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그럼 지금 택시타고 거기로 갈께”
굳이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되는데 너무 고맙다. 한 시간쯤 담배 몇 개 피고 있으니 해맑은 얼굴의 수지가 저 멀리 보인다. 그리웠던 방콕과의 재회다.
2주만에 간 지니네 게스트하우스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몇 명이 와있다. 조각미남환상이, 예쁜 은미, 이런 배낭여행이 처음이라는 혜원 누나 그리고 온몸이 하얗고 둥글둥글한 두부 같은 혜진이까지. 나는 처음보지만 다들 나를 아는 눈치다. 미얀마에 잠깐 가 있는 동안 내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아는 사람 같단다. 그리고 항상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있다.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기선이는 항상 그랬듯이 누워서 만화책을 읽고 있고 동혁이 형과 선혜, 동동이도 그대로다.
미얀마에 있다가 다시 방콕으로 오니 여긴 정말 세련된 도시다. 와이파이도 잘 터지고 정전도 되지 않는다. 길거리에는 항상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고 에어컨이 빵빵한 편의점도 많다. 한참 밀린 미얀마 얘기를 해주고 다시 기선이에게 캄보디아에 갔다 오라고 설득했다. 이러다가는 방콕에서만 있다가 아니 지니네에만 딩굴거리다 한국으로 갈 것만 같았다. 마침 혜진이가 캄보디아에 갔다 온지 얼마 안돼서 설득하기 좀 더 쉬웠다. 또 마침 혜원 누나도 캄보디아로 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래서 기선이와 혜원 누나를 캄보디아에 보냈다. 그리고 다시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지니네에 누워있는 나로 돌아왔다.
노트북으로 스타크래프트 하다 누워서 만화책 읽다 배고프면 밖에 잠깐 나가 국수 먹고 와서 낮잠자다 목마르면 맥주 한 병 사먹고 옆 사람과 얘기하다 밤이면 카오산에 잠깐 나가 놀다 하는 하루가 반복되었다. 그러다 한번씩 방콕에 처음 온 사람들이 있으면 여기저기 추천도 해주고 심심하면 같이 가 주기도 했다. 새카만 얼굴에 머리는 레게 머리를 하고 계속 한 곳에 앉아 있으니 내가 주인인줄 알고 숙박비를 내기도 하고 주인 누나들이 없을 때는 손님도 받고 방 안내도 해주었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나니 기선이와 혜원 누나가 큰 캐리어를 끌고 지니네로 다시 돌아온다. 혜원 누나 없을 때 기선이 얘기를 들으니 너무 힘들었단다. 누나는 여행을 많이 안 해봐서 짐이 너무 많아 캐리어 두 개를 끌고 갔다. 그 짐은 대부분은 기선이 몫이었다. 기선이는 작은 백팩 하나만 메고 갔다. 차를 무서워하는 기선이는 신호를 잘 보고 완전히 차가 없을 때 길을 건너는데 누나는 너무 대충 건너서 말리느라 고생했단다. 다행히 폭발하기 직전에 여행이 끝나서 안 싸우고 무사히 방콕에 왔단다.
그렇게 며칠 쉬다 이제 돌아갈 날이 얼마 안 남아 바다가 보고 싶어 코사멧으로 가기로 했다. 움직이기 싫어하는 기선이를 설득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태국에 왔으니 바다는 한번 봐야 되지 않겠나 하는 이론으로 열심히 꼬셨다.
여행사에 예약해서 열심히 미니벤으로 이동해서 코사멧에 도착하니 이미 하루가 다 갔다. 적당한 곳에 숙소를 잡고 편의점에서 먹을 거리를 잔뜩 사와서 맥주 한잔하며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부터 숙소 앞 5분 거리에 있는 하얀 모래밭에 에메랄드 빛 바다가 조용히 잦아드는 바다에서 놀았다. 방콕도 뜨겁지만 해변은 더 뜨겁다. 가만히 서 있어도 살이 타 들어가는 것 같다. 사람이 거의 없는 코사멧 해변은 조용하고 편안했지만 너무 뜨거워서 한 시간 정도 놀고 다시 시원한 에어컨 밑에서 맥주 마시며 쉬었다.
다시 방콕으로 돌아왔다. 6월 초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우기가 시작되는 것 같다. 비가 몇 시간 동안 퍼붓다가 그치는 스콜성 장마지만 이제 비가 안 오는 날은 없다. 잠시 개어있을 동안에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한다. 배낭여행자에게 우산은 사치다.
그렇게 한달 좀 넘게 빈둥빈둥 태국에서의 시간이 끝이 났다. 그 동안 정이 든 사람들이랑 헤어지기 아쉽지만 가야한다. 유나누나가 택시비를 내줄 테니 버스타지 말고 택시타고 공항으로 가란다. 마지막 선물이란다. 밤 비행기라 배낭을 메고 밖을 나서는데 비가 툭툭 떨어지기 시작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떠나는 모습이다. 너무 고맙게 지니네 모든 사람들이 나와서 마중을 해준다. 한 사람씩 악수와 포옹을 하고 다시 꼭 만나기로 했다. 기선이는 조금 더 방콕에 있다 한국으로 오기로 했다. 택시를 타고 손을 흔들고 비 때문에 창문이 흐려지고 사람들도 흐려진다.
잠깐 한국에 있다 다음 여행지인 중국 비자를 받아서 바로 다시 나가야 한다. 곧 또 다시 올 거지만 방콕을 떠날 때는 항상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