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어제 오랜만에 술을 꽤 마신데다 늦게 자서 오늘은 푹 자고 싶었다. 그러나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 때문에 7시 좀 넘어 눈이 떠졌다. 아무리 더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더 자는 걸 포기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어제 늦게까지 한잔하며 같이 얘기했던 형이 나를 맞아준다. 같이 아저씨 국수 먹으러 가자고 하려고 했지만 숙소에서 삼센까지는 너무 멀다. 그래서 마마가 주는 토스트에 커피로 대충 때웠다. 그리고 한참 일기를 쓰고 있으니 10시쯤 넘어 어제 같이 한잔했던 다른 형이 내려온다.
“형. 해장도 할 겸 국수 먹으로 가실래요? 제가 방콕에서 제일 좋아하는 맛집이에요!”
흔쾌히 오케이하고 둘이서 숙소를 나섰다. 일부러 람부뜨리를 걷지 않고 파수멘 요새 쪽으로 걸어가봤다. 안변한 듯하지만 내가 안 온 사이 모르는 건물들이 많이 생겼다. 검은 때가 잔뜩 끼어있던 파수멘 요새도 다시 페인트 칠을 했는지 제법 하얘졌다. 그렇게 또 걸어 삼센 다리를 건너갔다. 뭔가 벅차 오른다. 지니네 게스트하우스에 오래 머물 땐 맨날 지나다니던 길이었는데 이제는 큰 마음 먹고 와야한다. 익숙하게 생긴 ‘samsen soi2’ 표지판을 보고 우회전했다. 아마 여기에 세븐 일레븐이 그대로 없었으면 못 알아봤을 것이다. 거기에 있던 작은 로컬 식당들이 다 세련되게 바뀌어 있다. 지니네 앞 거리도 예전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고향집이 없어진 느낌이다. 이제 그곳에는 예전에 하던 빨래방 밖에 남지 않았다. 씁쓸하다.
그렇게 슬픈 마음반 배신감 반을 느끼며 모퉁이에 있는 아저씨 국수집에 갔다. 변한건 없다. 여전히 흰 수건을 이마에 두르고 있는 아저씨도 그대로다. 다만 변한 건 예전에는 매일 아침마다 가서 내가 자리에 앉기만 하면 주문없이 항상 내가 먹는 것을 알아서 줬었는데 이제 기억을 못하시는지 주문을 해야했다. 3년만에 왔으니 당연한건가. 그래도 감동적인 맛은 그대로였다. 돼지고기 국수랑 밥 그리고 콜라까지 그대로 시켜먹었다. 배터지게 먹고 이번엔 항상가던 망고 쉐이크를 먹으러 갔다.
“형 여기는 사람들은 잘 모르는덴데 양복집 비슷한 가게 안에 조그맣게 커피랑 주스파는데가 있어요. 거기 가요”
신이난 나는 앞장 서서 기억을 더듬으며 걸어나갔다. 양복집 아저씨도 그대로 있다. 친절한 미소도 그대로다. 다만 망고 쉐이크를 시켰는데 쉐이크안에 까만 씨가 있다. 분명히 내가 아는 망고 쉐이크에는 씨가 없는데 어떤 과일을 섞은걸까. 아무튼 맛있으면 됐다.
나의 짧은 추억여행이 끝나고 숙소에 돌아가니 어제 같이 한잔했던 동생이 있다. 오늘 라오스로 넘어가기 위해 국경도시 농카이로 가는 기차표를 끊어놨다고 어제부터 같이 가자고 했었다. 그래서 나도 오늘 방콕에 하루 더 있을까 그냥 바로 라오스로 가버릴까 하고 고민하던 중이었다. 나는 나를 잘 안다. 방콕에 있으면 귀찮아서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여기서 빈둥빈둥하다 끝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라오스 북부는 다 돌아봐서 남부도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이 동생이 말한다.
“형 저 오늘 한국 들어가야 해요. 갑자기 일이 생겨서..”
“엇 그럼 라오스는? 농카이 가는 기차표는?”
그러자 동생은 멋쩍게 웃으며
“할수없죠 뭐 표는 버려야죠”
“야 그럼 그거 나한테 버려”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그렇게 뜻하지 않게 라오스 가는 공짜표가 생겼다. 이건 고민하지 말고 그냥 라오스로 가라는 신호다. 운명이다. 그래서 버리는 표긴 하지만 공짜로 받긴 미안해서 동생 한국 들어가는데 공항가는 미니벤 표를 끊어줬다. 그래도 어마어마한 이득이다. 저녁 8시 기차라 12시에 체크아웃하고 1층에서 그때까지 버티기 좀 미안해서 메니저 누나한테 그냥 하루치 숙박비를 더 주며 편하게 있기로 했다.
그렇게 숙소에서 좀 쉬다 카오산으로 가서 쇼핑도 좀하고 또 빈둥빈둥 거리다 형이랑 끈적이 국수를 먹었다. 이건 오랜만에 먹어도 또 맛있고 너무 뜨거워 미친듯이 땀이 난다. 하루 숙박비도 더 냈겠다 기분좋게 숙소로 돌아와 씻고 기차 시간 1시간 반전에 숙소를 나왔다. 방콕 기차역인 후알람퐁역이 가깝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어떻게 될지 몰라 일단 택시를 잡아탔다. 역시나 얼마 걸리지 않고 금방 역에 도착했다. 미터기로 왔더니 61밧. 그래서 운전기사에게 100밧짜리를 줬더니
“미안해요 잔돈이 없어요. 그냥 팁으로 100밧 다 주세요”
이런 뻔뻔한 친구를 봤나. 동남아에서 자주 있는 수법이다. 이제 이런거에 안넘어 간다. 그래서 미국 달러로 2불 준다고 했다. 환율을 계산하면 2불은 태국돈으로 68밧이다. 그랬더니 손가락을 세개 펴보이며 3불을 달란다. 딱 잘라 거절하고 그냥 2불만 주고 내렸다.
8시 기찬데 역에 도착하니 7시. 1시간이나 남았다. 다른 현지 사람들처럼 나도 땅바닥에 엉덩이 붙이고 앉았다 담배피러 일어났다 하며 기다리니 농카이행 기차가 온다. 이제 내일은 라오스겠지.