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비행기를 떠나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한동안 멍하게 앉아있다 이런생각이 들었다.
‘여행 가려고 잘 다니던 직장 때려쳤는데 이렇게 있을 수 만은 없지. 어디로든 가자!’
황당하게 남미로 못가게 된 충격에 아무것도 모르는 새로운 곳으로 가 고생하며 여행하고 싶진 않고 편한 곳으로 가서 좀 쉬고 싶었다. 벌써 7번이나 가서 고향집처럼 다 아는 태국이나 가자. 그렇게 가장 빠른 티켓을 찾아 다시 이틀 후 방콕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리고 폰도 새로 샀다. 그것도 최신형으로. 쓰던 폰은 카메라 화질이 별로라 괜찮은 폰으로 사서 갈까 말까 했는데 잘됐다 싶어 이참에 좋은 폰으로 바꿨다.
출국날이다. 다시 공항철도를 타고 인천으로 가는데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새로 산 폰이 있는지 공항으로 가는 내내 몇번이나 체크했다.
공항에 내려 체크인을 하고 시간이 남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칸쿤행 티켓을 산 모두투어에 전화해봤다. 비행기 안탄 건 내 잘못이니까 혹시나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표라도 환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실낱 같은 희망을 품어봤다. 여행사 직원이랑 통화하니 아메리카 항공에 문의를 해보고 다시 전화준단다. 이미 비행기를 보내버리고 이틀이나 지나고 전화해서 설마하고 기다려 봤는데 답변은 예상외였다.
“아메리카 항공 직원이 그 날 고객님이 상황설명도 잘하시고 아예 말도 없이 비행기를 안탔으면 “No Show” 라서 환불이 아예 안되는데 체크인도 하시고 절차를 밟아주셔서 당일 취소랑 여행사 대행료 16만원 빼고 106만원이 환불돼요”
이건 뭐지. 예상지 못한 공돈이 생겼다. 그렇게 기분좋게 비행기에 올라탔다. 에어아시아는 이제 폰으로 비행기 모드도 안된단다. 무조건 폰을 꺼야한단다. 비행기안에서 심심할까봐 폰에 영화를 몇개 다운 받아왔는데 5시간 반동안 졸다 멍하게 있다 했다. 한국에 익숙해지긴 했나보다. 폰 없이 여행도 안하고 5시간 반은 여행하면 짧은 시간인데 그게 지루하다니.
드디어 방콕 도착. 얼른 나가고 싶은데 입국심사 줄이 너무 길어 또 한시간 줄 서서 나왔다. 그렇게 오고 싶었던 곳인데 막상 공항 밖으로 나오니 별 감흥이 없다. 집에 온 느낌이다. 얼른 사람들 모아서 택시비 쉐어해야지 하고 배낭 멘 사람들을 찾아다니는데 수완나폼 공항이 아닌 돈무앙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다. 공항 리무진 버스가 있길래 얼마냐고 물어보니 150밧. 그래서 택시타면 얼마정도 나오냐고 물어보니 500밧쯤 나온단다. 그래서 30분 기다리고 버스를 타기로 했다. 버스에 올라타고 멍하게 앉아 있으니 앞유리에 뭔가 종이가 붙어있다. 와이파이다. 태국 버스에 와이파이가 있다니. 태국은 올때마다 느끼지만 무시무시한 속도로 변한다. 퇴근시간 러시아워라 차가 좀 막히긴 했지만 즐겁게 와이파이를 쓰며 드디어 카오산 도착!
변한건 없다. 배낭을 메고 람부뜨리로 들어가는 순간 처음 방콕에 도착했을 때 없었던 감흥이 이제야 좀 살아나는 것 같다.
‘그래 이런 여유로움이 그리워 여기에 오고 싶었구나. 이런 자유로움을 못 잊어 다시 이곳에 오고 싶었구나’
익숙한 레인보우 환전소에서 일단 조금 태국돈으로 환전하고 길을 따라 주욱 걸어갔다. 오늘 내가 묵을 곳은 홍익인간 게스트하우스다. 원래 항상 방콕에서는 지니네 게스트하우스에 묵었었는데 이제 없어졌다. 배낭을 메고 숙소로 들어가니 1층에 다른 여행자들이 나를 반겨준다. 예약을 안하고 와서 오늘 방이 다 찼는데 메니저 분 자리를 주신단다.
“원래 방 없는데 우리집에 이런 스타일을 한 히피가 필요해요. 제 자리 드릴께요”
그렇게 짐을 풀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와 갈증에 맥주를 하나 사서 입에 물었다. 그랬더니 다른 분들도 너도나도 맥주를 사서 가져온다. 메니저 누나는 소주를 가져온다.
“원래 술 먹는 분위기가 아닌데 또 새로운 분이 오시니 분위기가 바뀌네요”
술 먹고 기타치고 노래도 불렀더니 다들 더 좋아한다.
그 중 몇몇은 클럽으로 가고 남은 사람들끼리 밥먹고 맥주 한잔씩을 더하기로 했다. 카오산으로 나갔다. 여전히 흥에 겨운 사람들과 에너지 넘치는 거리다. 예전에 몇 번 갔었던 여행자들보다 현지인들이 많이 가는 브릭바로 갔더니 이제 유명해졌는지 줄이 너무 길게 서있다. 그래서 카오산 초입에 있는 걸리버 클럽으로 갔더니 문 닫고 없어졌나보다. 아쉬운 대로 더 클럽 카오산으로 갔다. 웰컴 드링크 한잔하며 춤 좀 추다 숙소 앞에 있는 트럭 미니바에 앉아 모히또도 한잔했다. 그리고 다시 숙소로 가 1층에서 맥주 한잔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3년만에 다시 온 방콕의 밤을 기념했다. 많이 변했다지만 역시 방콕이구나.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