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에서 마가렛리버가기
슬슬 돈에 대한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기선이는 정말 한국에서 내가 말한 딱 그대로 비행기 값만 벌어서 여기로 왔다. 골드코스트에서 모은 돈도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는 게 느껴진다. 나 혼자면 그럭저럭 버티겠지만 기선이한테 일단 1000불을 빌려주고 나도 수입 없이 지출만 있으니 빠듯하다.
그 와중에 아껴서 피자고 했던 레종 초콜릿 맛 한 보루는 이제 한 갑이 남았다. 이런 상황이 올지 절대 몰랐겠지. 내 사람들 중에 사람 좋은 걸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기선이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씩 펴 보라고 담배를 하나 둘씩 뿌리더니 이제 돈도 없는데 비싼 담배를 사서 펴야 할 지경이다.
소라형한테 들은 정보대로 Margaret River로 내려가기로 했다. 세컨드 비자도 따고 농부 경험도 해보고 싶었다. 마가렛리버는 퍼스에서 남쪽으로 다섯 시간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다. 소라형은 거기에 와이너리가 유명하니 포도 농장이 꽤 벌이가 쏠쏠할 거라고 했다. 이제 슬슬 돈을 벌어야 하니 농사 지으러 가자.
큰일이 아니고선 기선이한테 영어를 시킨다. 음식 주문 같은 간단한 거부터 이번에는 버스 예약도 시켰다.
“버스 예약할 수 있겠어? 내일 버스로 몇 시에 어디서 타는지 물어봐”
“아 걱정마라. 갔다 올께”
기선이는 티켓 오피스로 당당하게 걸어 갔고 나는 멀찌감치 서서 담배 하나 폈다.
생각보다 얼마 걸리지 않고 돌아온다. 담배 하나를 다 피기도 전에 웃으면서 오더니
“야 아침 9시 30분 East Perth에서 출발하는 버스표 끊었다. 5시간쯤 걸린다니까 2시반쯤이면 마가렛리버에 도착할꺼야. 9시에 퍼스 스테이션으로 가서 기차타고 East Perth로 가라는 것까지 완벽하게 알아왔다”
오늘로 퍼스에서의 백수 생활도 마지막이구나 하고 열흘 동안 매일 걸었던 길도 새삼 아쉬워하며 다시 걸어보고 돈이 이제 떨어져가니 마지막으로 서브웨이 샌드위치도 먹고 카타르에서 맨날 피던 시샤도 폈다. 마지막 사치다. 마가렛리버에 가서는 열심히 일만 해야지.
퍼스를 떠나는 날이다. 하늘은 여느날들보다 더욱 파랗다. 배낭을 메고 아일랜드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숙소를 나왔다.
기선이가 알아온 정보대로 퍼스 스테이션에서 9시쯤에 기차를 타고 East Perth로 갔다. 기차는 15분쯤 걸려서 도착해서 시간이 좀 남아 버스에 올라타기 전에 둘이서 담배 하나씩 폈다. 그리고 버스 타는 곳으로 가서 기다리는데 9시 반이 되어도 버스는 오지 않는다.
뭔가 이상하다.
쌔한 느낌에 기선이 대신 내가 직접 티켓 오피스로 가서 물어봤다.
“여기서 9시 반에 마가렛리버로 가는 버스 예약했는데 버스가 안 와서요”
직원은 시간표를 가리키며 말한다.
“9시에 여기서 출발해서 9시 반에 퍼스 스테이션 경유해서 가는 버스를 예약했네요. 이미 출발했으니 다음 버스는 12시 반에 있어요”
미치겠다. 기선이가 잘못 들었다. 경유라는 말을 잘 못 듣고 굳이 퍼스 스테이션에서 기차를 타고 여기까지 왔다. 거기서 그냥 기다리다 경유하러 잠깐 멈추는 버스 타고 마가렛리버로 가면 되는 거였다. 어떻하지.
기선이는 다시 추욱 처져있다. 시간도 날리고 돈도 없는데 티켓도 날리게 생겼다.
“잠깐만 기다려봐”
나는 다시 오피스로 갔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제 친구가 아직 영어에 서툴러서 실수를 좀 했는데 이 표 다음 버스표로 바꿔주시면 안되나요? 지금 우리 둘 다 일을 안하고 있어서 이 돈이 정말 크거든요. 부탁합니다”
다행히 직원은 웃으며 흔쾌히 표를 바꿔줬다. 이제부터 표 끊는 거는 내가 하기로 했다. 시간이 붕 떠서 아침 일찍 나오느라 못 먹었던 밥을 대충 사먹고 커피도 한잔하고 12시 반에 버스에 올라탔다.
5시간 동안 가는데 중간중간에 정말 오래 쉰다. 총 두 번을 쉬었는데 한번 버스가 멈추면 한 시간은 안간다. 결국 3시간 거리를 5시간 동안 가는 것이다.
저녁 5시 반쯤 마가렛리버에 도착했다. 엄청 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