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식쿨
어제 맥주 한잔하고 밤새 떠들다 잠들어서 다들 얼른 못 일어났다. 유일한 아침형 인간인 나는 혼자 일찍 일어나 숙소 앞에 앉아 담배 하나 피며 평화로운 아침을 즐겼다. 우리 방 앞에는 유목민인 키르기즈인들의 전통 가옥인 유르트가 있다. 여기서 하루 지내도 될 거 같다고 생각은 드는데 비싸기만 하고 어마어마하게 추울 거 라는 말에 그냥 이 방에서 하루 더 묵기로 하자 하고 혼자 생각했다.
다들 퉁퉁 부은 눈으로 하나 둘씩 일어난다. 숙소 아주머니한테 모닝 커피를 받아와서 잠을 깨고 간단하게 숙소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밖으로 나갔다.
햇빛이 쨍쨍거리는 이 도시 이식쿨은 너무 멋졌다. 어제는 이 도시를 제대로 즐길 틈도 없이 숙소를 찾았다는 것에 감사하며 얼른 짐을 풀고 간단하게 산책 겸 시장에서 밥만 먹었지만 오늘은 끝도 없이 펼쳐진 광활한 도로를 따라 걸으며 마음껏 이식쿨을 만끽했다.
이식쿨호는 너무 넓어서 우리가 간 곳은 호수의 일부겠지만 일단 호수를 따라 걷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분명히 호수인데 잔잔한 파도가 친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해변 같은 모래밭도 있다.
가만히 누워 선탠을 하다 아키가 가져온 원반을 던지며 놀았다. 그러다 더워서 웃통을 벗고 물에 들어가려고 물에 손을 넣어보니 호수는 얼음장같이 차갑다. 아쉬운 대로 모래사장에서 놀다 더워지면 잠깐 물에 들어가길 반복하며 기념 사진도 찍고 오는 길에 사온 맥주도 한 캔씩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우리밖에 없는 이 곳을 떠나 다시 길을 따라 걸었더니 시장이 나온다. 어제 갔던 곳과 다른 시장으로 들어간 우리는 일단 요기를 하고 시장 구경을 해봤다. 우리는 아직까지 아는 음식이 러시아식 국수 라그만 밖에 모른다. 그래서 라그만을 시키고 다른 친구들은 인터넷에서 조사해 본 러시아식 볶음밥 플로브를 시켜서 먹어봤다. 아직까지는 라그만 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어제는 해가 질 무렵이라 어둑어둑해서 가게 문을 닫기 시작해서 제대로 못 봤는데 오늘 보니 신기한 물건들이 많았다.
어느 나라를 가던 시장이나 학교에 그 나라의 문화와 삶이 가장 잘 녹아 있는 듯하다. 어느 가게 앞을 지나도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아 주신다. 물론 말은 전혀 안 통한다. 러시아어인지 키르기즈 언어인지 모르겠지만 무언가 다들 우리에게 말을 하시는데 우리는 미소로만 응답하고 지나갔다.
키르기즈 전통 모자도 써보고 했지만 짐이 될꺼 같아 사지는 않고 그냥 나왔다. 아키는 생각보다 잘 어울려서 하나 구입했다. 몽골 여행을 하고 온 빡빡 머리의 아키는 생김새와 모자가 너무 잘 어울려 이때부터 별명은 몽골리안.
열심히 물놀이를 하고 많이 걸은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맥주 한잔씩을 하며 카드 놀이를 하며 하루를 정리했다.
각자 샤워를 하고 방에서 쉬며 각자의 삶 얘기를 했다. 머리가 길어 첫 인상이 강렬했던 사토시상. 동안 외모와 다르게 나랑 띠동갑인 형님이시다. 일본에서 디자인 일을 하고 있고 자기 브랜드도 런칭했다고 하신다.
‘코슈 바 코슈’
사토시상의 브랜드이다. 잠깐만 기다려 보라고 하시더니 가방에서 브랜드 앰블럼을 꺼내서 보여주신다. 그래서 혹시 이거 내 가방에 달아주실 수 있냐고 물어보니 흔쾌히 허락하시며 실과 바늘을 꺼내서 한땀한땀 정성스럽게 앰블럼을 달아주신다. 내 가방에 단 앰블럼을 보고 너도나도 다 옷에 가방에 티셔츠에 달아달라고 하는 바람에 사토시상만 난처해졌다. 그래도 웃으면서 다 달아주셨다.
여기서 의외였던 사실.
디자인업계에서 흔히 말하는 메이드인 어디. 예를 들어 메이드인 차이나. 특히 옷 같은 경우 브랜드를 보면 메이드인 이태리. 메이드인 프랑스 같은 것을 많이 보는데 사실과 조금 다를 수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제품을 만들고 마지막 바느질 한땀을 일본에서 하면 그건 메이드인 재팬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내 가방은 갑자기 메이드인 키르기즈스탄이 되었다. 사실 내 가방은 라오스 루앙프라방에서 산건데.
다음날 아침.
또 다들 퉁퉁 부은 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우연히 알게 되어 너무 만족스러웠던 숙소에 체크아웃을 하고 짐을 맡겨 놓고 어제 갔던 시장으로 가서 밥을 먹었다.
이리저리 식당을 찾다 우람한 팔뚝과 멋진 모자가 인상적인 아저씨 가게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 인터넷에서 찾아온 음식을 이것저것 시켜서 맛있게 먹었다. 아저씨 사진을 찍으니 멋진 포즈를 취해주신다. 말은 안 통해도 정은 느낀다.
짐을 찾아 다시 비슈케크행. 기대하지 않았던 만큼 더 즐거웠던 이식쿨. 그립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