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야 우리 숙모님 지금 방콕 계신단다. 밥 사주신다는 니도 갈래?”
숙소에서 기선이와 하루종일 뒹굴 거리다 6시까지 기선이 숙모님과 저녁 약속이 있어 5시쯤 나와 환전을 하고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는 미터기로 안가고 그냥 250바트에 아속역까지 가자고 하늘 걸 200바트로 깎아서 가자고 했다. 막상 출발해서 카오산 근처만 조금 벗어나니 불금에다 퇴근 시간까지 겹쳐 차가 움직일 생각을 안한다.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면 두 번 정도는 다시 앞차를 보내야 간신히 통과한다. 결국 30분이면 갈 거리를 한 시간 넘게 걸려서 도착했다. 미터기로 갔으면 큰일 날 뻔 했다.
6시 50분쯤에 아속역에 도착했다. 역시 숙모님은 안계셨다. 혹시나 해서 한 시간만 기다리다 가기로 했다. 아속역 출구마다 다 둘러보고 역 위에도 있다 밑에서도 서성이며 한참 기선이와 얘기를 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인도인처럼 생긴 남자가 말을 걸어 온다. 캐나다인이란다. 절대 거짓말이다. 영어 억양이 그냥 인도였다. 기다리면서 시간이나 때우자 싶어 그냥 잠깐만 이야기나 해볼까 하고 받아줬다.
“일본인이시죠? 저 곧 일본 가는데 일본돈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혹시 보여주실 수 있어요?”
한국인이라고 일본돈 없다고 하니 말을 바꾸며 한국도 다음에 가는데 한국돈도 보고싶다고 한다.
참 나도 순진하다. 지갑을 펴서 보여주면서 없다고 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내 지갑을 가져가더니 직접 살핀다.
“와우, 태국돈이랑 이건 싱가포르 돈이고, 잠깐 이건 뭐지. 호주돈도 있네요. 저기 보이는 은행이 환율이 좋아요. 저기서 환전하면 되요”
하며 은행을 가리키길래 봤더니 내손에 지갑은 다시 쥐어져 있고 그 남자는 없다. 뭔가 그냥 급한 일이 생겼나보다 하고 말았는데 옆에 지나가는 서양인이 소리친다.
“방금 그 남자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서 호주머니에 넣었어요. 저기 뛰어가네요! 저기! 저기!”
그 남자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쳐다보니 차가 쌩쌩 다니는 6차선에서. 이미 5번째 도로를 가로질러 뛰어가고 있다. 잡으려고 얼른 뛰어나가니 온갖 툭툭과 오토바이와 차들이 빠르게 달리며 나를 가로막는다. 정신 차려보니 이미 그 남자는 사라지고 없다. 지갑에 얼마를 넣고 다니는지 세어보지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호주 달러 500불은 없어졌다. 황당하고 내 자신에게 화도 나서 멍하게 한동안 서 있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다.
그 동안 그렇게 악착같이 아낀 돈을 한번에 어이없이 날려버리니 헛웃음만 나온다. 말 그대로 눈뜨고 코 베였다.
이 기분으로 도저히 숙소로 못 돌아갈 것 같아 근처에 한인 식당에서 소주 한잔하면서 풀기로 했다. 여행할 때 돈 아낀다고 비싼 한인식당에는 근처에도 안 가지만 오늘은 안되겠다. 삼겹살과 순두부찌개를 먹고 싶은 만큼 시켜 소주 한병씩 했다. 그나마 진정이 된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좀 쉬다 기선이와 클럽에 갔다. 금요일 밤이라 사람이 정말 많다. 카오산 한 가운데 있는 클럽 카오산에서 놀다 초입에 있는 걸리버라는 곳으로 옮겼다. 여기는 여행자들보다 태국사람들이 훨씬 많고 클럽보다는 바 같은 느낌이다. 태국 여자들이 우리한테 관심을 많이 보인다. 특이한 차림의 외국인인 우리가 신기한가 보다. 그 중에 친구로 보이는 태국 여자 셋 중에 하나가 기선이한테 홀딱 반해서 어쩔줄 몰라 한다. 같이 온 친구 둘은 딱 봐도 레이디보이다. 큰 키와 우람한 어깨다. 그래서 기선이랑 잘 되라고 밀어줬는데 알고 보니 셋 다 레이디보이였다.
기선이는 황당하고 열받고 만감이 교차하나보다. 그렇게 세시가 좀 넘어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기선이는 계속 열이 받는지 씩씩거렸다. (그렇게까지 화가 날 필요가 있을까 했지만) 술도 좀 취했다. 그렇게 운 없는 하루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