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정도 아무것도 안하며 마날리에서 평화롭게 지내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이렇게 누워있다 날이 어두워지고 내일이 다가오겠지’
그 생각이 들었을 때가 아침 11시 40분쯤. 체크아웃 시간이 12시라 좀 억지긴 했지만 륭법이한테 말했다.
“륭법아 이렇게 또 누워있다 하루 가는거 조금 지겹지 않냐? 오늘 그냥 델리로 갈래?”
“그래 나는 어차피 델리에서 아웃이라 가긴 가야해”
그래서 나는 다시 물었다.
“야스 쟤도 가자고 하면 가겠지?”
륭법이는 웃으며 말했다.
“야스 쟤는 니가 가자고 하면 어디든지 갈 애잖아. 그냥 짐 싸라고 그래”
그리고 야스한테 물어보니 당연히 오케이란다. 숙소 아저씨한테 급히 나가야한다고 말하니 다행히 체크아웃시간이 30분 지났는데 괜찮단다. 그래서 후딱 짐을 싸고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어제 여행사에서 VIP 버스 가격을 물어보니 1000루피가 넘어서 그냥 로컬 버스를 타기로 하고 티켓을 샀다. 가격은 3분의 1이었다. 그렇게 륭법이 야스 그리고 나. 이 세 남자는 금방이라도 멈춰버릴 것 같은 허름한 버스 맨 뒷자리에 쪼로롬 앉아서 델리를 향해 출발했다. 나는 다른 도시로 가기 전 짐싸기. 그리고 다른 도시로 가는 버스에 탑승 할 때 가장 설레인다.
그러나 설레임도 잠시. 이 버스를 탔다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여행하며 정말 많은 장거리 버스와 기차를 탔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버스였던 것 같다.
맨 뒷자리에 앉은 우리는 일단 뒤로 의자가 젖혀지지 않는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가야 한다. 앉은 의자는 정말 딱딱했는데 문제는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부분이 앞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계속 앞으로 미끄러졌다. 신경쓰고 앉아 있으면 그래도 미끄러지지는 않는데 잠이 들면 앞으로 미끄러져서 놀래서 자꾸 깼다.
이게 다가 아니다. 내 자리는 창가에서 두 번째 자리였는데 내 앞자리 의자만 내 쪽으로 기울어져서 고장이 나 있었다. 나는 너무 좁아 다리를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리고 마날리에서 델리로 가는 도로는 아주 덜컹거렸다. 구불구불 커브길도 많았다. 잠이 들려고 하면 미끄러지고 옆으로 이리치이고 저리치이고 뜬눈으로 계속 보낸거 같다. 휴식 시간에는 피곤하지만 엉덩이가 너무 아파서 계속 서 있었다. 여기에 덤으로 내 옆에는 내 몸의 딱 두배 정도 덩치의 인도 암내 아저씨가 앉아 계셨다. 이렇게 16시간.
그렇게 델리에 도착. 인도 도착 첫날 갔던 호텔 빠얄로 갔다. 다 필요없고 좀 씻고 자고 싶었다. 씻고 나와서 침대에 누우니 잠이 안온다. 너무 피곤해서 잠이 오는데 잠이 안오는 그런 느낌. 침대에 멍하게 앉아 있다 담배 하나 폈다 누웠다 이리 딩굴 저리 딩굴 하다 문뜩 창가에 비치는 한국 식당 쉼터를 보니 레에서 본 것 같은 한국 남자가 앉아 있었다. 반가웠다. 인도여행 내내 한국말을 한번도 못했다. 한국말을 하고 싶었다. 한국 음식도 먹고 싶었다. 륭법이와 야스는 숙소앞 카레집으로 가고 나는 쉼터로 갔다.
다행히 레게 머리를 하고 일본어를 쓰던 나를 기억했다. 덩치가 있고 머리는 짧고 멋지게 수염을 기른 이 남자애는 규화. 강해보이는 첫 인상과는 달리 착하고 예의바른 순둥이다. 직업 군인을 하다 제대하고 인도 장기여행을 왔단다. 이제 여행 일정이 어떻게 되냐고 물어보니 오늘 바라나시로 갈꺼란다. 나는 오늘 너무 힘들게 델리에 도착해서 도저히 오늘은 못 가겠고 내일 바라나시 갈 건데 같이 가자고 하니 흔쾌히 오케이란다. 그리고 오랜만에 신라면에 밥말아서 김치랑 뚝딱 먹고 규화를 데리고 호텔 빠얄로 갔다.
내일 륭법이와 야스 그리고 나는 헤어지고 각자 갈 길을 가기로 했는데 나는 벌써 동행이 생겼다. 호텔 빠얄에서 륭법이와 야스의 여행 루트를 짜줬다. 둘 다 세계 일주를 나오기는 했는데 정확한 계획과 정보가 없어서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봐서 그 동안 여행 다니면서 들은 것과 직접 조사한 것을 토대로 지도를 펼치고 이렇게 저렇게 가라고 말해줬다. 그래서 륭법이는 내일 비행기 타고 요르단으로 가고 야스는 기차타고 라자스탄 지방의 조드뿌르로 간다. 그리고 나는 규화와 함께 바라나시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