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슈케크
다시 이식쿨에서 비슈케크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무난했다. 무난하게 택시를 잡아 타서 버스 터미널로 갔고 무난하게 미니벤을 찾아서 적당한 가격에 탔으며 이식쿨로 올 때처럼 보드카 파티 같은 건 없었다. 그대신 따뜻한 햇살과 눈이 시릴 정도의 멋진 풍경에 감탄했다 꾸벅꾸벅 졸다 하며 다시 비슈케크의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문제는 도착한 다음부터 시작되었다.
미니벤에서 내려 로컬버스를 타고 다시 사쿠라게스트하우스로 가려는데 내가 입고 온 파란색 나이키 바람막이가 없다. 미니벤에 놔두고 내렸나 보다. 사실 이런건 자주 있는 일이다. 평소에 꼼꼼하지 않고 덜렁덜렁 하는 성격이라 자주 물건을 잃어버린다. 중국에서 폰을 놔두고 다른 도시로 이동했을 때랑 똑같다.
사실 그렇게 아끼는 옷도 아니고 이 바람막이가 없어도 여행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지만 나름 내가 가지고 있는 옷 중에 제일 비싼 거다. 그냥 바람막이지만 나름 나이키. 찾기로 했다.
그런데 이미 미니벤에서 내리고 20분은 흐른 상태. 그 많은 미니벤 중에서 어떻게 우리가 타고 온 것을 찾을 거며 당연히 영어는 안 통하고 미니벤에 적혀있는 키릴문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었다. 더 최악인 건 우리가 몇 번 버스를 타고 왔는지 아무도 신경 써서 기억하는 사람도 없었다.
친구들한테 미안해서 먼저 숙소로 가있으라고 했지만 의리의 이 친구들은 백방으로 미니벤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다 거기서 거기같이 생긴 미니벤들을 한참 찾다 나츠코가 외쳤다.
“야! 내 카메라에 미니벤 번호 찍은 사진이 있어!”
다들 모여서 카메라를 봤더니 번호도 있고 기사 아저씨 사진도 있다. 우연히 풍경 사진 찍으려다 얻어 걸렸다.
카메라를 들고 다른 기사 아저씨들한테 무작정 달려갔다. 사진을 보여주며
“이 기사 아저씨 아세요?”
그랬더니 아는 눈치다. 자기들끼리 키르기즈어로 뭐라뭐라 말하더니. 손가락으로 식당을 가리키며 밥 먹는 제스처를 취한다. 이거다.
식당으로 가서 사진을 보여줬더니 옆에서 밥 먹던 아저씨가 방금 밥 다 먹고 나갔다는 제스처를 보여주고 따라오란다. 따라갔더니 그토록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었던 사진 속의 기사아저씨가 계신다. 아저씨에게 파란색 물건 아무거나 가리키며 옷 있냐고 물어보니 미니벤에 들어가서 꺼내주신다.
“땡큐 땡큐 스파씨바 스파씨바”
10번은 외친 거 같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숙소로 도착.
역시 사람들이 붐비는 사쿠라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는 자리가 없단다. 우리가 네 명이니 트윈 룸에서 두 명씩 자라고 하신다. 트윈룸 가격은 1000솜. 한 명에 500솜씩 내면 된다. 도미토리는 한 명에 400솜인데. 어쩔 수 없다.
두 명씩 자기로 하고 구빠를 하자고 한다. 한국에 묵찌 같은 개념인데 일본에서는 묵이랑 빠를 내서 정한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사토시상과. 아키는 나츠코랑 머물게 되었다. 블로그 소년 타쿠야는 아직도 도미토리에 있으며 열심히 블로그를 쓰고 있었다.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나오니 타쿠야가 비장한 얼굴로 말한다.
“중대발표할게 있으니 밥 먹으면서 얘기 좀 하자”
그러고는 자기가 알아 놓은 맛있는 중식당이 있다고 해서 다 같이 갔다.
맨날 먹는 라그만에 조금씩 질려가는 찰나에 잘됐다 싶었다. 생각보다 고급스러운 느낌의 이 중식당은 맛도 괜찮았다.
“내가 숙소에 있으면서 타지키스탄 정보를 이것저것 알아봤는데 루트를 대충 정했어. 여기서 오슈로 가서 지프를 쉐어해서 국경을 넘어 파미르 고원으로 갈꺼야. 그리고 여기로 가서 여기로 가고 그 다음은 여기고 근데 여기는 숙소가 거의 없어서 좀 알아봐야 할거고..”
그 날 우리는 타쿠야를 우리 멤버의 대장으로 임명했다. 나와 동갑내기인 타쿠야는 첫 여행을 세계 일주로 나와 우리 멤버 중 가장 여행 초보이다. 역시 이 정보에는 헛점이 많았고 대장직은 곧 나로 바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