, 무슨 음악이 나오든 간에 트리플 악셀을 반드시 안무에 포함하는 셈이었다. 학원에서 처음 에세이를 쓰고 첨삭 받던 날이 지금도 선명하다. 정말로, 마침표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죄다 붉은색 펜으로 고쳐져 있었다. 내가 에세이가 아니라 혈서를 썼나 싶을 정도로 믿기지 않았던 광경이었다. 그 엉망진창 수준의 글을 그나마 비벼라도 볼 수 있게 하려면 내 손을 형상 기억 합금처럼 만들어야 했다. 어차피 몇 개월 죽어라 노력한다고 천지개벽하게 발전할 영어 실력도 아니었다. 다만 어쩐지 내가 쓴 글만 보면 얘가 꿈도 영어로 꿀 것만 같은 느낌을 연출하기 위해 애쓸 뿐이었다.


어떤 주제가 제시되든, 나의 레퍼토리는 변하지 않았다. 외국어 고등학교의 입학 담당자들에게는 처음 읽는 글이겠지만, 그 한 번을 준비하며 글을 쓰는 나도, 그걸 첨삭하는 학원 강사도 입시철이 되어서는 거의 지겨워 죽을 지경이었다. 나중에는 뒷부분은 제대로 확인도 안했다. 어차피 우리의 중점은 '서문'이었다. 두 번 째 문단부터는 늘 연습하던 내용을 쓰면 되었고, 다만 서문을 어떻게 매끄럽고도 매력적으로 작성해야 자연스럽게 뒷부분과 연결될 지를 가장 많이 고민했다. 게다가 아주 많은 답안지를 빠른 시일 내에 검토하고 채점해야 하는 입학 담당자들 입장에서 보자면, 아무래도 뻔하지 않은 서문을 가진 글에 조금 더 관심이 쏠릴 거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예상해볼 수 있었다. 따라서 서문 역시도 몇 가지 패턴으로 나누어 연습했는데, 그 중 가장 자신있었던 것이 '인권선언문'을 인용한 패턴이었다. 다시 봐도 정말 거창하다. 중학생 꼬마 주제에­­­­­­ '인권선언문'을 영어로 읽고 이를 줄줄이 외우고 있는 듯한 뻔뻔함이라니.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말도 안 되게 우스꽝스럽다. 당시에는 내가 '인권선언문'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채점관들이 가산점을 줄 지도 모른다는 순진하고도 철 없는 기대도 있었다. 겨우 몇 년이 지나서 그 나이 무렵의 아이들을 과외 수업한 적이 있었는데, 학문적 깊이라고는 대학에 들어와서도 꼬락서니조차 찾아볼 수 없는 나조차 중학생 아이들의 '똑똑함'과 '똑똑한 척'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내 답안지를 읽은 교수도 아마도 나를 많이 비웃었을 테다.


손에 굳은살이 생기도록 에세이를 써댔던 날들이었다. 대학 입시때도 논술 공부를 했지만, 그 정도로 손이 저리도록 써대지는 않았다. 그럴 여건도 아니었고. 대학 입시는 고등학교의 그것보다 훨씬 더 준비할 게 많았다. 수능, 내신, 각종 자기소개서에, 비로소 논술까지. 영어 듣기와 에세이만 연습하면 됐던 고등학교 입시와는 비교할 수 없었고, 그러다보니 논술에 그 만한 시간을 할애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고등학교 입시 때는 그 '작문'에 사활을 걸었고, 그러다보니 뻔질나게 써먹었던 '인권선언문'의 첫문장 만큼은 아주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다. 'All human beings are born free and equal in dignity and rights', 해석하자면 '모든 인간은 존엄과 권리 속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가 되겠다. 이 담백하고도 선명한 문장을 내 형편없는 에세이 속에 우겨넣었으니, 그저 민망할 따름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 문장 하나만 기억하고 있어도 세상의 불행한 일들은 훨씬 줄어들 텐데. 생각해보면 인류 역사에서 가장 끔찍했던 사건들은,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았을 때, 즉 다른 이를 목적과 주체가 아닌 수단이나 객체로 대했을 때 발생했다. 그들의 존엄과 권리를 뺏었고, 자유와 평등함을 박탈했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만행들이 어디 한 두 개이겠냐 만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그것이 '만행'인지 조차 깨닫지 못했던 참극들도 꽤 많이 존재했다. '노예제'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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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리버풀은 번영을 누릴 때는 정말 잘 나가던 항구 도시였다. '대영 제국'이라 불리었던 영국의 대표적인 무역항이었으니,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다. 하지만 모든 번영에는 그림자가 있고, 리버풀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더욱 적극적으로 노예들을 착취했던 도시였다. 이곳의 화려한 역사 안에는, 수 많은 노예들의 피와 눈물이 서려있다. 리버풀에는 노예 상인들도 많았고, 노예들은 비인간적으로 다루어졌다. 그 때의 상인들은 노예들 역시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조차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무지와 욕망이 결합하면 잔인함이 탄생한다. 그 당시의 노예들에게, 리버풀은 번영하는 부항이 아닌, 저주받은 땅이었고, 바다였다. 그들의 입장에서 리버풀의 지배계층은 명백한 가해자들이었다. 그렇게 악명 높았던 도시는, 노예선이 활발하게 운송되던 그 부둣가에 '노예제 박물관(Slavery Museum)'을 만들었다. 잘못을 인정했고, 용서를 구하며,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들의 뒤늦은 노력이 고통받고 착취당한 이들을 직접 달랠 수는 없다.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 그러나 그 부끄러운 역사를 겸허히 인정하고 자신의 과오가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 그래도 후대에는 그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희망 정도는 남길 수 있다. 그것이 중요하다. 용서받지 못할 짓을 했음에도, 용서조차 구하지 않고 되려 뻔뻔스럽게 망각을 강제하는 이들도 세상에는 아주 많다. 지난 역사는 무엇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겠지만, 리버풀은 그렇게 희생되고 착취당한 이들의 비극적인 삶을 헛되이 기억하지 않고 있었다.


노예들의 삶을 보여주는 섹션에서는 참담함까지 느꼈다. 도저히 이해 되지 않았다. 그들이 달랐던 건 피부색밖에 없다. 어떻게 사람이 같은 사람에게 그런 야만적인 짓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저지를 수 있었을까. 좁아터진 운송선안에 노예들을 가두고, 언제나 열악한 영양과 위생 상태에 방임하였으며, 채찍질을 비롯한 끊임없는 매질과 중노동으로 한 사람의 육체와 정신 모두를 황폐화시켰다.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미쳤던 세상이었다. 그토록 역겨운 집단적 사이코 증세가 어떻게 그리 오래 지속될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게 '잘못'이라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걸까. 박물관 곳곳에서는 노예제에 관련된 문구들이 여기저기에 쓰여 있었다. 그 중에는, 노예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이전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확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글귀가 있었다. 세계 평화 같은 건 너무 거창하고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다만 이 세상이 사람을 사람으로 인식하는 정도는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누군가의 인생을 오직 수단으로만 대할 권리 같은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폭력적이고도 잔혹한 착취가 리버풀의 번영과 성공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는 걸, 그래서 그들 도시의 성장과 호황은 아주 비뚤어진 방식에 의존했다는 걸, 다행히 이 도시는 인지하는 중이었다. 이런 기본적인 상식과 양심이 왜 그때는 피어나지 못했을까. 모두가 미쳐있었다는 두루뭉술한 변명이 잘못에 면죄부를 부여할 수는 없다.


노예제 박물관은 단순히 그때의 참극만을 다루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분별 없는 노예제로 인하여, 어떻게 아프리카인들의 디아스포라가 발생하게 됐고, 그것이 또 세계 여러 나라에서의 흑인 인권 문제로까지 이어졌는지 큰 틀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이를 통해, 자신들의 가해 행위가 지난 몇 세기 전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피해자를 생산해내는 악순환의 구조를 설계했음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관심을 독려하는 중이었다. 가해자의 반성과 노력. 이렇게 끔찍한 착취의 순간들을 지켜보면서도, 한 편으로는 조금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던 건, 그래도 이 가해자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어떤 면에서 잘못됐고, 또 어떤 부조리한 결과를 낳았는지 면밀히 분석하고, 이해하고, 또 뉘우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극악한 제국주의 열강의 피해자였던 국가의 국민으로, 이는 무척이나 생경한 모습이었다. 우린 36년간 일본의 식민지였다. 식민 통치 역시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다. 우리 땅은 일본의 대륙 진출을 위한 교두보였을 뿐이었고, 우리 사람들은 고작 그들의 군국주의 열망에 착취된 노동 인구였다. 여성들 중 상당수는, '위안소'라는 곳에 끌려가 성적 자기 결정권은 모두 박탈 당한 채 강간과 성폭력에 준하는 날들을 매일같이 살아내야 했고, 그런 도중에 생명권까지도 상시 위협받았다. 기본권이라는 게 없었다. 존엄, 권리, 자유, 평등 모두를 박탈당했다. 그런 가해자의 영사관 앞에, 정부 차원도 아닌 민간단체가 소녀상을 설치했다. 피해자 국가의 정부는 이를 오히려 저지하려 했고, 가해자 국가는 뻔뻔스럽게도 소녀상 설치를 비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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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은 항상 있다. 양국간의 화해와 협력이다. 그러니 일본 총리라면 공사가 아무리 다망해도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꼭 <러브 액츄얼리>를 한 번 쯤 보기를 권한다. 거기 영국 총리가 미국 대통령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관계라는 말 좋죠. 모든 악행들을 덮어버리니까요.(Covers all manner of sins.)" 자신들 나라에 '노예제 박물관' 같은 교육 시설을 만들고, 이후 어느 세대라도 그 끔찍한 폭력행위를 답습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시원찮을 상황인데, 거기다 대고 양국간의 합의를 준수해야 한다며 되려 피해자를 압박하고 있다. 오늘 리버풀의 '노예제 박물관'에는 교복을 입고 견학 온 학생들이 아주 많았다. 자신들 역사의 가장 비양심적이고, 폭력적이며, 누군가의 인권과 존엄에 그토록 이나무신경했던 그 시대의 참상과 현재까지의 악영향들을 어린 학생들은 배우고,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 영사관 앞에 모든 비극적인 역사를 함축하는 소녀상이 하나 설치됐다고, 외교니 경제니 운운하며 견딜 수 없는 후안무치함을 당당하게 보이는 어떤 국가의 행보와는 무척이나 대비됐다. 그들이 재단 설립 기금이라고 내놓은 금액은 단 10억엔, 우리 돈으로 약 100억원이다. 100억원의 몇 배가 되는 돈을 받더라도, 과거의 역사가 일거에 청산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용서는 진정어린 사과와 반성이 전제될 때만 가능하다. 더군다나 한 국가와 그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반인륜적인 행위조차 서슴치 않았는데, 이를 교통사고 보험 처리하듯 하는 건 2차 가해에 가깝다. 그러면서 동반자니, 화해니, 협력이라니. 이건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 역겨운 뻔뻔함 아닌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들이 숫자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게 그리 놀라운 사실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억원이라는 이 숫자를 볼 때 마다 참 기가 막힌다. 단순히 비교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조금 직관적인 대조를 위해 프로야구의 FA이적 시장을 한 번 살펴보자. 향후 4년 동안의 경기력을 향상시키겠다는 목적으로, 각 팀들은 한 스타 선수에게 100억 정도의 돈을 쾌척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삼성에서 LG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차우찬은 4년간 95억을, KIA로 간 최형우는 100억원을 받게 된다. 메이저리그에서 뛰다 롯데로 복귀한 이대호의 계약 조건은 4년 150억이다. 일본의 100억에는 어떠한 반성도, 미안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귀찮게 하지 말고 이거 먹고 떨어져'라는 느낌이 더 크다. 이 금액이 '합의'로 이루어졌다는 게 더욱 경악할 만한 일이다. 도대체 어떤 계산으로 100억원이란 숫자를 도출해낸 건가. 이 무의미하고 뻔뻔한 100억원이 역사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겠는가. 한 선수에게 지급되는 계약 조건보다도 못한 금액이, 실질적인 효과는 차치하고서라도 어떤 상징이라도 될 수 있는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일말의 미안함 조차 담겨있지 않다. 그런데 이걸, 여태껏 어떤 정부도 못한 '보상'을 받아냈다며 선전하고 다니니.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 지 그저 난감하고 답답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노예제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잊는다면, 그건 선조들을 아프게 할테니까요(People need to remember about slavery. It pains the ancestors when we forget)." 리버풀의 노예제 박물관에 있는 글귀다. 그들은 기억하겠다고 한다. 자신들의 끔찍한 잘못을, 실수라고도 부를 수 없는 잔혹행위를, 기억하겠다고 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조그만 실수를 한 일도, 훗날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부끄러워 떠올리기 조차 싫을 때가 있다. 노예제는 국가 단위 이상의 집단적 폭력 및 착취 행위였고, 리버풀은 그것이 가장 만연했던 도시였다. 역사를 기념하거나 떠올릴 때면, 으레 자랑스럽고 내세울 만한 것들을 선별할 때가 대부분이다. '국정교과서'라는, 이 정부의 가장 한심한 정책도 이런 취지에서 기획되었다.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건 사실 '용기있다'고 칭찬하기도 아까울 만큼 당연한 일이다. 캐스커라는 밴드의 프로듀싱을 맡고 있는 이준오는 영화 <어나더 어스>를 설명하며, "세상에서 '내 죗값'을 충분히 치뤘다는 말처럼 바보같은 말도 없다"는 말을 했다. 용서의 주체는 오로지 피해자에게 있으며, 그 결정권의 주체성은 누구에게도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이를 쉽게 잊고 용서할 권리같은 건 없다. 그런 게 있다면, 알아서 자진 반납해야 한다. 끔찍한 가해 행위를 겪은 피해자가 직접 나서서 사과를 촉구하는 것도 비참한 일인데, 오히려 자국 정부가 그것을 자제토록 하는 촌극이 진행중이다. 누군가는 영화 <더 테러 라이브>를 보고, '잘못했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면 20분도 안 되어 끝났을 영화가, 그 한 마디가 끝내 나오지 않아 두 시간이 되었다고 평한 적 있었다. 그들에게 양심과 상식이 있다면, 진심어린 사과가 우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어느 정도의 금액으로 지난 역사를 '퉁'치려는 천박한 사고방식 대신, 책임있는 사과로써 용서의 기회를 구하기를 바란다. 이는 자존심이 아닌 양심의 문제고, 인권과 존엄의 영역이다. 그 어떤 정치적 명분도 이를 초월할 수는 없다.


외고 입시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서, '인권선언문'이니 뭐니 온갖 아는 체를 다했지만, 나는 결국 그 학교에 합격하지 못했다. 인생에 있어서의 첫 '탈락'을 경험한 시험이었다. 합격자 명단에 없다는 무미 건조하고도 명료한 그 문장 앞에서 한참을 울었다. 삶은 숱한 거절들의 연속이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의 불합격이 바로 그 시작이었다. 그 후 3년이 지나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또 이제는 취업 준비를 목전에 두니, 당시의 분함과 억울함은 어느새 희미하다. 어쨌든 고등학교 입시가 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걸 지금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일을, 그리고 내년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오늘까지가 그의 인생의 전부다. 그러니 불합격의 충격과 슬픔에 헤매이던 내게, 앞으로의 대학 입시를 비롯하여 살면서 중요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따위의 어줍잖은 위로와 충고는 그저 비정하고도 무의미한 언어들이었다. 소기의 성과는 거두었던 대학 입시 덕분에 3년 전의 상처는 가까스로 무뎌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잊히지는 않았다. 지금도 가끔은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라는 문구가 떠올라 소름이 돋고, 불합격으로 파생된 몇몇 일들은 아직껏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외고 입시는 내 선택의 결과였다. 그에 맞춰 준비하겠다고 한 것도, 또 도전을 결심한 것도, 물론 당시 주위의 바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최종적인 선택자는 나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실패로 인해 한동안 많이 앓아야 했다. 철저하게 자의적인 선택지였고, 그래서 실패의 가능성 역시 염두해두지 못 한 건 아니었지만, 슬픔과 좌절 앞에서는 한없아 무기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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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리버풀 노예제 박물관에는,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삶이 황폐화 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었다. 그들 자신들 뿐 아니라, 지금까지의 후손들 역시 얼마나 심각한 트라우마와 후유증, 그리고 여러 문제들 속에 봉착하여 살고 있는지도 소개되었다. 오래 전 왕성했던 노예 사업때문에, 지금도 아주 많은 사람들은, 생존이 아니라 잔존하고 있다. 그 어떤 사과로도 치유할 수 없는 트라우마는 현재 진행중이다. 거기서 나는 역시 본인의 의지라고는 단 조금도 없이, 식민 국가의 피착취자라는 이유만으로 갖은 폭력과 갈취를 당했던 사람들을 함께 떠올렸다. 후자의 가해자들은 여전히 조금도 반성하고 있지 않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또 계획적으로 개별적인 삶들에 돌이킬 수 없는 생채기를 내놓고도, 오히려 자신들이 되려 '잊음'을 강제하고 있다. 도무지 무뎌지지조차 않는 상처를, 잊으라고까지 하는 그들이다. 리버풀 노예제 박물관은, 자신들의 만행을 계속 '기억'하겠다고 했다. 그건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기억일 테다. 이 박물관으로 견학 오는 학생들 역시, 자신들 도시에서 자행됐던 수치스러운 역사에 마냥 떳떳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린 마냥 떳떳하지는 못한 그 부끄러움을, 염치나 양심, 혹은 윤리의식이라 부른다. 염치나 양심, 혹은 윤리 의식 모두가 결여된 국가의 입에서 나오는 '화해'니 '협력'이니 하는 것들은 위선에 가깝다. 세상에 자본의 논리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지만, 그것이 판단 잣대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김훈 작가는,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받는 자의 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리버풀 박물관에는 이런 문구도 있었다. '자유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다.' 과거의 트라우마와 지독한 상처로부터 조금이라도 자유롭기 위해, 여전한 고통속에서 힘겨이 투쟁하는 이들이 아직 존재한다. 나라는 독립했지만, 과거의 역사와 괴로움으로부터의 자유와 홀가분함은 아직 요원하다. 진심어린 사과와 반성은 그 기미조차 안 보이기에, 더욱 요원하다. 그러니 이들의 고통은 독립과 동시에 끊어진 불연속함수가 아니라, 지금껏 계속되는 현재진행형의 트라우마다. 시간이 지나며, 이 심각한 트라우마는 공동체 전체의 아픔으로 전이되었다. 그래서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큰 목소리를 내고, 행동을 실천하고 있다. 집단적 트라우마를 함께 치유해나가는 과정이고, 노력이다. 나는 국가가 이들의 편이었으면 한다. 모든 것을 자본의 논리로 환원하는 천박함 대신, 사람은 사람으로 대하고, 사람의 고통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따뜻함과 품격을 갖춘 국가이기를 바란다. 내 나라가 고통받는 자들의 대리인이었으면 한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영화 <어나더 어스>의 수록곡, 'Forgiv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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